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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8 14:17

1919년 2.8독립선언서 기타/역사2017.02.08 14:17

1919년 2월 8일은 재일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날이다. 우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만 알고 있지 2.8독립선언서 내용은 잘 모르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 보다 훨씬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강경한 내용이다. 


2·8 독립선언서(현대식으로 번역)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획득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선언하노라.

 

4천 3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의 오래된 민족 중의 하나이다. 비록 한 때 중국의 역사를 섬긴 일은 있었으나, 이것은 양국왕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한 것이었고 조선은 항상 우리 민족의 조선이고 한 번도 통일 국가를 잃고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일이 없도다.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이와 잇몸의 관계에 있음을 자각함이라 하여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 서 승인하였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도 독립을 승인할뿐더러 이를 보전하기로 약속하였다. 한국은 그 뜻에 감사하여 단단히 마음먹고 제반개혁과 국력의 충실을 도모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녕을 위협하니 일본은 한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하였다.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보전은 실로 이 동맹의 취지인지라 한국은 더욱 그 호의에 감사하여 육해군의 원조는 불가능하였으나 주권의 위엄까지 희생하여 가능한 온갖 의무를 다하여서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의 양대 목적을 추구하였다. 급기야 전쟁이 종결되고 당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중재로 러일 간의 강화회담(포츠머스 조약)이 열리게 되니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의 참가를 불허하고 러일 양국 대표자 간에 임의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안건으로 올렸으며, 일본은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는 옛약속을 위반하여 미련하고 어리석은 당시 한국 황제와 그 정부를 위협하고 속여서 “한국의 충실함이 족히 독립을 득할 만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이를 일본의 보호국을 만들었다.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세계 여러나라들과 직접 교섭할 길을 차단하여 “상당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사법, 경찰권을 빼앗았고, 다시 “징병령 실시까지라”는 조건으로 군대를 해산하며 민간의 무기를 압수하고 일본군대와 헌병경찰을 각지에 두루 배치하며 심지어 황궁의 경비까지 일본경찰을 사용하고 이렇게 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전혀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 후에, 다소 명철하다 하는 한국 황제를 쫓아내고 황태자를 옹립하고 일본의 주구로 소위 합병내각을 조직하여 비밀과 무력에 내부에서 합병조약을 체결하니 이에 우리 민족은 건국 이래 반만년에 자기를 지도하고 원조하노라 하는 우방의 군국적 야심에 희생되었도다.

 

실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행위는 사기와 폭력에서 난 것이니 실상 이렇게 위대한 사기의 성공은 세계흥망사에 특필할 인류의 대욕치욕이라 할 것이다.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에 황제와 적신(賊臣) 아닌 몇몇 대신들은 모든 반항수단을 다하였고 발표 후에도 전 국민은 맨몸으로 가능한 온갖 반항을 다였으며 사법, 경찰권을 빼앗길 때도 군대해산 시에도 그러하였고 합병을 당해서는 수중에 쇠붙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온갖 반항운동을 다하다가 정예한 일본무기에 희생이 된 자가 부지기수다. 그 후로 15년 독립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희생된 자 수십만이며 참혹한 헌병정치 아래에서 손발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면서도 일찍이 독립운동이 끊긴 적이 없나니 이로 권하여도 한일합병이 조선민족의 의사가 아님을 알지어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 아래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때에 당연히 이를 바로잡기를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오늘날 세계 개조의 주역이 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지난 날 자기들이 솔선하여 승인한 잘못이 있는 까닭으로, 이 때에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또 합병 이래 일본 조선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 시의 선언에 반하여 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계속 사용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종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적지 않이 구속하며 행정, 사법, 경찰 등 제기관이 조선민족의 인권을 침해하였다.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과 일본인 간의 우열의 차별을 말하며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인에 비하여 열등한 교육을 실시하여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인의 노예로 살게 할뿐 아니라 역사를 개조하여 우리 민족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업신여겨 소수의 사람 이외는 정부의 여러 기관과 교통, 통신, 군사시설 등 모든 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을 사용하여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생활에 지능과 경험을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니 우리는 결코 이러한 무력과 억압으로 제멋대로 처리하는 잘못된 불평등한 정치 하에서 생존과 발전을 누리기 불가능하다. 그 뿐 아니라 원래 인구가 넘치는 조선에 무제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니 대대로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해외에 유리함을 면치 못하여 국가의 모든 기관은 물론이고 사설의 모든 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채용하여 한편 조선인으로 하여금 직업을 잃어버리게 하며, 한편으로 조선인의 부를 일본으로 유출케 하고 상공업에도 일본인에게만 특수한 편익을 부여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산업적 발전과 부흥의 기회를 상실케 하였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서로 배치되며 항상 그 해를 보는 자는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생존할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마지막으로 동양 평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강대국이던 러시아는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를 건설하려던 중이며 중국도 그러하며 더욱이 이후 국제연맹이 실현되어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다. 그러할진대 한국을 합병한 최대이유가 소멸되었을 뿐더러 만일 조선민족이 무수한 혁명과 민란을 일으킨다면 일본에게 합병된 한국은 동양평화를 뒤흔들 불행의 근원이 될 것이다. 우리 미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이 어찌 동양평화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다.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우리 민족은 유구하게 고상한 문화를 지녀왔으며, 반만년 동안 국가생활의 경험을 가진 민족이다.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 아래에서 여러 해독과 불행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새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 줄을 믿는 바이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이룩할 것을 선언하노라.

