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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8년 초등학교에 갔고, 200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갔다. 

전교조는 1989년 불법화 됐으며, 1999년 합법화됐다. 나는 학창시절 대부분 전교조가 불법이던 시절을 관통했다. 


따라서 전교조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 어느 교사도 '내가 전교조'라고 말하는 교사는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전교조 교사는 아무래도 표가 났다. 


기억1


1994년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사회 선생님이 운영하는 역사 동아리에 들어갔다. 1994년 4월 말쯤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두꺼운 사진책 하나를 들고 오셨다. 더러는 흑백사진도 있었고, 더러는 컬러사진도 있는 책이었다. 끔찍한 시신 모습이 한 쪽에 하나씩 실려 있었다. 시신 중에 형체가 온전한 것은 소수였고, 나머지는 도대체 몸 어디가 어딘지 알아보기 힘든 시신이 많았다. 헌데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시골에서 개나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장면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 사진으로 본 시신 사진은 의외로 무섭지 않았다. 


다만 도대체 이게 뭘까 싶었다. 사회 선생님은 '이게 바로 광주에서 전두환에게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시사 잡지(신동아)를 계속 봐왔기 때문에 바로 '아하' 싶었다.


당시에는 사교육이 없었고 사회시험, 특히 중학교 1학년 과정에는 세계사가 많았다. 세계사는 범위도 넓었고, 외울 게 많았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면 나를 포함해 한 반에 80점 넘는 사람이 서너 명에 불과했다. 반 평균이 40~50점 정도 됐을 거다. 이 선생님은 점수 낮은 친구들을 체벌했다. 물론 아주 심하게 체벌하지는 않았다. 이어 80점 넘는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각자 3대씩 맞았다. 아니 왜? 


"니들은 친구들을 좀 가르치고 물어보면 얘기도 해주고 그랬어야지. 니들만 점수 잘 받으면 그만이냐?"


내 평생 점수 높게 받았다고 맞아 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기억2. 


1997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모교는 울산시내에서 학성고-울산고 다음으로 넘버 3~4를 치열하게 다투던 중이었다. 서울까지 포함해서 전국 최초로 수능모의고사 만점이 나오고 지방에서 서울대에 거의 100명 가까이 보내는 학성고, 학성고에 아깝게 들어가지 못한 울산고 학생들은 감히 상대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그 다음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신입생이 되자마자 바로 밤 10시 혹은 10시 30분까지 야간강제학습을 했다. 단체기합도 많이 받았다. 선생들한테 많이 맞았다. 내 평생 가장 많이 맞아본 시기였다. 


1997년 겨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당선된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교장 정년을 대폭 줄여 버렸다. 65세에서 62세 정도로 줄여 버린 것으로 기억한다. 1998년 여름 우리 학교 교장도 졸지에 백수가 되고, 대신 비교적 젊은 교장이 승진했다. 


이 교장은 앞선 교장과는 달랐다. 만약 교내에서 쓰레기를 보면 앞선 교장은 "어이, 이것 좀 주워라"고 시킬 사람이었다. 한데 새 교장은 학생이 있어도 자기가 직접 쓰레기를 줍고 다녔다. 학교에 굴러다니던 쓰레기가 줄어들었다. 교장이 하도 열심히 줍고 다녀서 그랬는지 아니면 교장이 줍고 다니니 학생들이 덜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교내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는 줄었다. 2학년이 됐는데 야간강제학습이 되레 줄어 밤 9시 30분에 마쳤다. 체벌과 단체기합이 사라졌다. 고2~고3때 다 합쳐도 5대도 안 맞았던 것 같다. 


우리 반에 공부를 제법 했지만 미용사가 꿈인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서 미용사 자격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만화에 환장한 친구들이 있었다. 동아리를 만들고 예체능 계열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학교 복도에 신문 가판대가 생겼고, 비교적 중도적인 한국일보를 보도록 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학교는 감옥에서 생동감 있는 곳이 됐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적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울대-연고대 가는 친구들은 작년이나 올해나 몇 명 뿐이었다. 이사장은 서울대-연고대 카운터가 중요할 따름이었다. 


