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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망했다. 

대통령 지위나 하야 여부를 다 떠나서 그냥 망했다. 


박근혜가 망하면서 60대 이상 어른의 마음은 무너졌다.


그분들에게 박근혜, 그리고 박정희라는 명사는 자신들이 쌓아올린 성과를 보상해 주는 이름이었다. 


비록 박정희, 박근혜는 구중궁궐에서 호사스럽게 살았지만, 또 그렇게 허술하게 쌓아올린 것은 IMF외환위기 때 많이 허물어졌지만.


어쨌든 그분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보상해주는 이름이었다.


박정희가 있었기에, 그 밑에서 자신들이 허허벌판에서 이 나라를 일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되는 성역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를 부정하면 자신의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박정희 생가 입구./경남도민일보DB



따라서 그들은 박근혜를 찍어줬다. 


하지만 나는 지난 대선 때 그분들이 겉으로는 표를 안 냈지만 속으로는 그들도 살짝 불안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자다, 살림 한 번 안 해봤다'는 불안감이 살짝 따랐지만 그래도 박정희의 딸이기에 주저없이 표를 주었다. 


또한 자기를 꼴통이라 취급하는 젊은놈들에게 어른의 힘을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도 있었다. 그렇게 그분들은 하나로 뭉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박근혜가 망한 지금 엄청난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물론 젊은놈들 앞에서는 표를 안 내겠지만 조금만 길게 대화를 하다보면 그 상처가 적지 않다는 것을 단박에 알 것이다. 게다가 마음도 많이 지쳐 있을 것이다. 손에 일이 안 잡혔을 것이다. 자신들의 시대가 무너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나는 이 시점에 이분들을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세력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나이 들면 보수화 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최소한 젊은 사람의 말을 어느 정도 듣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가오는 선거에 대비할 수는 있지 않을까?


1. 박근혜를 찍었던 마음을 이해하자. "박정희 딸인데 그래도 보고 배운게 있어서 찍어주셨을 낀데"

2. 박근혜의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자. "저희가 걱정했던 것처럼 박근혜가 순진해서 이 꼴이 난 것 같아요." -> 이 얘길 하면 "하긴 그래. 지가 세상을 뭘 알겠노. 살림을 살아봤나" 요 말을 하거나 따라나오기 쉽다.

3. 고생한 것을 인정하자. "그래도 어르신이 그 고생을 했으니 젊은 사람들이 이만큼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하면 온갖 옛날 얘기 나올 것이다. 침착하게 다 들어주자. 

4. 마지막은 젊은 사람이 살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자. "이젠 어차피 앞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나라 아니겠습니까? 이번만은 젊은 사람이 밀어주는 사람으로 좀 찍어주이소."


이 4단 콤보로 어르신의 마음을 조금은 돌릴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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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에 2009년 8월 19일(김대중 서거 다음날) 기고한 글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야당 지도자였으며,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서 민주화에 투신하였고, 온갖 고초를 넘기면서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룩하고, 노벨평화상을 받고, 6.15공동선언을 이끌어 내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뭐 이 정도가 대부분 알고 있는 전부 아닌가? 자, 그럼 1971년 이전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렇다. 언론이건 뭐건 간에 1971년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언제 태어났는가 그 정도만 -그것도 고령의 나이를 강조하기 위해- 언급할 뿐이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도 한국 현대사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1971년에 아무런 배경없이 도깨비 방망이에서 뚝딱 튀어나오듯이 역사에 갑작스럽게 그 이름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김대중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저 그렇게 튀어나올 수 있는 사람인가? 그의 비전과 철학, 가치가 그저 1971년 이후 수많은 탄압속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차근차근 성장해 온 결과물을 1971년부터 보게 된 것일까?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필자도 비교적 최근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연설과 자료들을 보게 되었으며,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그 분의 면모를 계속 새로 발견하게 되고, 경의와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가 잘 모르던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보면서 그 분의 거대한 가치에 대해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김대중은 처음부터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인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때야 동영상도 많이 남아 있고, 최근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자료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료들도 극히 일부분을 확대 과장하거나(좃선벼룩 류의 '김대중 분석'이 그러하다.) 어떤 이야기를 끌어 나가기 위해서 일부만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단 확인된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하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생이라고 하는데, 당시는 제대로 호적에 올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따라서 1923년~1925년까지 여러 설들이 있다. 웃기지 않는가? 무슨 고대사 인물 탐방도 아니고, 출생연대부터 분명하게 알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보다 오히려 더 자료가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은 우등생으로 자라났고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좌익활동을 하였다. 