 

 

<결의문>

 

1. 본단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뒤흔들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이루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강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위의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여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 해당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강화회의에 파견함. 위 위원은 앞서 파견된 우리 민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할 때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함. 

 

1919년 2월 8일

재일본 동경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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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힘이 없는 세력이 있다. 반면에 힘이 있는 세력이 있다. 힘이 없는 세력들은 힘이 있는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힘을 모은다. 그것은 연대나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의 연대와 연합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을까? 우리 역사에서 적어도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연합은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나제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백제는 고구려에게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이 참수당했으며, 신라는 고구려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면서 신하의 나라로 자처했다. 압도적인 고구려의 국력 아래 나제동맹은 ‘고구려를 몰아내는 것’이 아닌, 그저 두 나라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나제동맹, 나당동맹은 일시적 연합일 뿐

이후 고구려의 국력이 잠시 퇴조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고,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어떤 분명한 비전이나 가치에 대한 공유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한 나제동맹은 그 한계가 분명했다. 적이 사라지자,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 멸망까지 두 나라는 근 100년이 넘도록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도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최후의 보루인 대야성마저 빼앗기자 다급해졌다.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 후방 공격을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곧바로 서로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서인과 남인의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두 세력은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연합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후 두 세력은 갈등하기 시작했고, 숙종 때는 환국정치를 통해 서로를 몰살시키기에 이른다. 

‘공동의 적’ 사라지면 또 다른 전쟁 시작 이렇게 공동의 적을 상정한 가운데 성사된 연합은 얕은 수준밖에 이르지 못한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후에는 서로 또 다른 전쟁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반면에 비전과 신념까지 공유하는 깊은 연대가 있다.

깊은 신념 공유하는 연대도 있어

대표적인 것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말 신흥무장세력과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 세력 간의 연합이다. 당시 고려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생겨난 권문세족은 고려를 좀먹고 있었고, 왜구·홍건적 등의 침공으로 국토는 피폐해졌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족들은 여전히 그 힘을 누리고 있었고, 개혁을 원하던 공민왕과 신돈을 제거했다. 당시 신진사대부의 힘만으로는 권문세족을 꺾을 수 없었다.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와 손을 잡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둘의 연합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연합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연합이었다. 그렇게 신진사대부와 이성계의 결합은 조선 왕조를 태동시켰다. 