전교조 느낌의 선생들은 사회/국어/과학계열에 많았다. 박사학위를 가진 국어 선생님은 그 유명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려줬다. 중국음식 먹고 독립선언서 지들끼리 낭독하고 일제에 자수해서 아무 저항도 없이 끌려갔다. 보다 못한 한용운이 부칙 3조를 넣어서 그나마 저항의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을 나는 1998년에 알았다. 


사회 선생님은 예시를 주면서 시민단체 발족 선언문을 써보라고 하기도 했다. 박정희 경제성장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배웠다. 1998년 당시 중국이 얼마나 무섭게 성장할 것인지 얘기해줬다. 중국이 일본이나 러시아 보다 더 세질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학생들은 믿지 않았다.


그렇게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전교조는 합법화 됐지만, 어느 선생님도 '내가 전교조 교사요'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저 파편적인 기억으로 '저 선생님이 전교조였을거다' 짐작만 할 따름이다. 


내가 짐작한 전교조 교사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철학적이거나 어려운 질문을 자주 던진다. 예를 들어 왜 지금 우리가 6공화국이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무슨 뜻인데? 국가가 잘 사는 것과 국민이 잘 사는 것이 같은 것인가? 

2. 아이들을 덜 때리거나 거의 안 때린다. 

3. 동아리나 특별활동에 성의를 기울인다. 당시 특활시간은 그냥 잠자는 시간이거나 그저 시간 떼우고 마는 시간이다. 당시 대학은 무조건 수능 점수로만 결정되던 시대였다. 그걸 열심히 한다고 한 들 학생이나 교사나 아무런 이득이 없었지만 일부 선생님들은 열심히 했다. 

4. 시사적인 이슈에 대해 민감하다. 

5. 내신이나 수능과 관계없는 자료를 인쇄해서 읽어보라고 나눠주기도 했다. 

6. 학생들의 개성을 다소 이해해준다. 그래도 나름 중위권 이상 인문계 학교에서 미용사 시험을 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7. 아는 게 참 많고 당시 내가 들어도 논리가 정연했다. 그냥 무조건 이게 옳다고 하는 건 별로 없었다. 


어쨌든 내가 학창시절 '비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전교조 혹은 전교조 비스무리한 선생은 이게 전부다.  


참고로 1989년 당시 문교부에서 학교와 학부모에 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다. 위의 내가 규정한 특성과 얼마나 비슷한지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신문반, 민속반 등의 특활반을 이끄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탈춤, 민요, 노래,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

-자기 자리 청소 잘 하는 교사

-학부모 상담을 자주 하는 교사

-사고 친 학생을 정학이나 퇴학 등 징계를 반대하는 교사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보는 교사




기억3. 


그러다 사회 나갔다. 사실 공식적인 전교조 선생은 사회에서야 만나게 됐다. 


2006년 내가 26살 때였다. 당시 '공모제 교장'이라는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학교장이 그냥 승진해서 교육감이 인사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 자격요건을 갖추면 학교운영위에서 심사해서 교장을 선정하는 제도였다. 당시 경남 전교조 1세대인 이영주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알게 됐다. 이영주 선생은 2003년 간선제로 치뤄진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성향 고영진 교육감에게 아깝게 패할 정도로 거물이었다. 나는 당시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장이 운동권 출신이라 이영주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영주 선생은 공모제 교장을 통해 교육개혁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전교조 교사가 만든 경영계획서는 너무나 딱딱해 학교운영위원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마침 우리 사장이 '임 주임이라고 우리 직원이 있는데 참 글을 잘 쓴다'고 침을 튀겨가며 자랑을 한 것 같다. 그래서 학교경영계획서를 수정하는 일을 맡게 됐다. 중학생이 봐도 이해하게 쉽게 재구성 해 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쨌든 이영주 선생은 남해 설천중학교 공모 교장으로 선임됐고, 공모 교장 4년 동안 참 잘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추억이다. 냉정하게 되돌아 봐도 나쁜 기억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Posted by 임종금 JKL

