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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07년 27살 때 어느 게시판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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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포탈 사이트 뉴스를 자주보며, 가끔씩 기사 덧글도 남기는 네티즌입니다. 하지만 최근 기사 덧글란을 볼 때마다 수많은 회의가 들고 있습니다. 바로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기사 덧글란의 폐해

 

1. 기사를 안 보고(대충 제목만 보고) 덧글부터 달기 때문에 기사에 대한 이해없이 대책없는 진흙탕 싸움만 일어납니다.

 

2. 근거없는 비난여론의 확대 재생산의 공간이 됩니다.

 

3. 개인 명예가 훼손됩니다.

 

4. 등수놀이와 소위 '초딩'들의 개입으로 기사와 전혀 상관없는 놀이터로 전락했습니다.

 

5. 소수의 네티즌들이 여론형성과정을 독점합니다. 본인도 그에 해당하지만, 극소수 0.1%의 네티즌들의 덧글들이 마치 네티즌 다수의 여론이냥 호도됩니다. 더욱이 몇몇 언론들은 이런 덧글들을 '국민의 소리'인양 보도까지 하는 실정입니다.

 

6. 정상적인 여론수렴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좋은글을 써도 몇몇 악플러들이 태클을 걸면 그 사람은 바로 덧글방을 떠나게 됩니다. 이미 덧글란은 말꼬리 잡기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7. 특정 정치단체의 알바터가 되었습니다. 진보니 보수니를 떠나서 이미 이곳은 정치단체의 용역을 받은 '마케팅 회사'의 알바터가 된 지 오래입니다.

 

(사례제시)

 

전 회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얼마전 회사가 새로운 서비스를 launching하고 이를 프로모션하기 위해서 대행업체의 팀장을 불러서 프리젠테이션을 받기전에 브리핑을 간단히 받는 자리였죠. 그 자리에서 그 친구가 효과적인 마케팅툴이라고 추천해준 것이 바로 입소문마케팅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보라고 했더니, 얼마전에 인터넷상에 떠돌던 X녀가 자기네들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 모델이 워낙 아니여서 끝은 흐지부지했지만, 어쨋든) 그러면서 정치권의 얘기로 흘러가던군요. 그 친구왈, 모 정당과 그 관계자들이 외곽조직을 이용해서 인터넷상에 무차별적으로 돈을 들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자금줄 파악이 어렵게 외곽조직이나 청년회, 기타 다른 경로로 자금은 투입하는데, 그 비용이 5인 또는 3인 1조로 활동하면서 한달에 1000~1500정도의 경비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1. 반대하는 정당이 삽질할 때 - 지속적으로 공격한다


2. 지지하는 정당이 삽질할 때 - 일단 두둔하는 글을 남긴다 / 반대당의 비슷하지만 말도 안되는 유형의 사건을 끌어들여서 물타기한다 / 게시판자체를 지저분하게 만들어버린다 (욕설 및 비방) / 글을 잘 쓰거나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은 떼로 덤벼들어 싸가지가 없다거나, 비약이라는 등의 글로 묻어버린다.그래서 게시판을 떠나게한다.


3. 부동산.경제관련 뉴스 - 그 기사의 내용에 관계없이 무조건 비판해서 댓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negative frame에 갇히게 만든다.

 

고 하던군요. 엄청난 자금이 인터넷 구전마케팅회사로 흘러가고, 이게 결국 인터넷문화를 더럽히는 상황을 보면서 단순히 정치만의 문제를 떠나, 우리 온라인문화가 황폐해질까 걱정입니다. 이런 영업조직은 뿌리뽑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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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으로 인해서 기사 덧글란은 이미 처음의 목적인 '기사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실어낸다'는 취지를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공격과 비난, 치기어린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어 오히려 '생각있는' 네티즌들은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사 덧글란은 오히려 기사내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럼 보기 싫으면 덧글란 닫기를 설정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수 도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억지로 회피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 기사 덧글란은 계속적으로 사회적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제 이 문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법정까지 가게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단순히 문제를 회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포탈은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포탈은 그에 대한 공적인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야후나 다른 나라의 미디어 메뉴에는 기사 덧글란이 없습니다. 기사를 읽고 정보를 얻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인해서 없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기사 덧글란'이 없다고 운영이 안되거나 사람들이 안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나 야후 한복판에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주요기사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즉, 기사 덧글란이 없어도 우리가 세상을 알고, 정보를 얻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명제를 하자는 말도 있습니다. 다음이나 네이버도 본인확인을 통해서 제한적인 실명제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명제를 한 사이트를 가보십시오.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가보십시오.)


그렇다면 대안은?

 

기사 덧글란이 없어지면 소수이지만 '괜찮은 글'도 볼 수 있는 장이 사라집니다. 이런 경우 같은 주제의 기사라도 진보적 언론의 기사와 보수적 언론의 기사를 비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게시판에서 해당 기사와 관련된 좋은 글은 링크를 걸어서 게시판에서 논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디어 비평란을 신설해 주십시오. 분명 기사들 중에서는 간접 광고형 기사, 왜곡된 기사, 편향적인 기사들이 있기 나름입니다. 기사 덧글란에서는 일군의 네티즌들은 거기에 대해서 지적한 좋은 글들을 저도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그 기사가 내려가면 묻혀지고 맙니다.

 

기사 덧글란의 미디어 비평기능을 살리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미디어 비평마당을 따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기사나 언론에 대해서 엄중한 비판기능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미디어 비평마당의 글들은 묻혀지지 않고, 계속 누적되어 언제든지 검색이 가능하도록 운영한다면 우리언론사에 좋은 모습을 남길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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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아버지가 출마한 제1기 지방선거부터 나는 지방선거와 인연이 많았다. 아버지 선거는 당연하고, 2002년에는 민주노동당 후보들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2010년 김두관 도지사 후보 캠프에서 온라인 팀장을 하기도 했다. 이후 기자로써 지방선거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선거 보다 지방선거가 나는 익숙하고 편하다. 최근 경남지역 시사블로거들과 함께 내년 지방선거 출마가 확실시되는 공민배 전 창원시장, 전수식 전 마산부시장, 허성무 전 경남정무부지사와 간담회를 했다. 


말이 간담회지 근 2시간 넘도록 온갖 질문이 쏟아지는 자리였다. 간담회 내용은 누가 잘했다 못했다 현직 기자인 내가 평가하긴 어렵다. 다만 이제 지방선거는 어떤 선거인가 '실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서 글을 쓴다. (이는 경남/경북 선거 경험에서 기초한 글이라, 수도권이나 대도시 선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민배 전 창원시장. 사진 순서는 간담회 순서.