위의 사례와는 달리 얕은 연합에서 깊은 연대로 변환한 사례가 있다. 바로 구한말 의병전쟁이다. 일제의 강점을 막기 위해 양반 위정척사파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민중들도 자체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 시대 내내 기득권과 피지배층으로 살아왔던 두 세력이 손을 잡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 두 세력의 연합은 문제가 많았다. 양반 의병장들은 민중 의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평민 출신 의병을 죽이기도 했다. 일제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일시적으로 서로를 인정해 주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두 세력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의병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1910년 이후에는 모두 공동운명체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두 세력은 만주와 연해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처음에 두 세력의 연합은 그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을 뿐이었으나, 민족해방의 신념을 공유하며, 오랜 시간 동안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깊은 동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깊은 연대가 꼭 좋은 역사적 사례만 낳은 것은 아니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90% 가까이 좌익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손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반공 이념과 좌익세력 척결이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이승만 정권을 탄생시켰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연대니 연합이니 하는 얘기가 자주 들려 온다. 과연 그것이 단순한 상황 타개를 위한 논리인지, 아니면 신념과 비전을 공유하고 먼 길을 함께 가자는 것인지 유권자들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념과 비전을 공유한 깊은 연대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우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3월 31일 자 기고글입니다. 원 제목은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18) 역사 속 연합과 연대" 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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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02 2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임종금 JKL 2014.08.03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죄송합니다. 급히 자료들을 백업한다고 글들을 올리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됐습니다. 저도 그걸 우려해 그제께부터 하루에 한 편 씩만을 올리고 있습니다. 유의하겠습니다.

필자는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서 중앙정부에 종속된 지방의 역사를 말한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이 중앙과 지방의 역사는 누가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중앙의 역사에 지방이 종속되는 현상은 안타깝지만 이는 국가 운영의 효율을 담보할 수 있기에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반론의 측면으로서 토호라는 집단에 대해 역사적으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토호라는 집단은 지역에서 군림해 온 ‘유지(有志) 집단’을 얘기한다. 중앙집권화가 이뤄진 이후부터 중앙정부는 지방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지역의 유지 집단을 달래거나 혹은 강압하여 반발하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유향소를 설치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수령과 유향소의 유지 세력들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 지역의 특수성과 자치성을 인정하는 대신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도 역시 인정한다. 이런 관계는 어느 정도 양측의 긴장 아래 수평적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져 지방통제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침략전쟁을 본격화하기 위해 조선 농촌사회를 장악할 필요성을 느끼고 유지 집단들에게 접근하였다. 유지 집단들은 지역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일부 유지들은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베풀어 주는 등 신망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일제는 농촌사회의 장악을 위해 ‘영향력 있는 유지 집단의 포섭’, ‘일제의 조치에 내응하여 일을 처리할 행동대원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일제는 ‘농민들을 갱생시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농촌진흥회 조직) 농촌사회에 치밀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유지 집단들에게는 농촌진흥회의 고위직과 도평의회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협력을 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진흥회의 실무진들을 구성하여, 이들을 농촌사회 통제의 앞잡이들로 이용했다. 

과거 조선시대 양반 유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기반은 지역에서 쌓아온 명성, 토지와 친인척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유지들의 존립 기반은 일제가 되었다. 기반이 변함에 따라 유지들의 삶도 달라졌다. 과거 조선의 양반 유지들은 생산기반인 토지가 있는 농촌에 살았지만, 새롭게 토호가 된 이들은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는 읍내나 시내로 몰려들었다. 우리 역사에서 중앙정부가 지역의 유지 집단들을 완전히 장악 한 시대가 온 것이다. 

일제시대가 지나가고, 전쟁의 혼돈과 토지개혁이 일부 이뤄지면서 토호 세력들은 그 힘이 약해지거나, 혹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자구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농촌의 근대화’라는 결실을 이루기 위한 운동이었지만, ‘농촌의 희생을 바탕으로 산업화 달성’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토호들을 재양성했고, 각종 이권과 개발이익을 주며 중앙정부에 종속시켰다. 또한 농촌진흥회와 유사한 각종 관변단체를 조직해 토호들에게 그럴듯한 직함을 주고는 그들을 관리했다. 

현재 지방이 중앙에 종속된 현실에는 바로 이런 역사의 이면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빚어진 ‘지방의 중앙 종속’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토호들은 중앙정부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지방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개발업자와 부패한 공무원, 지역의 정치인들을 엮어 그들만의 성역을 일궈나갔다. 그들은 지역개발을 부추겼고, 그 과정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쫓겨났고, 토호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중앙정부는 개발 지원금을 통해 토호 세력을 확실히 장악했으며, 개발업자와 부패 공무원들은 그들대로 배를 채웠다. 