여기서 잠깐! "역시 김대중은 빨갱이 씨앗이네, 젊을 때부터 빨갱이 짓이었구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딴지에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술자리에서 빨갱이론에 대처하기 위해서 논리를 제공한다면 아래와 같다.


당시 미군정에서 조선 사람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우파는 겨우 10%,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무려 90%가 나왔다. 1920년대부터 민중들에게 침투하고, 지하조직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좌익세력은 이미 대중화 되어 있었다.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이상, 민중 뿐만 아니라 소위 글 좀 읽고, 쓴다는 사람은 모두 좌익계열이었다. 김대중 빨갱이론을 펼치는 사람에게 '까놓고 니 조상도 전부 빨갱이였어'라고 정중하게 설명해주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후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고초를 겪지만, 이런저런 사람이 나타나서 간신히 목숨은 부지하게 된다. 또한 북한군이 남침했을 때에는 북한군에 의해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이렇게 냉전은 어린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상처로 남기고 만다. 보통 이쯤 되면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상이다. 뉴또라이처럼 되거나 혁명가가 되거나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기울기보다는 유연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변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특히 목숨을 잃을 뻔 했다면 더더욱 드물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의 유연한 사고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1955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로 인해서 젊은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그런데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니. 무슨 꼭 80~90년대 운동권적인 제목의 글 같지만 1955년의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시 1950년대의 한국노동운동의 모습과 대안이 매우 잘 제시되고 있다. 실로 80~90년대의 이론과 비교해봐도 글의 수준이나 통찰력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 글은 일단 반공을 주장하면서 시작한다. 북한과 사회주의는 철저히 배격하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지만, 실제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동의 유연성' 어쩌구 저꺼구 씨부려대는 뉴또라이들이나 재벌들의 논리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단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하여야 하고, 관료자본주의 지배체제를 극복하여 합리적인 경제시스템을 얘기하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다. 잘 들어보면 흡사 민주노동당 분위기를 나타내는 이 글의 일부를 옮겨 본다.


...전략...

여기서 장황하게 정치론을 늘어놀 여유는 없지마는 여하간 자본주의의 제도하에서는 노동자의 복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가 없는 것은 이미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경제의 후진성을 지양하고 근대적 생산을 급속히 확충 발전시켜야 함을 서두른 나머지, 우선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놓고 그 후 서서히 노동자의 후생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논자가 많은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에 고인 물속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고기더러 동해 물을 끌어들일 때까지 기다리라는 개철지어의 장자고어와 마찬가지 모순으로서 그간에 있어서의 노동자와 전 근로계급의 고초와 희생을 무엇으로 감당해낼 것이며, 기술한 바 공산당과 대항해서 노동자가 어떻게 굳센 민주 진영의 선봉으로서 싸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가?


