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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해당되는 글 3

  1. 2014.08.02 한국사 속 연대, 연합의 빛과 그늘 (2)
  2. 2008.03.12 최치원
  3. 2008.02.26 나제동맹
세상에는 힘이 없는 세력이 있다. 반면에 힘이 있는 세력이 있다. 힘이 없는 세력들은 힘이 있는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힘을 모은다. 그것은 연대나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의 연대와 연합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을까? 우리 역사에서 적어도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연합은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나제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백제는 고구려에게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이 참수당했으며, 신라는 고구려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면서 신하의 나라로 자처했다. 압도적인 고구려의 국력 아래 나제동맹은 ‘고구려를 몰아내는 것’이 아닌, 그저 두 나라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나제동맹, 나당동맹은 일시적 연합일 뿐

이후 고구려의 국력이 잠시 퇴조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고,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어떤 분명한 비전이나 가치에 대한 공유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한 나제동맹은 그 한계가 분명했다. 적이 사라지자,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 멸망까지 두 나라는 근 100년이 넘도록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도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최후의 보루인 대야성마저 빼앗기자 다급해졌다.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 후방 공격을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곧바로 서로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서인과 남인의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두 세력은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연합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후 두 세력은 갈등하기 시작했고, 숙종 때는 환국정치를 통해 서로를 몰살시키기에 이른다. 

‘공동의 적’ 사라지면 또 다른 전쟁 시작 이렇게 공동의 적을 상정한 가운데 성사된 연합은 얕은 수준밖에 이르지 못한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후에는 서로 또 다른 전쟁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반면에 비전과 신념까지 공유하는 깊은 연대가 있다.

깊은 신념 공유하는 연대도 있어

대표적인 것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말 신흥무장세력과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 세력 간의 연합이다. 당시 고려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생겨난 권문세족은 고려를 좀먹고 있었고, 왜구·홍건적 등의 침공으로 국토는 피폐해졌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족들은 여전히 그 힘을 누리고 있었고, 개혁을 원하던 공민왕과 신돈을 제거했다. 당시 신진사대부의 힘만으로는 권문세족을 꺾을 수 없었다.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와 손을 잡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둘의 연합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연합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연합이었다. 그렇게 신진사대부와 이성계의 결합은 조선 왕조를 태동시켰다. 

위의 사례와는 달리 얕은 연합에서 깊은 연대로 변환한 사례가 있다. 바로 구한말 의병전쟁이다. 일제의 강점을 막기 위해 양반 위정척사파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민중들도 자체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 시대 내내 기득권과 피지배층으로 살아왔던 두 세력이 손을 잡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 두 세력의 연합은 문제가 많았다. 양반 의병장들은 민중 의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평민 출신 의병을 죽이기도 했다. 일제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일시적으로 서로를 인정해 주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두 세력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의병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1910년 이후에는 모두 공동운명체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두 세력은 만주와 연해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처음에 두 세력의 연합은 그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을 뿐이었으나, 민족해방의 신념을 공유하며, 오랜 시간 동안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깊은 동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깊은 연대가 꼭 좋은 역사적 사례만 낳은 것은 아니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90% 가까이 좌익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손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반공 이념과 좌익세력 척결이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이승만 정권을 탄생시켰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연대니 연합이니 하는 얘기가 자주 들려 온다. 과연 그것이 단순한 상황 타개를 위한 논리인지, 아니면 신념과 비전을 공유하고 먼 길을 함께 가자는 것인지 유권자들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념과 비전을 공유한 깊은 연대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우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3월 31일 자 기고글입니다. 원 제목은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18) 역사 속 연합과 연대" 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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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02 2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임종금 JKL 2014.08.03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죄송합니다. 급히 자료들을 백업한다고 글들을 올리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됐습니다. 저도 그걸 우려해 그제께부터 하루에 한 편 씩만을 올리고 있습니다. 유의하겠습니다.

2008. 3. 12. 20:29

최치원 과거 글들/사전2008. 3. 12. 20:29

최치원은 아주 어릴 적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최치원은 진골이 아니라 6두품이었다. 어린 최치원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벼슬은 6급인 ‘아찬’에 불과하며, 진골 귀족들의 멸시와 차별 아래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 겨우 12살이었다. 어린 최치원은 외로이 당나라로 떠났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공부했다. 그리고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했다. 빈공과란 과거시험 가운데 당나라에 있는 외국인들끼리 겨루는 과거시험이었다. 겨우 18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최치원은 강소성 ‘율수’라는 곳에서 관리가 된다. 그곳에는 관리로서 최치원은 그곳을 훌륭히 다스린다. 그곳에서는 최치원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쌍녀분이다. 쌍녀분은 강제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자매의 묘였다. 이들을 위해 최치원이 위로의 시를 바치자 감동한 두 소녀의 혼령이 그날 밤 최치원을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최치원은 글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그의 시를 보고 나서 유명한 중국 문인(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18살에 문단을 휩쓸어 단번에 최고가 되었다.”라는 내용의 시를 남겼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남긴 1만 편의 시들은 지금도 중국 사람들이 감탄하고 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는 동안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당나라도 백성들의 삶이 많이 힘들었다. 당나라에서는 이 반란을 막지 못해서 쩔쩔매었다. 그러다 ‘고변’이라는 장군을 불러들여 반란을 막으려 하였다. 최치원은 이 고변이라는 장군아래에서 이런저런 일을 보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고변이라는 장군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 사람이라는 것이다.