1. 이제 프로 선거꾼 시대


지방선거도 이제 1991년, 1995년,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을 거쳐 2018년이면 무려 8번이나 치렀다. 


이제 8번이면 사람들의 노하우도 충분히 쌓일 때다. 사실 다른 선거 보다 지방선거는 뭔가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났다. 대통령 선거야 최고 전문가들이 하는 거고, 국회의원 선거도 정부 수립 이후부터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방법이나 노하우, 표 계산 등이 정교해질 대로 정교해졌다. 사실 전국에서 비례대표 빼면 250명 정도 밖에 안 뽑는 선거니 아마추어들이 끼일 자리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방선거는 워낙 선출 인원이 많기 때문에 아마추어 브로커·참모들도 어째 요행으로 끼어들 여지가 있었다. 그렇게 선거에 맛을 들인 아마추어들도 여러 번 하다보니 이제 프로가 됐다는 말이다.  이번이 처음인 선거 신참과 여러 번 구른 프로 선거꾼 사이 격차는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 


전수식 전 마산부시장.



2. 사람 구하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후보자는 프로 선거꾼을 빨리 포섭해야 한다. 이미 선거판에서 어느 정도 평판이나 검증이 된 프로 선거꾼은 누구나 데려가려고 한다. 또 프로 선거꾼은 여러 선거에 걸치지 않는다. 한 선거에 집중한다. 여러 선거에 기웃대는 사람은 진심을 다하기 어렵고, 자기 이익 계산부터 한다. 그런 이들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늘어 놓지만 실효성이 없고, 되레 선거 조직에 위해가 된다. 


이런 점을 알기 때문에 눈치 빠른 후보는 빨리 움직였고, 지금 프로 선거꾼 가운데 70~80%는 뛸 곳을 결정한 듯 보였다. 아직 선택하지 않은 20~30%는 여러 곳에서 콜을 받고 있거나 혹은 다른 이와 '전공'이 중복되거나 아니면 과거 선거에서 손발이 안 맞은 뭔가가 걸려서 선택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들도 연말 전에 갈 곳을 정할 것이다. 따라서 2018년이 지나서 선거 준비를 한다는 것은 이미 늦은 셈이다. 물론 자신이 엄청난 인지도와 영향력을 갖췄다면 프로 선거꾼들을 흡수할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경남에서 그 정도 힘을 갖춘 사람은 별로 없다. 


허성무 전 경남 정무부지사.



그러면 이런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도지사의 경우 아직 누가 나올지 불투명한데 너무 섣부르게 단정짓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당에서 선거를 치러준다고 하더라도 후보로 나설 마음이 1%라도 있으면 이미 움직임이 있다. 후보로 나설 사람은 서울에서 딴청 피우고 있지만, 이미 지역에서는 혹시 만일을 생각해서라도 사람을 모을 수밖에 없다. 이런 움직임이 전혀 없는 사람은 내년 선거에 안 나선다고 봐도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딱 한 사람, 프로가 옆에 있든 없든 선거를 자체적으로 치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김경수 의원. 이 사람은 최소한의 보좌진만 데리고 그냥 열심히 돌아다니기만 해도 기본적으로 40% 이상은 득표 가능한 사람이다. 


3. 극단적인 변수는 갈수록 적어진다


모든 게 연결되는 이야기다. 선거꾼들도, 심지어 유권자들도 이제 프로다. 누가 되고 안 되고 짐작할 수 있다. 고로 승산없는 사람이 득표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앞으로 지방선거 가운데 대규모 선거(도지사, 교육감, 창원시장) 출마자가 천천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무슨 '진보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미래를 보기 위해 이름 알리기' 식의 출마를 하기에는 대규모 선거의 경우 소모되는 비용이 너무 크다. 그리고 뭔가 이색적인 것을 내세워도 유권자들이 그거 하나만 보고 동하진 않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단일화 해 주고 도의원이나 시의원 하나라도 더 보장 받는 것이' 실질적으로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정당들도 알 것이다. 

민주당에서 만든 허성무 전 경남 정무부지사 홍보물. 소주병에 붙여서 감쪽같이 만들었다. 최근 경남에서 민주당 선거역량은 놀랍도록 성장했다.



고로 대규모 선거의 경우 본선에서 2~3명의 싸움으로 승부가 날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개인 경험으로 비춰봐서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 뭘까?  


4. 지방선거에서 유의해야 할 점


-중요한 공약이나 '패'는 지금 오픈하지 마라. 주목 받기도 힘들 뿐더러 상대를 편하게 해 준다. '아 저쪽은 저게 핵심이네, 그럼 여기서는 이렇게 받아치지' 상대에게 너무 편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 내년 3월, 혹은 4월이 지나서 오픈해도 된다. 

-출마/불출마 여부도 최대한 늦게 말해야 한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리가 됐다고 하더라도 상대편은 누가 출마하고 누가 출마하지 않는다고 알면 대응하기가 편해진다. 지방선거는 선출자들도 많고 복잡한 선거다. 상대를 편하게 해줄 이유가 없다. 

-각 분야별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참모들도 SNS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속 보이게 후보 알리는 데에 집착하면 친구들이 떨어져 나간다. 지금은 편하게 친구 맺는 데 집중하고, 내년 3월 이후에 '본색'을 드러내야 한다. 

-돈 관리는 직접(혹은 최측근이거나 가족) 해야 사고가 안 생긴다.

-지역조직에서 책임자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선거를 하다 명함을 막 파주다 보면 옥상옥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분명 분란이 생긴다.

-업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장기 목표, 중기 목표, 일별 목표를 세워 놓고 매일 진전도를 보고 해야 한다. 

-대학생들을 사귀어야 한다. 나중에 필요할 때가 분명 생긴다. 

-아줌마들 한 무리 정도는 확실하게 포섭해야 한다. 역시 나중에 필요할 일이 분명 생긴다. 

-지역 토호들은 과거 보다 영향력이 약하다. 그들에게 휘둘릴 필요 없다. 뭉치표 갖고 온다는 보장이 없다.