김영삼 전 대통령 모습을 간만에 봤다. 그는 현대사에서 재미난 에피소드를 많이 남긴 사람인데, 내가 아는 것만 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1. 1987년 정도로 기억한다. 김영삼 당시 당 총재가 갑자기 기자들(기자들에게 나서서 얘기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위인이다)에게 "내가 말야, 사우나 신문에 났어"고 난리를 피웠다. 기자들은 도대체 '사우나 신문'이 뭔지 몰라 한참을 헤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홍콩에 있는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라고..엄청난 축약력에 기자들이 멘붕된 사건.

비슷한 예로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1989년 민주화로 인해 실각, 처형됨) 이름이 길고 외우기 귀찮으니 그냥 '차 씨'라고 부름.


2. 역시 1987년 무렵에 김대중 당 고문과 함께 민주화 국민서명을 받는데 김영삼 총재는 "김 고문, 한 1000만 명 받읍시다. 100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김대중은 "100만도 쉽지 않은데, 1000만 서명이 가능할까요?" 그러자 김영삼 총재는 "그냥 100만 명 받아놓고 1000만 서명 했다고 하면 됩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 중인 김영삼 전 대통령./김현철 씨 페북



3. 이건 신동아에서 읽은 것. 1993년 2월 대통령이 된 직후, 군부 인사를 단행했다. 그런데 비서관이 '하나회가 가만히 안 있을 건데, 혹시 변란이 일어날라..'고 쫄아 있자, 김영삼 대통령은 딱 한 마디 물었다. "군 인사권은 누구에게 있어?" 비서관은 "네, 각하에게 있습니다"....그날 밤 하나회 주축 장군 수십 명의 모가지가 날라갔다는. 워낙 창졸지간에 싹 날려버린, 상식을 벗어난 초강경 대응에 하나회는 억 소리도 못했다는....이런 깡다구를 노무현 대통령이 좀 갖췄다면 어땠을까?


4. 미국에 국빈 대우로 백악관에 머물렀다(요즘 이명박이나 박근혜는 국빈 대우 받지도 못하죠). 백악관에 자다가 새벽 5시 벌떡 일어나 클린턴 대통령을 억지로 깨우고 둘이 조깅을 했다는. 클린턴은 자다가 날벼락 맞고, 스케쥴 다 망쳤다는...

더 웃긴 건 클린턴은 '새벽에 이렇게 깨운 걸 보면 단 둘이 긴밀히 할 얘기가 있겠지' 싶었지만, 죽자고 조깅만 하는 김영삼. 나중에 알고보니 그냥 '클린턴이랑 조깅해서 내가 이겼어'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


아무튼 기명사미(옛날엔 이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 대통령. 애증이 교차하는 사람이다.



Posted by 임종금 JKL

-딴지일보에 2009년 8월 19일(김대중 서거 다음날) 기고한 글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야당 지도자였으며,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서 민주화에 투신하였고, 온갖 고초를 넘기면서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룩하고, 노벨평화상을 받고, 6.15공동선언을 이끌어 내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뭐 이 정도가 대부분 알고 있는 전부 아닌가? 자, 그럼 1971년 이전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렇다. 언론이건 뭐건 간에 1971년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언제 태어났는가 그 정도만 -그것도 고령의 나이를 강조하기 위해- 언급할 뿐이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도 한국 현대사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1971년에 아무런 배경없이 도깨비 방망이에서 뚝딱 튀어나오듯이 역사에 갑작스럽게 그 이름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김대중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저 그렇게 튀어나올 수 있는 사람인가? 그의 비전과 철학, 가치가 그저 1971년 이후 수많은 탄압속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차근차근 성장해 온 결과물을 1971년부터 보게 된 것일까?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필자도 비교적 최근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연설과 자료들을 보게 되었으며,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그 분의 면모를 계속 새로 발견하게 되고, 경의와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가 잘 모르던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보면서 그 분의 거대한 가치에 대해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김대중은 처음부터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인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때야 동영상도 많이 남아 있고, 최근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자료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료들도 극히 일부분을 확대 과장하거나(좃선벼룩 류의 '김대중 분석'이 그러하다.) 어떤 이야기를 끌어 나가기 위해서 일부만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단 확인된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하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생이라고 하는데, 당시는 제대로 호적에 올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따라서 1923년~1925년까지 여러 설들이 있다. 웃기지 않는가? 무슨 고대사 인물 탐방도 아니고, 출생연대부터 분명하게 알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보다 오히려 더 자료가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은 우등생으로 자라났고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좌익활동을 하였다. 