지방선거는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 영향력을 지닌 토호 혹은 대리인의 각축장이 되었다. 다가오는 6월 2일 지방선거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상태로 선거를 하면 늘 같은 결과만 반복하고, 토호들의 성역만 단단해질 따름이다. 달콤한 개발공약은 도민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만다. 

도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민들을 어루만져주고, 도민들의 목소리를 키워주는 세력이다. 3·15의거, 부마항쟁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었던 도민들의 참된 의식이 절실한 시점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2월 4일자 기고한 글입니다. 원 제목은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 (17) ‘토호’로 본 중앙과 지방의 역사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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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 한국사 최악의 인물은 바로 이완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완용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를 알아간다는 자체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살펴보면 몇 가지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이완용도 자기 나름의 ‘소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소신은 우리가 아는 좋은 의미는 아니다. 그 소신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살펴보자. 

이완용의 첫 번째 소신은 ‘실리추구를 위한 변신’이다. 이완용은 철저하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변신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위정척사파에 가까웠다. 개화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서양 문물을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어 개화파들과 마찬가지로 물 건너 유학도 다녀오면서 개화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이후 아관파천을 통해 친러세력이 되었고, 다시 친미세력이 되었다가, 친일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수많은 변신을 통해 자기에게 철저히 이익이 되도록 했다. 

문제는 ‘이익이 되면 누구와 손을 잡아도 그만’이라는 사고이다. 그 사고가 바로 매국의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이완용은 경성일보에 시위를 하는 군중들에게 고하는 글을 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깨달아라. 제군, 미친 이가 아니라면 깨어나라.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제군은 왜 죽음을 스스로 택해서 호생(好生)의 덕혜에 복종하지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일본이 지배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괜히 자존심 내세우다가 호랑이 털을 건드려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명을 버리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이다. 요샛말로 하면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왜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냐?’는 것이다. 이완용의 이런 논리는 현재에도 잘 통용되는 논리이다. 

이완용의 두 번째 소신은 ‘질서와 평화 중시’다. 무언가 이완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그는 이 단어들을 잘 사용하였고, 실제로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제는 이 ‘질서와 평화’라는 단어 사이에 ‘강자와 시류에 대한 순종’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과 세계의 대세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이 일본과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대세이며, 동양은 일본의 선의를 받아서 함께 힘을 합쳐야만 서양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서양의 침략이라는 폭력을 상쇄하고 ‘평화’를 낳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완용에게 독립운동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질서와 평화를 어지럽히는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희생과 일제의 구조적인 폭력과 착취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완용이 그것에 대해 침묵한 이유는 바로 세 번째 소신 때문이다. 바로 ‘경쟁’이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독립협회 회원이었는데, 독립신문에 수차례 경쟁을 강조하는 글을 싣는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쟁이란 ‘원칙과 질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따위는 접어두고, 무조건 상대를 눌러 이기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폴란드와 미국의 예를 들면서 ‘폴란드는 경쟁에서 뒤처져서 망했고, 미국은 승리했다. 좌우지간 우리가 미국처럼 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제의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경쟁에서 패배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은 시류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이완용의 논리를 잘 살펴보면, 지금 우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들과 상통하는 점이 상당히 많다. 필자가 일전에 반일을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사관 논리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것을 언급하였다. 이완용 또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완용은 재론할 가치도 없는 최악의 인물이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느새 이완용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완용이 살던 구한말과 21세기의 시대상황은 전혀 다르다. 논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덮어놓고 이완용과 똑같다고 누군가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완용이 내세운 논리들이 그 시대에는 매국으로 이어졌으나,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그 논리들이 무엇으로 이어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완용의 논리들이 이 시대에 매국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극단적인 물질 자본주의, 이기주의, 사회적 모순과 결합하여 그 논리들이 비인간적 논리로 귀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린 과연 이완용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12월 30일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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