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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다. 어제의 모습이 모여 오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오늘을 보는 거울’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대하거나, 혹은 ‘그때 그 사람이 다른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식의 공상에 머물곤 한다. 

그래서 이번 연재부터는 역사를 통해 오늘의 시사점을 살펴볼까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직면한 모습은 바로 20세기의 격동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지난 20세기를 살펴보면, 오늘의 우리 모습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맞이한 20세기는 매우 불안정하고 요동치는 상황이었다. 개항 이후 국제질서에 편입되면서, 내부적으로는 위정척사 세력과 개화 세력, 민중 세력이 서로 대립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강력한 개화정책을 펴기 위한 갑신정변도 있었고, 개화정책을 되물리기 위한 임오군란도 있었고, 동학농민항쟁과 같은 민중들의 거대한 저항도 있었다. 이것들이 되풀이되면서 조선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것이 일단 정리된 것이 1894년 갑오개혁이었다. 갑오개혁과 일본의 본격적인 진출은 조선이 일본의 의도대로 나라를 개혁하고, 일본의 대륙전진기지가 되는 수순에 이르렀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는 일본을 견제하였고, 일본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서 당시 집권세력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였고, 당황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불안을 느낀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였고, 갑오개혁을 이끈 친일개화파 정권을 붕괴시켰다. 다시금 역사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한반도에는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 틈을 타 고종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 대한제국을 세움으로써 운신의 폭을 마련하였다. 고종 황제가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20세기는 시작되었다. 

 일단 키를 잡은 고종 황제는 두 가지 선택을 했다. 첫 번째 선택은 서양 문물의 대폭 수용이었다. 특히 전기와 전구, 전화기, 전차, 기차 등등 서양의 문물을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들여왔다. 당시 전기와 전차는 아시아에서는 일본도 들여오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학교를 짓고, 공장을 짓고, 서양 무기를 수입하는 등 고종 황제의 지출은 끝이 없었다. 고종 황제는 조급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본과 러시아의 대결 국면에서 최대한 빨리 근대화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종 황제는 엄청난 비용을 들인 것이다. 

다음으로 고종 황제가 선택한 것은 민권운동의 탄압이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처음에는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만민공동회가 의회 설립을 요구하면서부터 고종 황제는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는 철저히 봉건적 전제군주를 꿈꾼 사람이었다. 아마 그는 태종 이방원과 같이 강력한 왕권으로 강력한 개혁을 꿈꿨는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의회 설립이니, 민권운동은 바로 왕권을 내놓으라는 요구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판단이 되자 그는 이들 운동을 탄압하였다. 

 고종 황제의 두 가지 선택을 보면, 당시 고종 황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어물쩍거리지 않고 서양식 근대문물을 최대한 많이, 빨리 수입하면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는 단순히 서양 문물을 수입한다고 해서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근대적인 정치제도와 사회제도를 지향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근대화의 한 축이 이미 허물어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고종 황제는 봉건군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고종 황제의 판단착오를 오늘날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환경 관련 이벤트 하나 열고는 ‘생태도시’를 꿈꾸는가 하면, 로봇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다가 갑자기 로봇랜드가 들어서자 ‘첨단 로봇도시’라는 브랜드를 내세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로봇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과 인식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축제장을 유치하고, 대학에 몇몇 학과를 설치한다고 해서 그 도시가 로봇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가, 행사 하나 유치하거나 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화도시’가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정치권은 고종 황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지역을 발전시키려면 큰 밑그림을 그리고 이를 위한 연구와 지원이 있어야 하며, 시민들의 의식 향상이 함께 이뤄지고, 그와 관련된 행사나 시설이 들어서면서 지역은 그 방향으로 차근차근 발전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하나를 유치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행사가 끝난 행사장은 버려질 것이며, 큰돈을 들여서 만든 시설도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는 그 기능을 잃을 것이다. 돈만 날린 채.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10월 14일 기고한 글입니다. 원제는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었습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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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다 해안에서 지평선 너머를 본다면 아마 몇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높은 곳에서는 훨씬 멀리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 성인봉은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봉우리이다. 성인봉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100㎞가 넘게 떨어져 있는 독도를 훤히 볼 수 있다. 독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곳이 바로 울릉도이다. 

 이런 이유로 독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울릉도 주민이었고,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섬’이었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 되었고, 울릉도와 함께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울릉도에 딸린 독도. 이것은 곧 울릉도의 주인이 바로 독도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한다. 