여기서 잠깐! "역시 김대중은 빨갱이 씨앗이네, 젊을 때부터 빨갱이 짓이었구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딴지에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술자리에서 빨갱이론에 대처하기 위해서 논리를 제공한다면 아래와 같다.


당시 미군정에서 조선 사람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우파는 겨우 10%,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무려 90%가 나왔다. 1920년대부터 민중들에게 침투하고, 지하조직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좌익세력은 이미 대중화 되어 있었다.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이상, 민중 뿐만 아니라 소위 글 좀 읽고, 쓴다는 사람은 모두 좌익계열이었다. 김대중 빨갱이론을 펼치는 사람에게 '까놓고 니 조상도 전부 빨갱이였어'라고 정중하게 설명해주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후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고초를 겪지만, 이런저런 사람이 나타나서 간신히 목숨은 부지하게 된다. 또한 북한군이 남침했을 때에는 북한군에 의해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이렇게 냉전은 어린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상처로 남기고 만다. 보통 이쯤 되면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상이다. 뉴또라이처럼 되거나 혁명가가 되거나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기울기보다는 유연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변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특히 목숨을 잃을 뻔 했다면 더더욱 드물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의 유연한 사고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1955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로 인해서 젊은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그런데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니. 무슨 꼭 80~90년대 운동권적인 제목의 글 같지만 1955년의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시 1950년대의 한국노동운동의 모습과 대안이 매우 잘 제시되고 있다. 실로 80~90년대의 이론과 비교해봐도 글의 수준이나 통찰력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 글은 일단 반공을 주장하면서 시작한다. 북한과 사회주의는 철저히 배격하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지만, 실제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동의 유연성' 어쩌구 저꺼구 씨부려대는 뉴또라이들이나 재벌들의 논리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단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하여야 하고, 관료자본주의 지배체제를 극복하여 합리적인 경제시스템을 얘기하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다. 잘 들어보면 흡사 민주노동당 분위기를 나타내는 이 글의 일부를 옮겨 본다.


...전략...

여기서 장황하게 정치론을 늘어놀 여유는 없지마는 여하간 자본주의의 제도하에서는 노동자의 복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가 없는 것은 이미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경제의 후진성을 지양하고 근대적 생산을 급속히 확충 발전시켜야 함을 서두른 나머지, 우선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놓고 그 후 서서히 노동자의 후생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논자가 많은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에 고인 물속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고기더러 동해 물을 끌어들일 때까지 기다리라는 개철지어의 장자고어와 마찬가지 모순으로서 그간에 있어서의 노동자와 전 근로계급의 고초와 희생을 무엇으로 감당해낼 것이며, 기술한 바 공산당과 대항해서 노동자가 어떻게 굳센 민주 진영의 선봉으로서 싸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가?