-동창회 명부, 동문 명부 등을 가져오면서 생색을 내는 사람이 있다. 사실 구하는 건 어렵지 않고, 또 그 사람은 여러 곳을 돌면서 이미 명부를 뿌렸을 것이다. 이 캠프 저 캠프 기웃대는 사람은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

-선거 구호, 정책, 비전 등은 반드시 주변 '일반'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 지 알 수 있다. 캠프 속 여론에 매몰되어서 결정하면 안 된다.

-봉투를 주지 말아라. 불법일 뿐더러, 이제 시골에서도 갈수록 돈의 위력이 안 통한다. 시골에서 출마했다면 차라리 '저는 돈을 한 푼도 안 쓰겠습니다. 제가 지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돈 선거는 여기서 끝을 봐야 합니다'라고 전략을 세우는 게 나을 수 있다. 우리 아버지가 상대 50억 쓸 때, 어설프게 10억 쓰다가 물량에서 밀렸다. 위에 얘기한 대로 아버지가 했다면 이겼을 것이다.

-공보물 기획·인쇄처를 미리 정해놔야 한다. 공보물 수요가 더 많아질 것이고, 나중에 급할 땐 밀려서 선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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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7일 오후 방송.


경남에 내리는 집중호우에 대한 시민의견이었습니다.


최근 청주에는 시간당 90㎜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지면서 

이재민 500명이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는데요.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

우리 경남지역도 예외는 아닙니다.


과연 경남에는 집중호우가 

얼마나 자주 내렸는지

경남도민일보 임종금 기자

연결해서 이야기 나눠 봅니다.


안녕하십니까?


2014년 8월 25일 창원지역 집중호우 당시 모습./경남도민일보DB




1> 경남에는 얼마나 자주 집중호우가 내렸나요?


제가 도민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정리를 해 보니까

2000년 대 이후 57번 정도 됩니다.



2> 우리 경남에도 집중호우가 많이 오는 편인가요?


조사해 보니 2000년 이후 거의 매년 집중호우가 쏟아졌고 거의 매년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타 시도와 비교하기 위해 행정안전부 특별재난지역 데이터를 살펴보니 강원도 전남 경남 이 3곳이 태풍과 집중호우로 특별재난지역으로 자주 선포가 됐습니다. 아무래도 이 지역에 집중호우가 많이 쏟아지고 태풍 피해가 주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3> 경남에서도 주로 어떤 지역에 피해가 많았습니까?


큰 차이는 없지만 굳이 나누자면 북부내륙 지역 보다는 아무래도 해안가가 피해가 컸습니다. 하동부터 남해안을 따라 남해, 사천, 진주, 창원, 거제, 김해, 양산 등이 상대적으로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듯 합니다. 단순 인명피해로 보면 아무래도 시골 보다는 도심지가 인명피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최근 들어 인명피해를 살펴보면 상대적으로 창원지역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4> 집중호우 중에서도 최근에는 국지성 폭우로 인한 피해가 많던데요. 경남에도 국지성 집중호우가 쏟아진 사례가 있나요? 


네, 얼마전 마산 양덕천 참사도 옛 마산지역 그 가운데서도 양덕천 인근 지역에 시간당 37미리의 비가 쏟아졌습니다. 양덕천 인근 지역을 벗어나면 옛 마산지역이라도 비가 거의 안 왔습니다. 2011년 8월 7일에도 하동 악양면에 시간당 111미리의 폭우가 쏟아져 인구 밀도가 낮은 시골지역임에도 이재민이 109명이나 생겼습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청양면은 34미리 밖에 안 왔습니다. 2003년 의령에서는 북부 4개 면에는 시간당 50미리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지만 남부지역엔 아예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리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이라면 골고루 내렸을 비가 이제 특정 지역에만 퍼붓다 보니 예상치 못한 폭우가 피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5> 이런 국지성 집중호우가 문제가 되는 이유가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인데요. 최근 경남에서 국지성 집중호우로 인한 인명피해가 조사된 게 있나요?

 

네,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지난 번 양덕천 참사도 그렇고 2015년 8월 25일 창원지역 집중호우로 8명이 사망했습니다. 특히 진동면에 시간당 111미리의 폭우가 쏟아졌는데 이때 시내버스가 불어난 하천에 휩쓸려 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2011년 7월에도 지역별 국지성 집중호우로 8명이 사망했는데 특히 밀양에서 산사태로 일가족 3명이 숨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9년 7월 16일 마산에 시간당 102미리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질 때도 3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습니다. 



6> 사실 태풍 같은 대규모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국지성 집중호우는 조금만 신경을 쓰면 피해를 막을 수 있지 않나요?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국지성 집중호우는 예보하기도 어렵고, 또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 비는 괜찮겠다. 이 비는 위험하다. 이런 판단기준을 뛰어넘는 비가 갑자기 오기 때문에 일을 하거나 그 지역에 살아온 주민이라고 하더라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국지성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주민은 바로 대피하고 해당지역 차량운행을 통제하고 공사현장에서는 바로 철수하는 경보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7> 이번에 청주에 많은 비가 내렸죠. 우리 창원지역도 시간당 90mm의 비가 오면 속수무책일 것 같은데요?


네. 창원시의 경우 배수 한계가 시간당 25미리를 기준으로 돼 있습니다. 하지만 25미리 이상 왔을 때를 대비해 배수장과 배수펌프 등을 총 가동하면 조금 더 버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공무원들 얘기대로라면 시간당 50미리가 넘어서면 한계가 부딪힙니다.



8> 빗물 수용한계를 너무 적게 잡은 거 아닙니까?


먼저 제 생각에 창원시가 타 도시보다 호우 방재기능이 크게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도시에 호우 방재시설 등을 만들 때 기준이 10년 만에 호우 최대치, 혹은 30년 만에 호우 최대치를 잡고 도시 전체적인 것을 보면서 시설을 짜기 때문에 현재의 방재시스템 상으로는 협소한 특정 지역에 갑자기 쏟아 붓는 것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9> 앞으로 국지성 집중호우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인데 행정당국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할까요?


네, 앞서 말한 경보시스템 구축도 필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 일단 빗물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해당지역에 비가 내리면 이 빗물이 도대체 어느 경로로 얼마나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자체가 분명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 용역을 통해 빗물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이를 토대로 저류지를 만들거나 배수로를 넓히거나 혹은 빗물을 어느 방향으로 우회하도록 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가 어제 창원시 몇몇 부서에 연락을 돌려봤지만 이런 얘기 자체를 애초에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러 대책이 있겠지만 제 생각에 빗물의 이동경로부터 파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임종금 기자였습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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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1 19:29

글쓰기 기초 '간단하게 써라' 기타/시사2017.09.01 19:29

저도 문장력이 참 떨어지는 기자 중 한 사람입니다. 볼 때 마다 어색한 부분이 자주 나옵니다.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글도 수 차례 수정을 하곤 합니다. 저의 문제를 알아본 김주완 이사가 권하는 글쓰기 기초입니다. 기자가 아니더라도 글쓰기로 애먹는 분은 참고하길 바랍니다.