울릉도는 512년 이사부에 의해 신라의 영토로 포함된다. 따라서 독도 또한 신라의 영토로 포함된다. 그리고 신라의 뒤를 이어 고려, 조선이 한반도와 울릉도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독도의 국적 또한 자연히 고려, 조선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모든 문제의 씨앗이 생기기 시작한다. 조선은 치밀한 관료국가였다. 이 관료제의 목적은 백성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이 기본이다. 백성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여야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정부의 입장에서 울릉도는 ‘불안한’ 지역이었다. 언제 폭풍우가 몰아닥쳐 백성들이 휩쓸릴지 모르며, 식량이 없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이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조선은 ‘공도(空島)정책’이라고 하여 섬을 비우는 정책을 쓰게 된다. 섬 주민들을 육지로 소환하여 육지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울릉도와 독도는 빈 섬이 되었다. 빈 섬인 울릉도와 독도에는 당연히 일본 어부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일본의 최대 논리인 ‘빈 섬을 우리가 먼저 차지한 것일 뿐’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용복은 친구 박어둔(朴於屯) 등과 함께 스스로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하는 관리를 칭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재확인하였다. 

당시 안용복은 중인 신분이었고, 친구 박어둔은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아주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다. 결국 나라가 할 일을 힘없는 백성들이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안용복은 함부로 관리를 칭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후 조선의 독도 영유권 재확인과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인정한 사례는 많이 있다. 그리고 구한말에는 고종 황제가 직접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한다는 근대적 칙령을 내려서 영유권 문제에 못을 박았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독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동해 한복판에 있는 독도는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또한 독도 주변 어장은 일본 어민들이 꿈에도 그리던 황금어장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 시마네현은 조례로 독도를 시마네현의 관할로 둔다고 1905년 선언했다. 이것은 몰상식적인 발상인데, 비유하자면 창원시장이 어떤 타국의 섬을 창원시의 관할로 넣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국가의 영토 문제에서는 고작 시 단위의 조례가 아니라, 대한제국처럼 황제의 칙령이 급에 맞는 것이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국’으로 급을 낮춰서 불렀다. 일본은 이제 일본국 본토와 일본의 식민국인 조선국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독도를 ‘조선국’의 관할에 포함시켰다. 당시 일본인들이 만든 대부분의 자료에서 독도는 조선국, 혹은 조선총독부 관할로 되어 있다. 해방 이후, 연합군은 1946년에 독도를 한국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또한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영토는 선언이나 문서로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독도를 드나들었고,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1954년에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고, 경상북도 경찰의 도움을 받아 의용수비대가 경비를 서게 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경찰청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경찰이 경비를 서는 이유는 외교적으로 ‘안정된 한국 영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독도에 군대가 무장을 하고 있으면 외교적으로 ‘분쟁지역 하 한국 영토’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독도의 역사에서 일본이 가질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게 유리한 자료들이 압도적이며, 제3자가 상식적으로도 판단해도 독도는 우리의 영토이다. 일본은 이곳을 어떻게 해서라도 분쟁지역으로 국제사회에 인식시키고, 국제사법재판소까지 끌고 가는 것이 목표다. 우리가 일본의 도발에 차분히 대응만 한다면 과거처럼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으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영유권 문제 말고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독도를 보는 우리의 태도이다.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일본이 도발하면 불같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장기를 태우고, 반일을 외치고, 손가락을 자르면서 극렬하게 항의한다. 그러나 반일을 외치는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사,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 등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이 모순 속에서 ‘독도에 해병대를 두어야 한다’는 외교적으로 위험한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도대체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필자는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다른 하나는 영웅주의적 시각이다. 안용복과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을 장군이라 부르면서, 그들의 업적을 찬란하게 묘사한 것이다. 주로 위인전이나 초등학생 역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들을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잘못하면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적 시각이다. 독도는 지배권력이 신경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의 가난한 민중들이 힘을 모아서 지켜낸 역사라는 것이다. 물론 안용복과 독도의용수비대는 중간 이하 계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나 대한제국, 우리 정부가 이들에게만 맡겨 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름대로 외교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 하나의 생각을 절대화하기 위한 수사법으로 느껴진다. 

이렇듯 독도는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의 많은 생각들이 쌓여 온 곳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습도 함께 볼 수 있는 참으로 독특한 소재가 되고 있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8년 10월 8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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