그렇다고 필자는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당장에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실시하도록 투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초보조차 제대로 못 갖춘 우리 나라 경제 형편으로 사회주의를 꿈꾼다는것은, 그것이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만의 관장을 주장하는 소극적 사회주의건 생산, 소비 양면의 장악을 목적하는 적극적 사회주의건 도저히 현실을 무시한 공상에 불과한 것인 동시에 사회주의 그 자체 역시 각국에서의 실험의 결과 상당한 결함이 있다는 것도 이미 주지되어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지향할 길은 죄악적인 착취와 지배를 자행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일방, 우리의 실정이 용납지 않고 겸하여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생산 능률의 후퇴를 면치 못하는 사회주의 자체도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 결국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는 이를 어디까지나 존중하되 종래와 같은 자본만의 우위지배를 단연 배격하고 노동, 자본, 기술의 3자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동함으로써 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기하고 그 이윤의 분배에 있어서도 노동자와 기술자 역시 응분의 참여가 허용될 것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종래 사회주의가 생산 수단의 사회화에만 중점하던 것을, 이제 생산수단보다도 기업운영과 이윤분배에 있어서의 사회화라 할까, 즉 노동자와 기술자를 자본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처우함으로써, 생산능률화의 감퇴를 가져옴이 없이 사회주의 본래의 목적인 근로계급의 복리의 증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새로이 각성된 세계적 사조의 지향이며, 이러한 경향은 북구제국을 위시한 구주 여러 나라와 심지어 자본주의의 본가인 미국에서까지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이며 , 지금 미국에서는 각 기업체의 주권을 노동자에게 적극적으로 분배하는 노력이 의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후략...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54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그럼에도 현재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물론 그 만큼 우리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당시 31살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분석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영민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연거푸 실패한다. 1954년 총선에서도 떨어지고, 뒤이어 강원도 인제에서도 떨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에 첫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에서 1961년 5월 14일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16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국회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된다.

지독히도 정치에 운이 없던 김대중 대통령의 초기 정치 이력은 함께 회자되는 경쟁자(나는 결코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자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는 수준이 맞아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력과도 비교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개 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하고 그리고 대개 선거에 '떨어진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토호인 부모의 든든한 후원과 정치적 후원자의 지원으로 비교적 무난하고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차이가 바로 3당 합당 당시 엇갈린 두 사람의 선택으로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드디어 국회의원 뱃지를 달게 되는 것은 1963년 6대 국회의원선거였다. 고향 목포에서 승리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 전라도에서 민주당 달고 이기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냐?'라고 하겠지만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11곳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휩쓸었다. 전라북도는 2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민주공화당이었다. 당시는 우리가 아는 그런 지역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국회에 간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만큼이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다. 특히 1964년 4월 21일에는 김준연이라는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상황에 처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무려 5시간 19분에 걸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였다.(이는 현재 한국 기네스에 올라있다.).6대 국회의원 활동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유력 야당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1967년에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김대중 대통령은 목포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건 더욱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무려 16개 지역에서 민주공화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는 당연히 박정희 정권의 관권선거가 포괄적으로 개입된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하는 쇼까지 보여주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뚫고 승리한 것이었다.

이 선거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왜냐하면 이 선거를 기점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포지션을 확고히 하게 된다. 당시 선거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흡사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 연상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나의 비원이 있습니다. 내 소원은 돈이 아닙니다. 2억도 싫고 20억도 싫고 200억도 싫습니다.