-기사를 쓸 때에는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는지를 항상 확인하라. 

-초등학생 정도가 읽고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쓰도록 노력하라. 

-한 문장에는 가급적 하나의 의미만 담아라.

-내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은 아예 쓰지 마라. 모르는 용어도 쓰지 마라. 

-단어 앞에 들어가는 수식어는 하나 이상 넘어가면 안 된다. 

-컴퓨터 상에서 문장의 길이가 두 줄을 넘어가면 길다. 가급적 두 문장으로 나눠 써라. 

-다 쓴 후에는 반드시 읽어보고 중복되거나 호흡이 막히는 데가 있으면 고쳐 써라. 


이걸 인쇄해서 어딘가에 붙여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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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40대 이상에게 1987년 태풍 ‘셀마’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6.29선언과 민주화, 곧이어 시작된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1987년. 7월 15일과 16일에 걸쳐 한반도는 태풍 셀마의 내습을 받았다. 이로 인해 무려 345명이 숨지거나 실종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345명의 인명피해는 해방 이후 역대 3위(1959년 사라 849명, 1972년 베티 550명)에 해당되는 큰 피해였다. 


먼저 태풍 셀마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 


태풍 셀마 최전성기 사진(필리핀 동쪽 해상).






태풍 셀마는 1987년 5번째 태풍으로 괌 인근에서 발생했다. 이어 필리핀 동쪽해상에 도착했을 때 중심기압 911헥토파스칼, 중심최대풍속(1분) 초속 65미터에 달하는 매우 강한 태풍으로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태풍 셀마의 압권은 바로 태풍의 크기(영향권)이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초속 15미터 이상 강풍이 부는 범위가 무려 1850킬로미터에 이른다. 한반도 4~5개가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간다는 소리다. 최근 5년새 영향권 1800킬로는 고사하고 아예 1000킬로미터가 넘는 태풍이 거의 없을 정도로 셀마는 엄청난 영향권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건 필리핀 동쪽 해상에 있을 때고, 아시다시피 태풍은 올라오면서 점차 힘이 약해진다. 태풍 셀마는 전남 고흥반도 부근에 상륙하게 되는데 당시 중심기압이 970헥토파스칼, 중심최대 풍속은 40미터 정도로 상당한 힘을 자랑했지만 ‘역대급’은 아니었다. 참고로 태풍 사라나 태풍 매미 등은 중심기압 950헥토파스칼, 최대풍속 5~60미터를 곳곳에서 기록할 정도였다. 강우량도 산청 296미리를 최고로 강릉 270미리, 남해군 265미리 등 200미리 이상을 기록했다. 강우량도 적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2002년 태풍 루사(강릉에 870미리), 1991년 태풍 글래디스(부산~울산에 500미리 이상) 퍼부은 것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자,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사실 바람이나 강우량 모두 역대급은 아닌 태풍이다. 그런데 왜 역대급 피해를 봤던 것일까? 


기상청(당시는 중앙기상대)은 태풍 셀마가 북상할 때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고 대한해협, 특히 대마도 인근으로 빠져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일본이나 미 해군 기상대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상륙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기상청은 대마도로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고집스레 예보했고, 이로 인해 어선들이 대피하지 못했다.


7월 15일 태풍이 제주도 인근까지 올라왔지만 예상 진로는 여전히 대마도로 빠져 나갈 것이라고 고집했다. 매일경제 1987년 7월 15일 자 보도.



사실 초대형 태풍도 아닌 중형 태풍이 대마도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예보하면 당연히 경남 서부~호남지역 어민들은 ‘우리는 큰 피해 없겠네’라고 마음을 놓게 된다. 


그 결과 345명 인명 피해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대피하지 않은 어선 어부들이었다. 또한 산업현장, 항구에서 넋 놓고 있다가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었다. 


더 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기상청에서는 태풍 셀마가 분명히 고흥반도를 지나 한반도 남부내륙을 통과해 동해상으로 빠져 나간 것을 알고도 ‘책임 회피’를 위해 자신들이 예상했던 진로대로 대한해협을 통과해 나갔다고 거짓 보도자료를 냈다. 약간 수정된 것이 있다면 대마도가 아니라 부산 앞바다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1987년 7월 17일. 동아일보가 태풍 셀마 진로에 대해 처음으로 의혹을 제기했다. 재밌는 건 진로도 맨 왼쪽 기상대가 발표한 경로다. 자신의 오류를 막기 위해 (대한해협으로 빠져 나갔다는 것) 최대한 부산 앞바다에 스쳐 지나간 것으로 발표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7월 17일 1면 기사에서 일본 기상청 진로도를 참조해 ‘예상진로가 틀린 게 아니냐’는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하지만 기상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7월 22일 민주당은 자체 조사를 통해 책임회피를 위한 자료조작 행위가 있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상청은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후 노동자 대투쟁, 대통령 선거 국면, 또 다시 이어진 태풍과 폭우로 이 사실은 어물쩍 넘어가는 듯 했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88년 1월, 기상청이 발행하는 <기상월보> 에 태풍 셀마 진로가 슬그머니 고흥반도를 지나 남부내륙을 통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 동아일보 기자에게 들켰고, 이로 인해 기상청 고위 관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게 된다.


기상청이 애초에 태풍 예보를 제대로 했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인명피해. 그리고 자신의 오보를 숨기기 위한 진로조작. 태풍 셀마 진로조작 사건은 기상청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진상을 밝혀낸 것은 동아일보의 공이 컸다. 언론 역시 공공기관의 자료를 받아쓰기만 할 게 아니라 항상 의심을 품어야 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다시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붉은 선이 당시 기상청 예상 경로다. 태풍 진행 경로보다 약 300킬로미터 이상 오차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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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한때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진영의 '국제주의'는 아름다웠다.


비록 내 나라, 내 민족의 일이 아니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그들의 결기는 찬란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수만 명에 달하는 유럽 좌파들이 스페인 공화국군을 돕다가 죽었다. 


