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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18. 16:18

[취재노트]국정 역사교과서 미리보기 기타/시사2015. 11. 18. 16:18

[취재노트]국정 역사교과서 미리보기

2017년 3월부터 학교에 배포될 국정 역사교과서 내용에 대해서 우려들이 나오고 있다. 집필진부터 난항이다. 아마 역사전공자보다 경제학이나 정치학 전공자 가운데 역사를 부전공한 사람, 군 관계자 등 각양각색이 보수정권 아래서 어떤 교과서를 만들어 낼 것인가?


고대사부터 살펴보자. 사실 최몽룡 명예교수가 대표집필자로 계속 있었다면 고조선 역사는 크게 위축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삼국사기 중심주의 학자로서 위만조선 이전 고조선 역사는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가 없고, 또 일각에서 '친일, 반민족 교과서'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기 때문에 고대사를 강화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과 청동기 시작연대를 기존보다 높게 잡고, 고구려나 백제의 영역 또한 기존보다 넓게 그려 '친일, 반민족 교과서'라는 논란을 희석시키려는 '전략'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가 폄훼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야 개화파(대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하는)와 일제의 침략행위가 어느 정도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조선이 멍청했기 때문에 일제에 먹히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리를 구축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침략과 수탈을 위해 일제가 만든 근대적 시설들에 대한 기술이 많아질 것이다. 마치 '경제성장'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다. 논란이 되는 현대사에서는 전반적으로 분량이 줄어든 가운데 민주화운동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이 이룬 '성과'에 대한 분량을 조금 늘릴 것이다. 당장 큰 변화는 못 주겠지만 이후 새누리당 정권이 연장되면 현대사는 더욱 편향되게 기록될 것이다.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그토록 반대했던 '정권에 의해 재단된 역사'가 나오는 것이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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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월드컵 준비로 한창이던 2002년 1월, 중국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 이름은 설명하기도 복잡할 정도로 길다.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이를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부른다. 

동북공정은 그 길고 긴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단순한 ‘역사적 조작, 왜곡’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국의 동북지역,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시아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이 편입하려 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 동북공정은 우리의 생각 범주를 넘어 이뤄지고 있었다. 동북공정 연구 과제 가운데 3가지는 △중국동북변경과 러시아 극동지역의 정치·경제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 안정 전략 연구 △한반도의 형세 변화와 그것이 중국동북변경지역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이다. 이 주제의 목적은 보시다시피 중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의 기초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해 마련하고자 하는 중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은 무엇일까? 필자가 정치외교학이나 국제관계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도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중반에 각 신문에 실린 기사다. “소련이 붕괴하고 옛 소련지역의 정세가 불안한 틈을 타서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자립’을 할 가능성에 대해서 (러시아 연방정부가)우려하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연해주의 경제권은 고려인들이 독점한 상황이다”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중국도 비슷한 우려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한반도가 통일 국면으로 들어서면, 19세기 말부터 대규모로 유입된 조선족, 고려인들은 동요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사회 안정 전략’을 동북공정은 포함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중국의 한반도 전략을 살펴보아야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급속도로 북진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평양이 점령당하자 명나라는 부랴부랴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 일본에 의해서 조선이 강제로 개항되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개화세력들이 나타나자 청나라는 바로 군대와 원세개를 보내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낙동강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미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평양을 점령당하고 압록강 인근까지 밀리자 중국은 바로 지원군을 파견한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의 공통점은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서 어떤 전략을 폈는지 알려준다. 중국은 한반도가 중국과 다른 특정 세력에게 넘어가거나,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여지없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미 남한이 ‘미국’이라는 힘의 영향력 아래 있는 상황에서 북한마저 흔들리거나, 불안한 상황이 되면 중국은 언제든지 개입할 것이다. 