그렇다고 필자는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당장에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실시하도록 투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초보조차 제대로 못 갖춘 우리 나라 경제 형편으로 사회주의를 꿈꾼다는것은, 그것이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만의 관장을 주장하는 소극적 사회주의건 생산, 소비 양면의 장악을 목적하는 적극적 사회주의건 도저히 현실을 무시한 공상에 불과한 것인 동시에 사회주의 그 자체 역시 각국에서의 실험의 결과 상당한 결함이 있다는 것도 이미 주지되어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지향할 길은 죄악적인 착취와 지배를 자행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일방, 우리의 실정이 용납지 않고 겸하여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생산 능률의 후퇴를 면치 못하는 사회주의 자체도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 결국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는 이를 어디까지나 존중하되 종래와 같은 자본만의 우위지배를 단연 배격하고 노동, 자본, 기술의 3자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동함으로써 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기하고 그 이윤의 분배에 있어서도 노동자와 기술자 역시 응분의 참여가 허용될 것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종래 사회주의가 생산 수단의 사회화에만 중점하던 것을, 이제 생산수단보다도 기업운영과 이윤분배에 있어서의 사회화라 할까, 즉 노동자와 기술자를 자본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처우함으로써, 생산능률화의 감퇴를 가져옴이 없이 사회주의 본래의 목적인 근로계급의 복리의 증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새로이 각성된 세계적 사조의 지향이며, 이러한 경향은 북구제국을 위시한 구주 여러 나라와 심지어 자본주의의 본가인 미국에서까지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이며 , 지금 미국에서는 각 기업체의 주권을 노동자에게 적극적으로 분배하는 노력이 의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후략...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54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그럼에도 현재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물론 그 만큼 우리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당시 31살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분석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영민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연거푸 실패한다. 1954년 총선에서도 떨어지고, 뒤이어 강원도 인제에서도 떨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에 첫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에서 1961년 5월 14일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16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국회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된다.

지독히도 정치에 운이 없던 김대중 대통령의 초기 정치 이력은 함께 회자되는 경쟁자(나는 결코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자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는 수준이 맞아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력과도 비교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개 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하고 그리고 대개 선거에 '떨어진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토호인 부모의 든든한 후원과 정치적 후원자의 지원으로 비교적 무난하고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차이가 바로 3당 합당 당시 엇갈린 두 사람의 선택으로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드디어 국회의원 뱃지를 달게 되는 것은 1963년 6대 국회의원선거였다. 고향 목포에서 승리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 전라도에서 민주당 달고 이기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냐?'라고 하겠지만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11곳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휩쓸었다. 전라북도는 2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민주공화당이었다. 당시는 우리가 아는 그런 지역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국회에 간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만큼이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다. 특히 1964년 4월 21일에는 김준연이라는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상황에 처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무려 5시간 19분에 걸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였다.(이는 현재 한국 기네스에 올라있다.).6대 국회의원 활동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유력 야당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1967년에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김대중 대통령은 목포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건 더욱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무려 16개 지역에서 민주공화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는 당연히 박정희 정권의 관권선거가 포괄적으로 개입된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하는 쇼까지 보여주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뚫고 승리한 것이었다.

이 선거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왜냐하면 이 선거를 기점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포지션을 확고히 하게 된다. 당시 선거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흡사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 연상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나의 비원이 있습니다. 내 소원은 돈이 아닙니다. 2억도 싫고 20억도 싫고 200억도 싫습니다.