일제시대 때에 중국 공산당과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공적인 일제에 맞서 싸웠고, 심지어 일본인 가운데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남몰래 독립운동을 지원해줬다. 비록 자기는 일본인이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조선인과 중국인을 돕는 이들이 (지금은 일부 사례만 남아 있지만)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쿠바 혁명의 주역 체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쿠바 혁명에 참가한 후 쿠바국립은행장을 하다 볼리비아 사회주의 게릴라들을 돕다 죽는다. 아프리카에서도 이 같은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들의 국제주의와 연대를 상징하는 노래가 바로 인터내셔널가다. 현재 최소 50개 언어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가사도 내용도 약간씩 다르다고 한다. 

인터내셔널가를 상징하는 이미지



그런데 나는 유독 민중가요 가운데 인터내셔널가는 참 귀에 꽂히지 않았다. 리듬이 문제가 아니라 가사가 참 귀에 안 들어왔다.


지금 가장 많이 불려지고 있는 인터내셔널가 한국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 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

참, 뭐랄까. 딱딱하고 경직된 단어들이 한없이 늘어져 있다. 운동권 선전물에서 자주 쓰던 단어들의 결집체라고 할까? 초등학교 교가 느낌? 군가 느낌이라고 할까? 뭔가 정이 안 가는 가사였다. 


나는 그냥 원래 인터내셔널가는 이런 줄 알고 넘어갔다. 


최근 갑자기 인터내셔널가가 생각났다. 유튜브에 검색해 보니 다양한 나라의 인터내셔널가가 번역돼 있었다. 그러다 인터내셔널가의 '본가'라고 할 수 있는(원래는 프랑스 파리 코뮌이 원조지만) 소련의 1978년 당대회 당시 부른 인터내셔널가가 있다. 그걸 번역한 영상이 있었다. 


===

일어나라, 저주받은 낙인이 찍힌, 전 세계의 굶주린 이들과 노예들이여

격분한 우리의 정신이 끓어올라 생사를 건 투쟁으로 인도할 각오가 되었노라

전 세계의 강압을 우리는 파괴하리라.

그 후에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리라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 세상 전부가 되리라

이는 우리 최후의 그리고 결정적인 쟁투이니

인터내셔널과 함께 인류는 일어나리라

===


한국어 인터내셔널가와 소련 인터내셔널가는 비슷한 것 같지만 내용이 참 다르다. 


먼저 한국어 인터내셔널가는 '노동자'라는 단어로 '우리'의 범주를 한정해 버렸다.  반면 소련 인터내셔널가는 '저주 받은 낙인이 찍힌 전 세계의 모든 굶주린 이들과 노예들'로 최대한 폭을 확장했다.


한국어 인터내셔널가는 '세계'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등장하지만 그건 전 세계를 의미하기 보다는 한국 안에서의 새 세계를 만든다는 개념에 가깝다. 하지만 소련 인터내셔널가는 '전 세계·인류'를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어느 가사가 인터내셔널가의 정신에 맞다고 보는가? 나는 후자가 맞다고 본다. 


또한 소련의 인터내셔널가에는 명문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 세상 전부가 되리라'. 굶주린 노예 상태인 민중은 하루살이 피지배층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이 일어나서 세상을 뒤집으면 세상 전체가 민중의 것이 된다는 뜻이다. 


이 세상 모든 운동가들은 이 긴 설명을 어떻게 쉽게 알기 쉽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리한 것은 찾기 쉽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 세상 전부가 되리라


번역이 어렵게 됐고, 이 가사대로 부를 순 없지만, 소련의 인터내셔널가는 한국어 인터내셔널가와 달리 기억에 바로 남았다. 


내가 운동권 인사를 많이 보진 못했지만, 운동권 사람들은 운동권만 보면서 투쟁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쉽고 편하고 접점이 생기도록 하는 노력보다는 '이만하면 알아듣겠지' 싶은 선전과 구호가 많았다. 물론 옆에 있는 운동권이야 바로 알아듣겠지만 대중들은 '아니 도대체 같은 한국말인데 저쪽 말은 왜 저렇게 이상하고 어색하지?' 하는 느낌이 끊임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 당 대회 모습도 잘 살펴보면 보면 젊은 사람들도 많고, 옷차림도 각양각색이다. 물론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앞 줄에 양복입은 사람 몇몇과 군복 입은 몇몇이겠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다는 시늉이라도 보이려 한 듯 하다. 우리가 생각한 사회주의 국가(북한, 중국)의 국가행사 때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튼 운동권의 시대는 막이 내렸다고 하지만, 운동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쉽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노력 또한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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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모니 2017.08.01 1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국공산당이 민생당 사건으로 만주 한국인 수만명 도살하고 쏘련공산당이 고려인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면서 수십만 도살한게 일제 군함도 만행보다 더 야만적이지만 그냥 잊고 삽시다. 공산당 하면 우리의 친구 아니오??

    • 임종금 JKL 2017.08.01 15: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뿐입니까? 자유시 참변으로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죽었고, 상처를 입고 갈라졌습니까? 게다가 민생단 사건 말고도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 민족갈등으로 참사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런 문제는 제가 따로 또 다루겠습니다.

      헌데 그런 것을 다 쳐도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반에 반도 못 미칠 뿐더러, 어쨌든 일제에 맞선다는 공동목표를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게 훨씬 많습니다.

나는 1988년 초등학교에 갔고, 200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갔다. 

전교조는 1989년 불법화 됐으며, 1999년 합법화됐다. 나는 학창시절 대부분 전교조가 불법이던 시절을 관통했다. 


따라서 전교조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 어느 교사도 '내가 전교조'라고 말하는 교사는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전교조 교사는 아무래도 표가 났다. 


기억1


1994년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사회 선생님이 운영하는 역사 동아리에 들어갔다. 1994년 4월 말쯤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두꺼운 사진책 하나를 들고 오셨다. 더러는 흑백사진도 있었고, 더러는 컬러사진도 있는 책이었다. 끔찍한 시신 모습이 한 쪽에 하나씩 실려 있었다. 시신 중에 형체가 온전한 것은 소수였고, 나머지는 도대체 몸 어디가 어딘지 알아보기 힘든 시신이 많았다. 헌데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시골에서 개나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장면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 사진으로 본 시신 사진은 의외로 무섭지 않았다. 


다만 도대체 이게 뭘까 싶었다. 사회 선생님은 '이게 바로 광주에서 전두환에게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시사 잡지(신동아)를 계속 봐왔기 때문에 바로 '아하' 싶었다.


