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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 한국사 최악의 인물은 바로 이완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완용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를 알아간다는 자체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살펴보면 몇 가지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이완용도 자기 나름의 ‘소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소신은 우리가 아는 좋은 의미는 아니다. 그 소신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살펴보자. 

이완용의 첫 번째 소신은 ‘실리추구를 위한 변신’이다. 이완용은 철저하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변신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위정척사파에 가까웠다. 개화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서양 문물을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어 개화파들과 마찬가지로 물 건너 유학도 다녀오면서 개화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이후 아관파천을 통해 친러세력이 되었고, 다시 친미세력이 되었다가, 친일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수많은 변신을 통해 자기에게 철저히 이익이 되도록 했다. 

문제는 ‘이익이 되면 누구와 손을 잡아도 그만’이라는 사고이다. 그 사고가 바로 매국의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이완용은 경성일보에 시위를 하는 군중들에게 고하는 글을 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깨달아라. 제군, 미친 이가 아니라면 깨어나라.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제군은 왜 죽음을 스스로 택해서 호생(好生)의 덕혜에 복종하지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일본이 지배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괜히 자존심 내세우다가 호랑이 털을 건드려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명을 버리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이다. 요샛말로 하면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왜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냐?’는 것이다. 이완용의 이런 논리는 현재에도 잘 통용되는 논리이다. 

이완용의 두 번째 소신은 ‘질서와 평화 중시’다. 무언가 이완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그는 이 단어들을 잘 사용하였고, 실제로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제는 이 ‘질서와 평화’라는 단어 사이에 ‘강자와 시류에 대한 순종’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과 세계의 대세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이 일본과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대세이며, 동양은 일본의 선의를 받아서 함께 힘을 합쳐야만 서양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서양의 침략이라는 폭력을 상쇄하고 ‘평화’를 낳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완용에게 독립운동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질서와 평화를 어지럽히는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희생과 일제의 구조적인 폭력과 착취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완용이 그것에 대해 침묵한 이유는 바로 세 번째 소신 때문이다. 바로 ‘경쟁’이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독립협회 회원이었는데, 독립신문에 수차례 경쟁을 강조하는 글을 싣는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쟁이란 ‘원칙과 질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따위는 접어두고, 무조건 상대를 눌러 이기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폴란드와 미국의 예를 들면서 ‘폴란드는 경쟁에서 뒤처져서 망했고, 미국은 승리했다. 좌우지간 우리가 미국처럼 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제의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경쟁에서 패배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은 시류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이완용의 논리를 잘 살펴보면, 지금 우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들과 상통하는 점이 상당히 많다. 필자가 일전에 반일을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사관 논리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것을 언급하였다. 이완용 또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완용은 재론할 가치도 없는 최악의 인물이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느새 이완용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완용이 살던 구한말과 21세기의 시대상황은 전혀 다르다. 논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덮어놓고 이완용과 똑같다고 누군가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완용이 내세운 논리들이 그 시대에는 매국으로 이어졌으나,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그 논리들이 무엇으로 이어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완용의 논리들이 이 시대에 매국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극단적인 물질 자본주의, 이기주의, 사회적 모순과 결합하여 그 논리들이 비인간적 논리로 귀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린 과연 이완용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12월 30일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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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다. 어제의 모습이 모여 오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오늘을 보는 거울’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대하거나, 혹은 ‘그때 그 사람이 다른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식의 공상에 머물곤 한다. 

그래서 이번 연재부터는 역사를 통해 오늘의 시사점을 살펴볼까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직면한 모습은 바로 20세기의 격동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지난 20세기를 살펴보면, 오늘의 우리 모습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맞이한 20세기는 매우 불안정하고 요동치는 상황이었다. 개항 이후 국제질서에 편입되면서, 내부적으로는 위정척사 세력과 개화 세력, 민중 세력이 서로 대립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강력한 개화정책을 펴기 위한 갑신정변도 있었고, 개화정책을 되물리기 위한 임오군란도 있었고, 동학농민항쟁과 같은 민중들의 거대한 저항도 있었다. 이것들이 되풀이되면서 조선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것이 일단 정리된 것이 1894년 갑오개혁이었다. 갑오개혁과 일본의 본격적인 진출은 조선이 일본의 의도대로 나라를 개혁하고, 일본의 대륙전진기지가 되는 수순에 이르렀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는 일본을 견제하였고, 일본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서 당시 집권세력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였고, 당황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불안을 느낀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였고, 갑오개혁을 이끈 친일개화파 정권을 붕괴시켰다. 다시금 역사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한반도에는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 틈을 타 고종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 대한제국을 세움으로써 운신의 폭을 마련하였다. 고종 황제가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20세기는 시작되었다. 

 일단 키를 잡은 고종 황제는 두 가지 선택을 했다. 첫 번째 선택은 서양 문물의 대폭 수용이었다. 특히 전기와 전구, 전화기, 전차, 기차 등등 서양의 문물을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들여왔다. 당시 전기와 전차는 아시아에서는 일본도 들여오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학교를 짓고, 공장을 짓고, 서양 무기를 수입하는 등 고종 황제의 지출은 끝이 없었다. 고종 황제는 조급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본과 러시아의 대결 국면에서 최대한 빨리 근대화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종 황제는 엄청난 비용을 들인 것이다. 

다음으로 고종 황제가 선택한 것은 민권운동의 탄압이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처음에는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만민공동회가 의회 설립을 요구하면서부터 고종 황제는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는 철저히 봉건적 전제군주를 꿈꾼 사람이었다. 아마 그는 태종 이방원과 같이 강력한 왕권으로 강력한 개혁을 꿈꿨는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의회 설립이니, 민권운동은 바로 왕권을 내놓으라는 요구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판단이 되자 그는 이들 운동을 탄압하였다. 

 고종 황제의 두 가지 선택을 보면, 당시 고종 황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어물쩍거리지 않고 서양식 근대문물을 최대한 많이, 빨리 수입하면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는 단순히 서양 문물을 수입한다고 해서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근대적인 정치제도와 사회제도를 지향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근대화의 한 축이 이미 허물어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고종 황제는 봉건군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고종 황제의 판단착오를 오늘날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환경 관련 이벤트 하나 열고는 ‘생태도시’를 꿈꾸는가 하면, 로봇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다가 갑자기 로봇랜드가 들어서자 ‘첨단 로봇도시’라는 브랜드를 내세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로봇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과 인식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축제장을 유치하고, 대학에 몇몇 학과를 설치한다고 해서 그 도시가 로봇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가, 행사 하나 유치하거나 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화도시’가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정치권은 고종 황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지역을 발전시키려면 큰 밑그림을 그리고 이를 위한 연구와 지원이 있어야 하며, 시민들의 의식 향상이 함께 이뤄지고, 그와 관련된 행사나 시설이 들어서면서 지역은 그 방향으로 차근차근 발전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하나를 유치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행사가 끝난 행사장은 버려질 것이며, 큰돈을 들여서 만든 시설도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는 그 기능을 잃을 것이다. 돈만 날린 채.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10월 14일 기고한 글입니다. 원제는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었습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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