내 소원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신라 삼국통일 이래 1500년 동안 처음으로 이렇게 국토가 갈라져 있는 사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해방후 국토가 20여 년이나 분단된 이 사실이, 나는 통일이 없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평화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건설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박정권 아래에서 건설입네, 수출입네, 증산입네, 하면서 몇 사람만 잘살게, 몇 사람만 부자되게, 몇 사람만 배떼기 부르게 만들고 부익부... 재벌은 더욱 더 대재벌을 만들고 모든 국민은 헐벗은 가난뱅이요, 모든 국민은 더욱 빈익빈하게 만드는 이 특권경제를 타파하고, 내가 주장하고 우리 당책으로까지 채택된 중산층과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대중경제체제를 실현해서 나라의 혜택이 국가의 혜택이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모든 사람의 피부와 뼈끝까지 골고루 돌아갈 그러한 올바른 경제정책이 이 나라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나의 절대적인 소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몇몇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얘기하면서 '반독재 투쟁, 민주화, 민족화해-평화노선'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견제를 받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타동적인 외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60년대에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적 흐름이나 과정에서 타동적으로 묻혀가지 않았다. 스스로 길을 만들었고,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내놓았다. 그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을 쥔 세력에게는 대단한 위협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비전들을 더욱 구체화하여 1970년에 <1970년대의 비전>이라는 글을 쓴다. 그 글을 살펴보면 그의 구상이 얼마나 튼튼한 철학적 기반 위에, 얼마나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 이 글이 나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이 글을 읽는 당시 기득권 세력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위협으로 느껴졌을 지 그 심정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잠시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 나라 국민들은 적어도 헌법이념상으로는 ‘교양과 재산’을 가진 시민계급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하는 19세기의 근세 초기 민주주의의 제한된 시대에 살지 않고, 만 20세 이상의 성년이면 누구나 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20세기의 보편화된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이 나라의 기본법과 법률제도는 외관상으로 다른 어느 선진 민주제국과 비교해도 과히 손색이 없는 이념과 가치를 선언하고 있고, 또 이들 제도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1인 1표제의 원칙에 입각해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대중의 권익을 보호, 신장하는 데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현 우리 나라의 정치체제는 겉으로 드러난 상징과 제도만을 가지고 규정한다면, 데이비드 이스튼 교수가 그의 명저 『정치체계론』에서 정의한 바 ‘정치체계 속에 투입되는 모든 요구를 설정시키고 모든 결정을 유효케 하는 방법의 규제조치로서의 체제가 민주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서와 이론상에 비친 그림 속의 떡 같은 정치체제일 뿐 우리 국민대중이 지금 이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실감하는 실제의 정치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중략...

철인정치를 구가한 고대 희랍의 플라톤으로부터 오늘의 개발독재 옹호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엘리트에 의한 통치의 효율성을 믿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대중이 지배하는 정치를 혐오하고 비판했다.


#1 대중은 무식하고 학식이 없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2 대중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3 대중은 허망한 것을 약속하는 선동정객에 표를 매수당한다. #4 대중은 언제나 권위지향적이며 자조력도 발전의욕도 없다. #5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가 똑같이 1표씩 갖는 것은 불공평하다.


개발독재 옹호자들은 대중의 자치역량을 지나치게 회의하고, 지식수준의 열악함을 개탄하여 대중에 의한 지배를 회피한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에 대한 피상적 관찰의 산물이다.


국민대중은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개발독재 지지자들이나 엘리트 통치예찬자들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우매하지도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다.


봉건정치의 이론적 대종인 공자조차 대중을 가리켜 ‘지극히 어리석되 가히 속일 수 없는 존재’라고 갈파하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대중은 언제나 자기의 올바른 지도 세력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독재정권의 타도에 앞장섰다.

대중은 언제나 역사의 편이었으며 또한 최후의 승리자였다. 나폴레옹도 진시황도 대중 앞에서는 무참한 패자가 되고 만 것이다.


...중략...

첫째. 박정권의 경제건설이 외국의 반완제품을 도입 가공하는 매판적 건설이며 이것이 국부를 한없이 해외로 유출시키고 있으며 농업을 희생으로한 건설이 도시, 농촌 간의 이중구조를 극대화하고 경제기반의 파탄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그 청산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적 분업관련의 심화에 의한 내포적 공업화와 농공업간의 긴밀한 관련발전 위에 국민경제 전반의 통일성 있는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인 재생산권의 형성을 촉진하여 우리 경제의 상대적인 자급자족 체계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둘째, 공업화의 과정에 있어서는 국가는 전력 수송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투자하는 동시에 민족자본인 중소기업의 보호육성과 이의 경제적 단위에로의 발전을 위하여 관련기업간의 수평적 계열화를 적극 지원하도록 유의할 것이다.


