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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07 내가 겪은 전교조 교사에 대한 기억

나는 1988년 초등학교에 갔고, 200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갔다. 

전교조는 1989년 불법화 됐으며, 1999년 합법화됐다. 나는 학창시절 대부분 전교조가 불법이던 시절을 관통했다. 


따라서 전교조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 어느 교사도 '내가 전교조'라고 말하는 교사는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전교조 교사는 아무래도 표가 났다. 


기억1


1994년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사회 선생님이 운영하는 역사 동아리에 들어갔다. 1994년 4월 말쯤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두꺼운 사진책 하나를 들고 오셨다. 더러는 흑백사진도 있었고, 더러는 컬러사진도 있는 책이었다. 끔찍한 시신 모습이 한 쪽에 하나씩 실려 있었다. 시신 중에 형체가 온전한 것은 소수였고, 나머지는 도대체 몸 어디가 어딘지 알아보기 힘든 시신이 많았다. 헌데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시골에서 개나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장면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 사진으로 본 시신 사진은 의외로 무섭지 않았다. 


다만 도대체 이게 뭘까 싶었다. 사회 선생님은 '이게 바로 광주에서 전두환에게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시사 잡지(신동아)를 계속 봐왔기 때문에 바로 '아하' 싶었다.


당시에는 사교육이 없었고 사회시험, 특히 중학교 1학년 과정에는 세계사가 많았다. 세계사는 범위도 넓었고, 외울 게 많았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면 나를 포함해 한 반에 80점 넘는 사람이 서너 명에 불과했다. 반 평균이 40~50점 정도 됐을 거다. 이 선생님은 점수 낮은 친구들을 체벌했다. 물론 아주 심하게 체벌하지는 않았다. 이어 80점 넘는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각자 3대씩 맞았다. 아니 왜? 


"니들은 친구들을 좀 가르치고 물어보면 얘기도 해주고 그랬어야지. 니들만 점수 잘 받으면 그만이냐?"


내 평생 점수 높게 받았다고 맞아 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기억2. 


1997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모교는 울산시내에서 학성고-울산고 다음으로 넘버 3~4를 치열하게 다투던 중이었다. 서울까지 포함해서 전국 최초로 수능모의고사 만점이 나오고 지방에서 서울대에 거의 100명 가까이 보내는 학성고, 학성고에 아깝게 들어가지 못한 울산고 학생들은 감히 상대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그 다음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신입생이 되자마자 바로 밤 10시 혹은 10시 30분까지 야간강제학습을 했다. 단체기합도 많이 받았다. 선생들한테 많이 맞았다. 내 평생 가장 많이 맞아본 시기였다. 


1997년 겨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당선된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교장 정년을 대폭 줄여 버렸다. 65세에서 62세 정도로 줄여 버린 것으로 기억한다. 1998년 여름 우리 학교 교장도 졸지에 백수가 되고, 대신 비교적 젊은 교장이 승진했다. 


이 교장은 앞선 교장과는 달랐다. 만약 교내에서 쓰레기를 보면 앞선 교장은 "어이, 이것 좀 주워라"고 시킬 사람이었다. 한데 새 교장은 학생이 있어도 자기가 직접 쓰레기를 줍고 다녔다. 학교에 굴러다니던 쓰레기가 줄어들었다. 교장이 하도 열심히 줍고 다녀서 그랬는지 아니면 교장이 줍고 다니니 학생들이 덜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교내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는 줄었다. 2학년이 됐는데 야간강제학습이 되레 줄어 밤 9시 30분에 마쳤다. 체벌과 단체기합이 사라졌다. 고2~고3때 다 합쳐도 5대도 안 맞았던 것 같다. 


우리 반에 공부를 제법 했지만 미용사가 꿈인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서 미용사 자격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만화에 환장한 친구들이 있었다. 동아리를 만들고 예체능 계열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학교 복도에 신문 가판대가 생겼고, 비교적 중도적인 한국일보를 보도록 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학교는 감옥에서 생동감 있는 곳이 됐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적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울대-연고대 가는 친구들은 작년이나 올해나 몇 명 뿐이었다. 이사장은 서울대-연고대 카운터가 중요할 따름이었다. 