당시에는 사교육이 없었고 사회시험, 특히 중학교 1학년 과정에는 세계사가 많았다. 세계사는 범위도 넓었고, 외울 게 많았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면 나를 포함해 한 반에 80점 넘는 사람이 서너 명에 불과했다. 반 평균이 40~50점 정도 됐을 거다. 이 선생님은 점수 낮은 친구들을 체벌했다. 물론 아주 심하게 체벌하지는 않았다. 이어 80점 넘는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각자 3대씩 맞았다. 아니 왜? 


"니들은 친구들을 좀 가르치고 물어보면 얘기도 해주고 그랬어야지. 니들만 점수 잘 받으면 그만이냐?"


내 평생 점수 높게 받았다고 맞아 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기억2. 


1997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모교는 울산시내에서 학성고-울산고 다음으로 넘버 3~4를 치열하게 다투던 중이었다. 서울까지 포함해서 전국 최초로 수능모의고사 만점이 나오고 지방에서 서울대에 거의 100명 가까이 보내는 학성고, 학성고에 아깝게 들어가지 못한 울산고 학생들은 감히 상대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그 다음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신입생이 되자마자 바로 밤 10시 혹은 10시 30분까지 야간강제학습을 했다. 단체기합도 많이 받았다. 선생들한테 많이 맞았다. 내 평생 가장 많이 맞아본 시기였다. 


1997년 겨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당선된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교장 정년을 대폭 줄여 버렸다. 65세에서 62세 정도로 줄여 버린 것으로 기억한다. 1998년 여름 우리 학교 교장도 졸지에 백수가 되고, 대신 비교적 젊은 교장이 승진했다. 


이 교장은 앞선 교장과는 달랐다. 만약 교내에서 쓰레기를 보면 앞선 교장은 "어이, 이것 좀 주워라"고 시킬 사람이었다. 한데 새 교장은 학생이 있어도 자기가 직접 쓰레기를 줍고 다녔다. 학교에 굴러다니던 쓰레기가 줄어들었다. 교장이 하도 열심히 줍고 다녀서 그랬는지 아니면 교장이 줍고 다니니 학생들이 덜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교내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는 줄었다. 2학년이 됐는데 야간강제학습이 되레 줄어 밤 9시 30분에 마쳤다. 체벌과 단체기합이 사라졌다. 고2~고3때 다 합쳐도 5대도 안 맞았던 것 같다. 


우리 반에 공부를 제법 했지만 미용사가 꿈인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서 미용사 자격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만화에 환장한 친구들이 있었다. 동아리를 만들고 예체능 계열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학교 복도에 신문 가판대가 생겼고, 비교적 중도적인 한국일보를 보도록 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학교는 감옥에서 생동감 있는 곳이 됐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적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울대-연고대 가는 친구들은 작년이나 올해나 몇 명 뿐이었다. 이사장은 서울대-연고대 카운터가 중요할 따름이었다. 


전교조 느낌의 선생들은 사회/국어/과학계열에 많았다. 박사학위를 가진 국어 선생님은 그 유명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려줬다. 중국음식 먹고 독립선언서 지들끼리 낭독하고 일제에 자수해서 아무 저항도 없이 끌려갔다. 보다 못한 한용운이 부칙 3조를 넣어서 그나마 저항의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을 나는 1998년에 알았다. 


사회 선생님은 예시를 주면서 시민단체 발족 선언문을 써보라고 하기도 했다. 박정희 경제성장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배웠다. 1998년 당시 중국이 얼마나 무섭게 성장할 것인지 얘기해줬다. 중국이 일본이나 러시아 보다 더 세질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학생들은 믿지 않았다.


그렇게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전교조는 합법화 됐지만, 어느 선생님도 '내가 전교조 교사요'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저 파편적인 기억으로 '저 선생님이 전교조였을거다' 짐작만 할 따름이다. 


내가 짐작한 전교조 교사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철학적이거나 어려운 질문을 자주 던진다. 예를 들어 왜 지금 우리가 6공화국이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무슨 뜻인데? 국가가 잘 사는 것과 국민이 잘 사는 것이 같은 것인가? 

2. 아이들을 덜 때리거나 거의 안 때린다. 

3. 동아리나 특별활동에 성의를 기울인다. 당시 특활시간은 그냥 잠자는 시간이거나 그저 시간 떼우고 마는 시간이다. 당시 대학은 무조건 수능 점수로만 결정되던 시대였다. 그걸 열심히 한다고 한 들 학생이나 교사나 아무런 이득이 없었지만 일부 선생님들은 열심히 했다. 

4. 시사적인 이슈에 대해 민감하다. 

5. 내신이나 수능과 관계없는 자료를 인쇄해서 읽어보라고 나눠주기도 했다. 

6. 학생들의 개성을 다소 이해해준다. 그래도 나름 중위권 이상 인문계 학교에서 미용사 시험을 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7. 아는 게 참 많고 당시 내가 들어도 논리가 정연했다. 그냥 무조건 이게 옳다고 하는 건 별로 없었다. 


어쨌든 내가 학창시절 '비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전교조 혹은 전교조 비스무리한 선생은 이게 전부다.  


참고로 1989년 당시 문교부에서 학교와 학부모에 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다. 위의 내가 규정한 특성과 얼마나 비슷한지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신문반, 민속반 등의 특활반을 이끄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탈춤, 민요, 노래,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

-자기 자리 청소 잘 하는 교사

-학부모 상담을 자주 하는 교사

-사고 친 학생을 정학이나 퇴학 등 징계를 반대하는 교사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보는 교사




기억3. 


그러다 사회 나갔다. 사실 공식적인 전교조 선생은 사회에서야 만나게 됐다. 