...중략...

셋째, 농업은 식량의 자급자족과 경제발전의 기본 여건으로서 가장 중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업의 구조는 한국농업이 지니고 있는 제조건에 비추어 자발적인 농민참여에 의한 협업농의 창설과 자주농업의 안정에 그 중점이 두어질 것이다. 이를 토대로 공업과 농업간의 분업 관련의 심화를 위해 상업적 농업의 전개가 권장될 것이다. 특히 어떠한 정책방향도 경제적 유인없이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이를 유도하는 조치가 꾸준히 취해져야 할 것이며 농업취업자와 공업취업자간의 소득 균형을 위한 적정한 농산물 가격과 이중가격제도, 가격예시 및 유지정책이 취해져야 한다.


넷째, 계층간 분배구조는 산업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에 의한 자본에 대한 약간의 간섭과 근로자의 경영참여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근로자의 경영참여는 단순히 권익확보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협력에도 큰 의의를 둔다.


근로자의 정당한 배분참여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기업체에 있어서 노동조합의 경영참여, 종업원 특수제도를 법제화할 것이다.


다섯째, 국민경제의 운용에 있어서는 혼합경제의 한국적 형인 대중경제는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추진하다. 그리고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위하여는 약간의 기간산업을 국가가 소유할 것이다. 그러나 그 범위는 한정적이고 과도적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할 것은 대중경제는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의 기능을 존중하는 대중경제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발전과 운용은 크게 격려될 것이며 그것이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공헌하는 한 결코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바이다.


여섯째, 대중경제는 재정금융세제의 운용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소수 특권층 위주를 단호히 배격하고 이미 지적한 바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 중소기업의 육성, 농업경제의 급속한 발전 위주의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 폭넓은 중산안정계층이 형성됨으로써 우리의 경제가 무한한 발전을 지향함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의 물질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이다.

...후략...


솔직히 내가 기득권 세력이라도 이건 가만히 둬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의 비전은 점점 정교해지고, 구체화 되었고, 또한 확대되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 세력은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 속에 그 분이 겪을 험난한 여정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글을 쓴 지 무려 28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비상 상태였고, 그의 '70년대 비전'은 나온지 무려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현실화 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글을 쓴 다음해, 1971년에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로 나오게 되었고, 박정희와 인상적인 한판을 벌이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김대중 대통령이 승리한 선거였지만, 온갖 관권 선거와 부정 개표로 간신히 김대중 대통령을 따돌릴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는 김대중 대통령을 죽이려 하였고, 거기서부터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살펴보면서 왜 그가 그토록 탄압받았는지,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역량은 너무나 높았기에 탄압받을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그를 이겨낼 역량까지 함께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노무현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비전이라고 생각하며, 김대중 대통령은 극복해야 할 구시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연설과 글을 보면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차이점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시대가 달랐을 뿐이고, 세련함이 달랐을 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너무 영민했으며, 너무 앞서간 인물이었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시대상황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독재자와 기득권의 공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늘 거꾸로만 돌았던 역사의 수레바퀴는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역주행을 멈추게 되었으며, 노무현 정부의 정책으로 잠시나마 역사의 온전한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기득권과 독재권력에게는 진땀나는 위험인물이었고, 거대한 역사의 역주행을 홀로 막은 거인이었으며,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바로 보여준 최초의 정치인으로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끝으로 이명박 정부에게 말하는 듯한 글이 하나 있어 인용하도록 한다. 이것은 1973년에 일본 망명 시절에 일본에서 펴낸 <행동하는 양심으로>라는 책에 있는 -경애하는 국민에게-라는 글의 첫머리 부분이다.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느냐, 또는 얼마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국민을 대했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나라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느냐,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런 정책을 실현시키기위해 노력했는가 - 즉,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봉사했는가, 그 실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가진 인물이라면 가령,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았던 기간이 비록 짧았더라도 그리고 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하며 존경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정치의 기본 이념과 신조로 삼고 있다. 나는 국민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국민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 자세를 경멸하며 또한 증오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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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서 중앙정부에 종속된 지방의 역사를 말한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이 중앙과 지방의 역사는 누가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중앙의 역사에 지방이 종속되는 현상은 안타깝지만 이는 국가 운영의 효율을 담보할 수 있기에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반론의 측면으로서 토호라는 집단에 대해 역사적으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토호라는 집단은 지역에서 군림해 온 ‘유지(有志) 집단’을 얘기한다. 중앙집권화가 이뤄진 이후부터 중앙정부는 지방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지역의 유지 집단을 달래거나 혹은 강압하여 반발하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유향소를 설치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수령과 유향소의 유지 세력들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 지역의 특수성과 자치성을 인정하는 대신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도 역시 인정한다. 이런 관계는 어느 정도 양측의 긴장 아래 수평적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져 지방통제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침략전쟁을 본격화하기 위해 조선 농촌사회를 장악할 필요성을 느끼고 유지 집단들에게 접근하였다. 유지 집단들은 지역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일부 유지들은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베풀어 주는 등 신망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일제는 농촌사회의 장악을 위해 ‘영향력 있는 유지 집단의 포섭’, ‘일제의 조치에 내응하여 일을 처리할 행동대원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일제는 ‘농민들을 갱생시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농촌진흥회 조직) 농촌사회에 치밀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유지 집단들에게는 농촌진흥회의 고위직과 도평의회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협력을 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진흥회의 실무진들을 구성하여, 이들을 농촌사회 통제의 앞잡이들로 이용했다. 