내 소원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신라 삼국통일 이래 1500년 동안 처음으로 이렇게 국토가 갈라져 있는 사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해방후 국토가 20여 년이나 분단된 이 사실이, 나는 통일이 없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평화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건설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박정권 아래에서 건설입네, 수출입네, 증산입네, 하면서 몇 사람만 잘살게, 몇 사람만 부자되게, 몇 사람만 배떼기 부르게 만들고 부익부... 재벌은 더욱 더 대재벌을 만들고 모든 국민은 헐벗은 가난뱅이요, 모든 국민은 더욱 빈익빈하게 만드는 이 특권경제를 타파하고, 내가 주장하고 우리 당책으로까지 채택된 중산층과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대중경제체제를 실현해서 나라의 혜택이 국가의 혜택이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모든 사람의 피부와 뼈끝까지 골고루 돌아갈 그러한 올바른 경제정책이 이 나라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나의 절대적인 소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몇몇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얘기하면서 '반독재 투쟁, 민주화, 민족화해-평화노선'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견제를 받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타동적인 외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60년대에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적 흐름이나 과정에서 타동적으로 묻혀가지 않았다. 스스로 길을 만들었고,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내놓았다. 그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을 쥔 세력에게는 대단한 위협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비전들을 더욱 구체화하여 1970년에 <1970년대의 비전>이라는 글을 쓴다. 그 글을 살펴보면 그의 구상이 얼마나 튼튼한 철학적 기반 위에, 얼마나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 이 글이 나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이 글을 읽는 당시 기득권 세력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위협으로 느껴졌을 지 그 심정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잠시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 나라 국민들은 적어도 헌법이념상으로는 ‘교양과 재산’을 가진 시민계급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하는 19세기의 근세 초기 민주주의의 제한된 시대에 살지 않고, 만 20세 이상의 성년이면 누구나 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20세기의 보편화된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이 나라의 기본법과 법률제도는 외관상으로 다른 어느 선진 민주제국과 비교해도 과히 손색이 없는 이념과 가치를 선언하고 있고, 또 이들 제도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1인 1표제의 원칙에 입각해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대중의 권익을 보호, 신장하는 데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현 우리 나라의 정치체제는 겉으로 드러난 상징과 제도만을 가지고 규정한다면, 데이비드 이스튼 교수가 그의 명저 『정치체계론』에서 정의한 바 ‘정치체계 속에 투입되는 모든 요구를 설정시키고 모든 결정을 유효케 하는 방법의 규제조치로서의 체제가 민주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서와 이론상에 비친 그림 속의 떡 같은 정치체제일 뿐 우리 국민대중이 지금 이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실감하는 실제의 정치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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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정치를 구가한 고대 희랍의 플라톤으로부터 오늘의 개발독재 옹호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엘리트에 의한 통치의 효율성을 믿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대중이 지배하는 정치를 혐오하고 비판했다.


#1 대중은 무식하고 학식이 없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2 대중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3 대중은 허망한 것을 약속하는 선동정객에 표를 매수당한다. #4 대중은 언제나 권위지향적이며 자조력도 발전의욕도 없다. #5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가 똑같이 1표씩 갖는 것은 불공평하다.


개발독재 옹호자들은 대중의 자치역량을 지나치게 회의하고, 지식수준의 열악함을 개탄하여 대중에 의한 지배를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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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에 대한 피상적 관찰의 산물이다.


국민대중은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개발독재 지지자들이나 엘리트 통치예찬자들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우매하지도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다.


봉건정치의 이론적 대종인 공자조차 대중을 가리켜 ‘지극히 어리석되 가히 속일 수 없는 존재’라고 갈파하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대중은 언제나 자기의 올바른 지도 세력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독재정권의 타도에 앞장섰다.

대중은 언제나 역사의 편이었으며 또한 최후의 승리자였다. 나폴레옹도 진시황도 대중 앞에서는 무참한 패자가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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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박정권의 경제건설이 외국의 반완제품을 도입 가공하는 매판적 건설이며 이것이 국부를 한없이 해외로 유출시키고 있으며 농업을 희생으로한 건설이 도시, 농촌 간의 이중구조를 극대화하고 경제기반의 파탄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그 청산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적 분업관련의 심화에 의한 내포적 공업화와 농공업간의 긴밀한 관련발전 위에 국민경제 전반의 통일성 있는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인 재생산권의 형성을 촉진하여 우리 경제의 상대적인 자급자족 체계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둘째, 공업화의 과정에 있어서는 국가는 전력 수송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투자하는 동시에 민족자본인 중소기업의 보호육성과 이의 경제적 단위에로의 발전을 위하여 관련기업간의 수평적 계열화를 적극 지원하도록 유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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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농업은 식량의 자급자족과 경제발전의 기본 여건으로서 가장 중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업의 구조는 한국농업이 지니고 있는 제조건에 비추어 자발적인 농민참여에 의한 협업농의 창설과 자주농업의 안정에 그 중점이 두어질 것이다. 이를 토대로 공업과 농업간의 분업 관련의 심화를 위해 상업적 농업의 전개가 권장될 것이다. 특히 어떠한 정책방향도 경제적 유인없이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이를 유도하는 조치가 꾸준히 취해져야 할 것이며 농업취업자와 공업취업자간의 소득 균형을 위한 적정한 농산물 가격과 이중가격제도, 가격예시 및 유지정책이 취해져야 한다.