2006년 내가 26살 때였다. 당시 '공모제 교장'이라는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학교장이 그냥 승진해서 교육감이 인사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 자격요건을 갖추면 학교운영위에서 심사해서 교장을 선정하는 제도였다. 당시 경남 전교조 1세대인 이영주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알게 됐다. 이영주 선생은 2003년 간선제로 치뤄진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성향 고영진 교육감에게 아깝게 패할 정도로 거물이었다. 나는 당시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장이 운동권 출신이라 이영주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영주 선생은 공모제 교장을 통해 교육개혁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전교조 교사가 만든 경영계획서는 너무나 딱딱해 학교운영위원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마침 우리 사장이 '임 주임이라고 우리 직원이 있는데 참 글을 잘 쓴다'고 침을 튀겨가며 자랑을 한 것 같다. 그래서 학교경영계획서를 수정하는 일을 맡게 됐다. 중학생이 봐도 이해하게 쉽게 재구성 해 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쨌든 이영주 선생은 남해 설천중학교 공모 교장으로 선임됐고, 공모 교장 4년 동안 참 잘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추억이다. 냉정하게 되돌아 봐도 나쁜 기억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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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6~7일에 걸쳐 강릉, 삼척 지역에 산불이 크게 났다. 그 결과 200헥타르 남짓한 산림이 탔다고 한다. 톱 뉴스에서 참 오랜만에 산불 뉴스를 보는 것 같다. 그럼 우리나라 산불 중 끝판왕은 언제일까? 내 기억으로는 톱 3 산불은 다음과 같다.


3위. 2005년 양양 낙산사 산불: 973헥타르 피해. 등산객실화로 산불. 낙산사 소실.

2위. 1996년 고성 산불: 3834헥타르 피해. 인명피해 없음. 군부대 실화로 산불.


하지만 앞선 두 대형 산불을 씹어먹고도 남을 초대형 산불이 있었으니. 


바로 2000년 동해안 산불. 2000년 4월 7일부터 15일까지 무려 8박 9일 동안 산불로 산림 2만 3700헥타르가 잿더미가 됐다. 1헥타르가 3000평이니, 평수로 따지면 7169만 2500평이 불에 탄 셈이다. 참고로 여의도 면적이 87만 평 정도라고 하니 서울 여의도 면적 100개 가까이가 불에 탔다고 보면 된다. 


이 산불은 시골에서 쓰레기 소각을 하다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4월 초순에 초속 26미터가 넘는 강풍을 타고 엄청나게 빠르게 산불이 확산됐다. 무려 12만 5500명이 동원됐으니 당시 강원도 군부대에 근무했던 분들은 이 산불이 기억날 수도 있겠다. 



산불은 고성에서 발화해 삼척, 동해, 강릉, 경북 울진까지 진출했다. 정말 아슬아슬 했던 것이 울진원전 코앞에까지 산불이 덮쳤는데, 필사적으로 산불을 막았다. 만약 울진 원전에 산불이 덮쳐 전원공급장치가 고장나면, 냉각펌프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그럼 일본 후쿠시마 원전처럼 끝장나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아찔한 일이다.


이 산불 이후로 시골에서 논두렁, 밭두렁, 쓰레기 태우기를 금하기 시작했으며, 산불감시원이 생겨난 것으로 기억한다.

울진 원전 코앞에서 멈춘 동해안 대산불.



논문을 살펴보니 산불 관련 논문이 제법 있었다.


논문 중 "역사문헌 고찰을 통한 조선시대 산불특성 분석"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이것을 살펴보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산불 양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대형산불이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봄철이 73%였으며, 동해안 지역이 56%로 현대와 별 차이가 없다. 산불이 극심할 경우 관리를 유배시키거나 심지어 목을 베고 효수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원칙이 지금까지 이어졌으면 고성군수는 여러 번 '진짜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난개발 때문에 산림이 많이 훼손되지만 역설적으로 산불 진압에는 난개발로 만들어진 도로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진화 기술은 그때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헬기를 동원해 물 붓고,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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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1년이 다 돼 간다. 아버지는 전립선암과 그로 인한 합병증과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질병이 바로 암이다. 뇌혈관질환, 심혈관질환 이런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냥 암이 압도적이다. 암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미래 의료기술의 핵심이다. 오죽하면 대형병원 마다 암센터를 따로 두겠는가?


문득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암이 잘 생기는 지역은 어디고, 가장 암으로부터 건강한 지역이 어디일까? 이런 의문이 생겼다. 국립암센터에 문의해서 통계를 구해봤다. 물론 더 디테일한 통계는 아는 국회의원실에 문의해놨으므로 나중에 따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2009년~2013년까지 4년 간 발생한 암환자 123만 1082명과 거주 지역(시군구)로 나눈 것이다. 그 결과 10만 명당 312.0명(전국 평균)이 암에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312명 보다 극단적으로 높은 곳(340명 이상)과 낮은 곳(280명 이하)를 정리해봤다. 





<암 발병률이 높은 지역 2009년~2013년 합산 평균>

서울 용산구 340.6

서울 서초구 351.5 (소위 강남 3구 모두 330명을 상회하는 높은 암 발병률을 나타냈다)

부산 강서구 346.1

광주 남구 341.1

대전 서구 340.3

전남 목포 341.9

전남 여수 342.2

전남 순천 359.1

전남 광양 348.7

전남 보성 345.8

전남 장흥 348.5

전남 완도 345.3

경북 포항 347.5

경북 영덕 355.5

경북 울릉 379.7


이상이다. 경남에서 가장 높은 곳은 통영 (337.6명)이다. 


먼저 서울에서 소득이 비교적 높은 지역이 암 발병률이 높다. 스트레스 때문일까? 교통으로 인한 환경오염? 아니면 돈이 많기 때문에 암 검진을 너무 자주 하기 때문에 암 진단 받을 확률이 높은 곳인가? 그거는 잘 모르겠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전남과 경북지역이다. 100%해안가다. 주 산업이 어업인 곳이다.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곳은 흔히 여수순천광양이라고 하는 전남 동부지역 산업단지다. 


왜 과연 이곳의 암 발병률이 높은 것일까? 경남에도 어업이 주 수입원인 통영이 가장 높았다. 


이 통계는 단순한 한 해 통계가 아니다. 4년 간 누적통계라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다. 또 시골에도 암 검진을 상당히 자주 한다. 농어민을 대상으로 각종 의료지원이 많고, 또 행정에서 시키면 잘 따르는 시골 어르신들의 습성상 시골도 암 검진율이 높은 편이다.


어쨌든 과연 어업과 암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반대로 암 발생률이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일까? 암 발병률 10만 명당 280명 이하(전국 평균 312명) 지역을 골라봤다. 


경북 영주 278.3

전북 장수 275.5

충북 제천 278.4

강원 평창 260.6

강원 동해 268.1

강원 원주 276.4

경기 포천 266.7


강원 동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내륙 시골지역이다. 

같은 시골이라도 바닷가 어촌과 내륙 산골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 원전 인근은 어떨까? 