전교조 느낌의 선생들은 사회/국어/과학계열에 많았다. 박사학위를 가진 국어 선생님은 그 유명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려줬다. 중국음식 먹고 독립선언서 지들끼리 낭독하고 일제에 자수해서 아무 저항도 없이 끌려갔다. 보다 못한 한용운이 부칙 3조를 넣어서 그나마 저항의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을 나는 1998년에 알았다. 


사회 선생님은 예시를 주면서 시민단체 발족 선언문을 써보라고 하기도 했다. 박정희 경제성장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배웠다. 1998년 당시 중국이 얼마나 무섭게 성장할 것인지 얘기해줬다. 중국이 일본이나 러시아 보다 더 세질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학생들은 믿지 않았다.


그렇게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전교조는 합법화 됐지만, 어느 선생님도 '내가 전교조 교사요'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저 파편적인 기억으로 '저 선생님이 전교조였을거다' 짐작만 할 따름이다. 


내가 짐작한 전교조 교사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철학적이거나 어려운 질문을 자주 던진다. 예를 들어 왜 지금 우리가 6공화국이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무슨 뜻인데? 국가가 잘 사는 것과 국민이 잘 사는 것이 같은 것인가? 

2. 아이들을 덜 때리거나 거의 안 때린다. 

3. 동아리나 특별활동에 성의를 기울인다. 당시 특활시간은 그냥 잠자는 시간이거나 그저 시간 떼우고 마는 시간이다. 당시 대학은 무조건 수능 점수로만 결정되던 시대였다. 그걸 열심히 한다고 한 들 학생이나 교사나 아무런 이득이 없었지만 일부 선생님들은 열심히 했다. 

4. 시사적인 이슈에 대해 민감하다. 

5. 내신이나 수능과 관계없는 자료를 인쇄해서 읽어보라고 나눠주기도 했다. 

6. 학생들의 개성을 다소 이해해준다. 그래도 나름 중위권 이상 인문계 학교에서 미용사 시험을 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7. 아는 게 참 많고 당시 내가 들어도 논리가 정연했다. 그냥 무조건 이게 옳다고 하는 건 별로 없었다. 


어쨌든 내가 학창시절 '비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전교조 혹은 전교조 비스무리한 선생은 이게 전부다.  


참고로 1989년 당시 문교부에서 학교와 학부모에 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다. 위의 내가 규정한 특성과 얼마나 비슷한지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신문반, 민속반 등의 특활반을 이끄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탈춤, 민요, 노래,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

-자기 자리 청소 잘 하는 교사

-학부모 상담을 자주 하는 교사

-사고 친 학생을 정학이나 퇴학 등 징계를 반대하는 교사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보는 교사




기억3. 


그러다 사회 나갔다. 사실 공식적인 전교조 선생은 사회에서야 만나게 됐다. 


2006년 내가 26살 때였다. 당시 '공모제 교장'이라는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학교장이 그냥 승진해서 교육감이 인사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 자격요건을 갖추면 학교운영위에서 심사해서 교장을 선정하는 제도였다. 당시 경남 전교조 1세대인 이영주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알게 됐다. 이영주 선생은 2003년 간선제로 치뤄진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성향 고영진 교육감에게 아깝게 패할 정도로 거물이었다. 나는 당시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장이 운동권 출신이라 이영주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영주 선생은 공모제 교장을 통해 교육개혁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전교조 교사가 만든 경영계획서는 너무나 딱딱해 학교운영위원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마침 우리 사장이 '임 주임이라고 우리 직원이 있는데 참 글을 잘 쓴다'고 침을 튀겨가며 자랑을 한 것 같다. 그래서 학교경영계획서를 수정하는 일을 맡게 됐다. 중학생이 봐도 이해하게 쉽게 재구성 해 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쨌든 이영주 선생은 남해 설천중학교 공모 교장으로 선임됐고, 공모 교장 4년 동안 참 잘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추억이다. 냉정하게 되돌아 봐도 나쁜 기억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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