넷째, 계층간 분배구조는 산업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에 의한 자본에 대한 약간의 간섭과 근로자의 경영참여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근로자의 경영참여는 단순히 권익확보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협력에도 큰 의의를 둔다.


근로자의 정당한 배분참여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기업체에 있어서 노동조합의 경영참여, 종업원 특수제도를 법제화할 것이다.


다섯째, 국민경제의 운용에 있어서는 혼합경제의 한국적 형인 대중경제는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추진하다. 그리고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위하여는 약간의 기간산업을 국가가 소유할 것이다. 그러나 그 범위는 한정적이고 과도적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할 것은 대중경제는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의 기능을 존중하는 대중경제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발전과 운용은 크게 격려될 것이며 그것이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공헌하는 한 결코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바이다.


여섯째, 대중경제는 재정금융세제의 운용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소수 특권층 위주를 단호히 배격하고 이미 지적한 바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 중소기업의 육성, 농업경제의 급속한 발전 위주의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 폭넓은 중산안정계층이 형성됨으로써 우리의 경제가 무한한 발전을 지향함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의 물질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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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내가 기득권 세력이라도 이건 가만히 둬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의 비전은 점점 정교해지고, 구체화 되었고, 또한 확대되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 세력은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 속에 그 분이 겪을 험난한 여정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글을 쓴 지 무려 28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비상 상태였고, 그의 '70년대 비전'은 나온지 무려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현실화 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글을 쓴 다음해, 1971년에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로 나오게 되었고, 박정희와 인상적인 한판을 벌이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김대중 대통령이 승리한 선거였지만, 온갖 관권 선거와 부정 개표로 간신히 김대중 대통령을 따돌릴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는 김대중 대통령을 죽이려 하였고, 거기서부터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살펴보면서 왜 그가 그토록 탄압받았는지,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역량은 너무나 높았기에 탄압받을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그를 이겨낼 역량까지 함께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노무현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비전이라고 생각하며, 김대중 대통령은 극복해야 할 구시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연설과 글을 보면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차이점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시대가 달랐을 뿐이고, 세련함이 달랐을 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너무 영민했으며, 너무 앞서간 인물이었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시대상황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독재자와 기득권의 공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늘 거꾸로만 돌았던 역사의 수레바퀴는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역주행을 멈추게 되었으며, 노무현 정부의 정책으로 잠시나마 역사의 온전한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기득권과 독재권력에게는 진땀나는 위험인물이었고, 거대한 역사의 역주행을 홀로 막은 거인이었으며,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바로 보여준 최초의 정치인으로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끝으로 이명박 정부에게 말하는 듯한 글이 하나 있어 인용하도록 한다. 이것은 1973년에 일본 망명 시절에 일본에서 펴낸 <행동하는 양심으로>라는 책에 있는 -경애하는 국민에게-라는 글의 첫머리 부분이다.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느냐, 또는 얼마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국민을 대했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나라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느냐,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런 정책을 실현시키기위해 노력했는가 - 즉,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봉사했는가, 그 실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가진 인물이라면 가령,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았던 기간이 비록 짧았더라도 그리고 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하며 존경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정치의 기본 이념과 신조로 삼고 있다. 나는 국민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국민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 자세를 경멸하며 또한 증오한다.


Posted by 임종금 JK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