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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에 해당되는 글 3

  1. 2008.02.29 왕검성
  2. 2008.02.28 위만
  3. 2008.02.28 준왕
2008. 2. 29. 20:08

왕검성 과거 글들/사전2008. 2. 29. 20:08

  • 왕험성, 평양이라 불리기도 한다.

왕검성의 성격

왕검성은 아래의 3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 단군왕검의 건국지: 고조선 초기 단군왕검의 정치적 근거지로서의 성격.
  • 고조선의 중심지: 단군왕검 이래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
  • 고조선의 수도: 고조선이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면서 단순한 중심지가 아니라 행정, 군사적인 수도로서 성격.

위치

현재 가장 의견이 분분한 것은 왕검성의 위치이다.

  • 고정설(왕검성은 그 위치가 고조선 내내 변하지 않았다는 설)
    • 요동 소재설: 비파형 동검의 출토 범위와 고인돌의 분포지를 근거로 하여 만주 지방 요동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 표기로 이해하고 이를 왕검성의 위치로 보는 학설이 있다. 본 역사신문에서도 요동 소재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 평양 소재설: 북한도 1980년대까지는 요동 소재설을 기본적으로 적용하다가 '단군릉' 발견이후 고조선의 성립 이후부터 줄곧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의도(주체사상의 완성을 위한)를 의심할 만하다. 다만 평양지역도 고조선 초기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설을 뒷받침 할 만한 고고학적 발굴은 많이 이루어졌다.
  • 이동설: 많은 고대사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설로서, 초중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만주지역과 요동 일대였으나, 후기에 이르러 연나라의 침공 등을 맞으면서 조금 더 안정적인 평양 인근 한반도 서북부로 중심지를 옮겼다는 설이다. 특히 이 설의 배후에는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역사적 뒷받침을 안고 있다. 그러나 본 역사신문에서는 당시의 '패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요하로 전제하고 있다.
  • 기타 학설: 왕검성이 중국 내륙에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는 요서설, 복수수도설 등이 제기된다. 다수의 재야사학계에서는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 기존학계와는 확연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역사

왕검성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고조선 형성 초기부터 중요한 정치적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의 왕검성은 한반도-만주 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단군 왕검세력)의 근거지에 불과하였다. 즉, 고조선이나 한반도-만주를 대표하는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검성은 북방과 서방에서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시 된다. 따라서 왕검성은 고조선 내에서 점점 그 위상이 높아졌으며, 왕검성 일대는 어느 순간 고조선에서 가장 발전된 지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수한 문물을 전파하는 창구의 역할도 맡게 된다.

고조선이 차차 체계적인 국가로 성장해 나가자 왕검성의 위상도 그에 맞게 점점 높아진다. 왕검성 내에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체계와 주변 부족 세력들이 몰려드는 곳이 되었다.

연나라와의 대립(기원전 3~4세기 경) 이후 왕검성은 더욱 발달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연나라의 일원화 된 체계를 보면서 고조선의 왕검성도 연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러 지역으로 연결된 교통망과 관료체계, 군사체계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곧 고조선을 일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사실상의 고조선의 수도로 기능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점점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힘이 왕검성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다 위만은 왕검성을 점령하고(기원전 194년)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변 세력의 큰 반발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왕검성의 주인=고조선의 최고 지배자'라는 것이 일반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에도 왕검성을 점령하면 곧 고조선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하여 양복의 수군은 군대가 만들어지자 곧바로 왕검성을 공격하게 된다.(기원전 109년 가을)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 답게 우수한 방어시설과 많은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서 한나라 군대는 감히 무력으로 왕검성을 점령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왕검성 내부의 분열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듯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이자, 동방(만주-한반도)의 최고 도시 답게 한나라 군대를 막아내었다.

왕검성이 붕괴한 이후, 그 지역에는 낙랑군이 설치되고, 왕검성은 낙랑군의 치소(행정중심지)가 되어, 한나라가 옛 고조선 영토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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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8. 20:58

위만 과거 글들/사전2008. 2. 28. 20:58

사기삼국지에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위만이 중국계라고 하여도 그가 고조선에 망명할 당시 상투를 틀고, 복식을 고조선식으로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과 인접한 지역에서 고조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진나라한나라의 왕권강화책에 반발하여 고조선에 망명한 중국 귀족세력이 상당히 있었다. 위만도 이 때문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연나라 왕 '노관'이 제후들과 한나라에게 공격을 받아서 연나라를 버리고 흉노로 달아나자, 위만도 당시의 혼란 속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기원전 195년.

당시 고조선준왕은 그를 신뢰하여, 위만은 중국과 인접한 고조선 서부(대릉하~북경 인근)의 공백지 방어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박사(당시의 지방장관?)라는 직위도 얻게 된다. 그 지역은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 중국의 망명인들이 많이 정착해 있던 곳이었다. 위만은 이들을 모아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으로 침공하였다.(기원전 194년) 준왕은 '진국'으로 피난을 가고, 그는 왕검성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왕검성을 장악한 이후 강력한 대외정복, 중앙관제 확립을 꾀하게 된다.

위만은 중국 사람인가?

  • 망명 당시 상투를 짜고 고조선의 옷을 입었다.
  • 당시 요서방면에는 한나라 망명인들과 고조선인들이 섞여 살았다.
  • 준왕의 신임을 쉽게 얻은 점으로 보아서 완전한 중국계는 아닐 것이다.
  • 위만정권이 무너질 당시 관직들을 보면 그 명칭이 '고조선식'이었다는 것을 볼 때, 위만정권도 고조선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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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8. 20:41

준왕 과거 글들/사전2008. 2. 28. 20:41

고조선의 임금. 부왕의 아들이라고 알려져있다.

위만을 등용하여 고조선 서부영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기원전 194년 위만의 쿠데타로 왕검성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 남쪽 진국으로 피난하였다. 피난한 위치는 현재 아산만 인근 인천지역이라는 설과 평양 인근이라는 설로 나뉘어져있다.

진국으로 피난한 준왕은 그곳의 임금을 자칭하고, 우수한 철기문화로 진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후에 마한세력을 통합하고 '한왕'을 칭했다고 전해진다. r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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