과거 조선시대 양반 유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기반은 지역에서 쌓아온 명성, 토지와 친인척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유지들의 존립 기반은 일제가 되었다. 기반이 변함에 따라 유지들의 삶도 달라졌다. 과거 조선의 양반 유지들은 생산기반인 토지가 있는 농촌에 살았지만, 새롭게 토호가 된 이들은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는 읍내나 시내로 몰려들었다. 우리 역사에서 중앙정부가 지역의 유지 집단들을 완전히 장악 한 시대가 온 것이다. 

일제시대가 지나가고, 전쟁의 혼돈과 토지개혁이 일부 이뤄지면서 토호 세력들은 그 힘이 약해지거나, 혹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자구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농촌의 근대화’라는 결실을 이루기 위한 운동이었지만, ‘농촌의 희생을 바탕으로 산업화 달성’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토호들을 재양성했고, 각종 이권과 개발이익을 주며 중앙정부에 종속시켰다. 또한 농촌진흥회와 유사한 각종 관변단체를 조직해 토호들에게 그럴듯한 직함을 주고는 그들을 관리했다. 

현재 지방이 중앙에 종속된 현실에는 바로 이런 역사의 이면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빚어진 ‘지방의 중앙 종속’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토호들은 중앙정부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지방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개발업자와 부패한 공무원, 지역의 정치인들을 엮어 그들만의 성역을 일궈나갔다. 그들은 지역개발을 부추겼고, 그 과정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쫓겨났고, 토호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중앙정부는 개발 지원금을 통해 토호 세력을 확실히 장악했으며, 개발업자와 부패 공무원들은 그들대로 배를 채웠다. 

지방선거는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 영향력을 지닌 토호 혹은 대리인의 각축장이 되었다. 다가오는 6월 2일 지방선거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상태로 선거를 하면 늘 같은 결과만 반복하고, 토호들의 성역만 단단해질 따름이다. 달콤한 개발공약은 도민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만다. 

도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민들을 어루만져주고, 도민들의 목소리를 키워주는 세력이다. 3·15의거, 부마항쟁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었던 도민들의 참된 의식이 절실한 시점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2월 4일자 기고한 글입니다. 원 제목은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 (17) ‘토호’로 본 중앙과 지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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