최치원은 고변 장군의 일을 도와주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글을 한 편 쓰게 된다. 그 제목은 ‘격황소서’이다. 반란군 대장인 ‘황소’라는 사람을 토벌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반란군 대장인 황소가 최치원이 쓴 글을 보았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글 하나로 반란군 대장을 놀라게 할 정도로 최치원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최치원은 그 공을 인정받아 25살의 나이에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받는다. 자금어대는 금으로 칠해진 황제가 내린 허리띠다. 이는 대단히 명예스러운 일이다. 황제가 최치원을 인정하고, 아주 높은 자리를 줄 것이라는 상징이었다.

그 동안에 최치원은 매우 많은 글을 썼다. 그 글들은 당나라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글들이었다. 훗날 당나라가 망하고 당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신당서’라는 역사책이 만들어진다. 그 책에 유일하게 외국인이 쓴 글이 언급되어 있는데, 바로 최치원의 글이다.

최치원은 시를 쓰고 글만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각종 자료들을 정리하고, 남겼는데 너무나 완벽하게 정리한 것이 많아서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 도처에 남아있다. 이렇듯 최치원은 중국에서 최고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쓴 수많은 글들은 계원필경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남아있다. 또한 중국에서도 수많은 그의 글들이 남아 있다. 그 글들을 통해서 우리는 최치원이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실이 좌절한 최치원에게 다소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은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가 떠나온 조국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있으면서 신라가 휘청거리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가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다.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당나라 황제는 최치원의 결심에 매우 섭섭해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최치원은 28살에 신라로 돌아왔다. 당나라로 떠난 지 16년 만이었다. 당나라에서 최고의 천재로 이름난 최치원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신라 임금은 매우 놀라워했다.

신라 임금은 좋은 자리를 줘서 최치원을 가까이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의 눈치가 매섭다는 것을 바로 느꼈다. 왕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진골 귀족들에게는 새로운 경쟁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최치원을 좋아하는 왕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왕이 죽는다면 자신도 죽을 것이다. 최치원은 경주를 떠나서 외지를 떠돌았다.

신라 임금은 최치원에게 태수(시장)의 벼슬을 주었다. 최치원은 경주를 떠나서 자신이 관할하는 곳에서 조용히 머물렀다.

그곳에서 최치원은 신라의 문제점을 꼼꼼히 따져보았다. 그리하여 임금에게 그 문제점과 해결책을 정리해서 올렸다. 이것이 바로 ‘시무 10여조’라고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지금 남아있지 않지만, 여러 상황으로 볼 때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골품제를 없애라고 말했을 것이다. 골품이 낮은 사람은 능력이 있더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없고, 진골 귀족들이 높고 중요한 자리들은 모두 독차지 하고 있었다. 최치원은 골품제를 없애고, 과거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시험은 능력에 따라 관리들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거시험을 치른다면 게으른 진골 귀족들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을 것이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적어 놓았다. 최치원이 올린 ‘시무 10여조’가 이뤄진다면 신라는 다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임금은 일단 최치원을 다시 경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아찬’이라는 벼슬을 내린다. 6두품으로서는 가장 높은 등급의 벼슬이었다. 최치원은 자신이 올린 ‘시무 10여조’가 이뤄지길 간절히 바랬다.

당시 신라의 임금은 진성여왕이라는 여왕이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시무 10여조에 공감했지만, 이미 임금의 힘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진골 귀족들이 언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임금은 그저 하루하루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최치원은 분노했다. 자신이 최선을 기울여 만든 시무 10여조가 이뤄지지 않자, 최치원은 벼슬을 버리고 떠돌기 시작했다. 894년, 최치원의 나이 37살이었다.

최치원은 정처없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경치 좋은 곳에서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전국 곳곳에 최치원이 흔적들이 남아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산 해운대도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해운대의 ‘해운’은 최치원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해운대는 최치원이 머물던 곳이라는 뜻이다.

최치원은 전국을 떠돌면서 불교와 신선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치원은 유학, 불교, 신선사상, 이 3가지를 통일시켜서 자신의 철학으로 삼았다.

최치원이 떠돌기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신라는 갈라졌다. 그리고 왕건이 유력한 호족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치원은 자신의 못 다 이룬 꿈을 왕건에게 편지로 알려줬다. 왕건은 최치원의 편지를 보면서 새로운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 생각했을 것이다.

최치원은 우리가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고 있는 합천 해인사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역사학자들도 그 이후의 생애는 밝혀내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은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 만큼 최치원은 당시 사람들에게 뛰어난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 사회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인 시무 10여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돌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골품제와 여러 문제들은 그만큼 높고 단단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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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6. 23:04

나제동맹 과거 글들/사전2008. 2. 26. 23:04

신라백제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공동대처하기 위하여 433년 나제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초기 동맹은 견고하지 못하였다. 서기 475년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 한성(서울)을 점령하고 백제 개로왕을 죽일 때까지 신라군은 겨우 백제 국경을 넘는 정도였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충청도 남부지역까지 밀려나고, 신라포항 이북까지 고구려에게 넘어가는 등 두 나라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동맹은 견고해지기 시작했다. 양국은 493년 결혼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서 같이 군대를 움직이기로 약속했다. 553년 백제 성왕신라 진흥왕은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백제는 한강유역과 경기도 일원을, 신라경북 북부와 강원도 지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과 경기도 일원을 기습, 점령함으로써 나제동맹은 깨어졌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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