부산 기장 337.2
경북 경주 297.4
울산 북구 323.2

경북 경주에서 원전 영향권에 있는 양남면, 양북면 인구를 합해도 1만 명도 안 된다. 따라서 여기서 갑상선 암 발병률이 높아도 전체 경주 통계에는 별 영향을 못 미치는 듯 하다. 울산 북구는 월성 원전이 울산 북구 인근이라 영향권으로 설정했다. 이 시군구 통계만으로는 원전=암덩어리라는 등식이 성립되기 어려울 듯 하다. 읍면동 상세 통계가 필요할 듯 하다. 

아무튼 암 걱정없이 오래 살고 싶으면 해안가 보다는 내륙 산골이 더 나은 듯 하다. 상세한 자료가 도착하면 2차로 분석해 보겠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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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8 14:17

1919년 2.8독립선언서 기타/역사2017.02.08 14:17

1919년 2월 8일은 재일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날이다. 우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만 알고 있지 2.8독립선언서 내용은 잘 모르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 보다 훨씬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강경한 내용이다. 


2·8 독립선언서(현대식으로 번역)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획득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선언하노라.

 

4천 3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의 오래된 민족 중의 하나이다. 비록 한 때 중국의 역사를 섬긴 일은 있었으나, 이것은 양국왕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한 것이었고 조선은 항상 우리 민족의 조선이고 한 번도 통일 국가를 잃고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일이 없도다.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이와 잇몸의 관계에 있음을 자각함이라 하여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 서 승인하였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도 독립을 승인할뿐더러 이를 보전하기로 약속하였다. 한국은 그 뜻에 감사하여 단단히 마음먹고 제반개혁과 국력의 충실을 도모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녕을 위협하니 일본은 한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하였다.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보전은 실로 이 동맹의 취지인지라 한국은 더욱 그 호의에 감사하여 육해군의 원조는 불가능하였으나 주권의 위엄까지 희생하여 가능한 온갖 의무를 다하여서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의 양대 목적을 추구하였다. 급기야 전쟁이 종결되고 당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중재로 러일 간의 강화회담(포츠머스 조약)이 열리게 되니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의 참가를 불허하고 러일 양국 대표자 간에 임의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안건으로 올렸으며, 일본은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는 옛약속을 위반하여 미련하고 어리석은 당시 한국 황제와 그 정부를 위협하고 속여서 “한국의 충실함이 족히 독립을 득할 만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이를 일본의 보호국을 만들었다.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세계 여러나라들과 직접 교섭할 길을 차단하여 “상당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사법, 경찰권을 빼앗았고, 다시 “징병령 실시까지라”는 조건으로 군대를 해산하며 민간의 무기를 압수하고 일본군대와 헌병경찰을 각지에 두루 배치하며 심지어 황궁의 경비까지 일본경찰을 사용하고 이렇게 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전혀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 후에, 다소 명철하다 하는 한국 황제를 쫓아내고 황태자를 옹립하고 일본의 주구로 소위 합병내각을 조직하여 비밀과 무력에 내부에서 합병조약을 체결하니 이에 우리 민족은 건국 이래 반만년에 자기를 지도하고 원조하노라 하는 우방의 군국적 야심에 희생되었도다.

 

실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행위는 사기와 폭력에서 난 것이니 실상 이렇게 위대한 사기의 성공은 세계흥망사에 특필할 인류의 대욕치욕이라 할 것이다.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에 황제와 적신(賊臣) 아닌 몇몇 대신들은 모든 반항수단을 다하였고 발표 후에도 전 국민은 맨몸으로 가능한 온갖 반항을 다였으며 사법, 경찰권을 빼앗길 때도 군대해산 시에도 그러하였고 합병을 당해서는 수중에 쇠붙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온갖 반항운동을 다하다가 정예한 일본무기에 희생이 된 자가 부지기수다. 그 후로 15년 독립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희생된 자 수십만이며 참혹한 헌병정치 아래에서 손발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면서도 일찍이 독립운동이 끊긴 적이 없나니 이로 권하여도 한일합병이 조선민족의 의사가 아님을 알지어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 아래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때에 당연히 이를 바로잡기를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오늘날 세계 개조의 주역이 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지난 날 자기들이 솔선하여 승인한 잘못이 있는 까닭으로, 이 때에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또 합병 이래 일본 조선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 시의 선언에 반하여 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계속 사용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종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적지 않이 구속하며 행정, 사법, 경찰 등 제기관이 조선민족의 인권을 침해하였다.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과 일본인 간의 우열의 차별을 말하며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인에 비하여 열등한 교육을 실시하여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인의 노예로 살게 할뿐 아니라 역사를 개조하여 우리 민족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업신여겨 소수의 사람 이외는 정부의 여러 기관과 교통, 통신, 군사시설 등 모든 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을 사용하여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생활에 지능과 경험을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니 우리는 결코 이러한 무력과 억압으로 제멋대로 처리하는 잘못된 불평등한 정치 하에서 생존과 발전을 누리기 불가능하다. 그 뿐 아니라 원래 인구가 넘치는 조선에 무제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니 대대로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해외에 유리함을 면치 못하여 국가의 모든 기관은 물론이고 사설의 모든 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채용하여 한편 조선인으로 하여금 직업을 잃어버리게 하며, 한편으로 조선인의 부를 일본으로 유출케 하고 상공업에도 일본인에게만 특수한 편익을 부여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산업적 발전과 부흥의 기회를 상실케 하였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서로 배치되며 항상 그 해를 보는 자는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생존할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마지막으로 동양 평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강대국이던 러시아는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를 건설하려던 중이며 중국도 그러하며 더욱이 이후 국제연맹이 실현되어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다. 그러할진대 한국을 합병한 최대이유가 소멸되었을 뿐더러 만일 조선민족이 무수한 혁명과 민란을 일으킨다면 일본에게 합병된 한국은 동양평화를 뒤흔들 불행의 근원이 될 것이다. 우리 미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이 어찌 동양평화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다.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우리 민족은 유구하게 고상한 문화를 지녀왔으며, 반만년 동안 국가생활의 경험을 가진 민족이다.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 아래에서 여러 해독과 불행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새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 줄을 믿는 바이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이룩할 것을 선언하노라.

 

 

<결의문>

 

1. 본단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뒤흔들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이루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강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위의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여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 해당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강화회의에 파견함. 위 위원은 앞서 파견된 우리 민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할 때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함. 

 

1919년 2월 8일

재일본 동경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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