북한 핵 위기가 절정인 2005~2006년 압록강 인근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의 여러 차례 교전이 있었고, 중국은 북한을 긴장시키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여러 번 감행했다. 2005년 1월 6일 미국 내 중국 전문가 브루스 길리는 월스트리트 아시아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전 세계에 위협이 되며 인권문제도 심각하다”면서 “중국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북한을 침공해 과도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한반도의 형세 변화와 그것이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는 바로 중국의 ‘한반도 개입’에 대한 기초연구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은 ‘간도협약’이라는 일본과의 불법적인 조약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간도지역을 빼앗았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정착되고, 통일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분명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거론될 것이다. 중국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켜 이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이다. 

이렇듯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 문제에만 국한된다면 우리는 동북공정에 대해서 아무런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야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중국이 지난 5년 동안 동북공정으로 만든 역사적 결과물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해괴한 논리와 자료부족, 한민족 역사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가히 ‘대하 역사 장편소설’을 지어낸 것이다. 반면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자료와 논문들과 학문적 성과를 낳았다. 학문적으로는 중국은 남북한의 역사적 성과를 따라잡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에만 열을 올려서는 안 될 것이다. 차분히 냉철하게 판단하고, 동북공정에 숨어 있는 이면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동북공정을 통해서 국가가 의도적으로 직접 ‘역사’라는 학문적 영역에 개입한다면 어떻게 역사가 뒤틀리고, 왜곡되는지 반성하는 시선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8년 10월 22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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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고조선 고인돌, 비파형동검 출토지역과 일치

청동기문명 주도… 지배층 상징 다뉴경 분포가 증명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한국 고대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의 한 신화(神話) 학자는 지난해 말 ‘단군신화는 중국인들의 공동 조상인 황제(黃帝)집단으로부터 기원한 곰토템 신화의 일부’라는 주장을 담은 책을 통해 단군신화를 자국의 신화에 편입시켰다. 한국 학계도 이에 맞서고 있으나 고조선사의 경우 건국 시기와 영토 등 대응 논리 개발에 기본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국내 학계에서 의미 있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2005년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만든 ‘고조선사 연구회’가 연구의 첫 결실로 논문집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학연문화사)를 펴냈다. 이 연구회를 이끄는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단편적으로 이해돼 왔던 문헌사료를 정밀하게 검토했고 이를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 접목해 체계화했다”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총론 성격의 ‘고조선의 발전과정과 강역의 변동’에서 “고조선의 형성은 동북아 청동기 문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고조선의 영역을 “서쪽으로는 대릉하 유역에서 연나라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진나라와 이웃하며 동북쪽으로는 예맥, 부여, 숙신과 접했다”고 규정했다.

‘청동기를 통해 본 고조선과 주변 사회’를 쓴 이청규 영남대 교수는 청동기 문화의 분포를 통해 그 문화를 주도한 정치체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요하 유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청동 유물 가운데 지배층을 상징하는 다뉴경(多(뉴,유)鏡)의 분포에 주목했다.

이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다뉴경이 출토된 무덤은 기원전 8세기 대릉하 유역 중류에서 처음 형성돼 △기원전 5, 6세기 요하 중류 지역 △기원전 3, 4세기 압록강, 대동강 유역 △기원전 2세기경 영산강 유역으로 확대됐다. 이 교수는 “문헌 기록에서 전하는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 시기와 경로가 다뉴경 출토 무덤의 이동 경로와 맞아떨어진다”고 밝혔다.

하문식 세종대 교수는 ‘고조선 사람들이 잠든 고인돌과 동굴 무덤’에서 고인돌 분포 지역이 고조선 초기의 영토로 인식되는 공간과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또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標識) 유물인 비파형동검 분포권과도 거의 일치한다는 게 하 교수의 분석이다. 비파형동검은 중국의 중원 지역에선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하 교수는 “고인돌이 요동 쪽에만 분포한다는 사실은 공통 문화 성격을 가진 고유한 집단이 있었다는 뜻으로 고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논문집 외에도 한국 고대사를 지키려는 학계의 움직임이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우실하 항공대 교수가 이끄는 고조선 유적 답사단은 지난달 중순 요하 지역의 고대 유적지를 답사했으며 ‘요하 문명과 한반도 문명의 연계’를 부각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을 예정이다.

중국이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을 근거로 이 지역에서 발원한 모든 고대 민족을 중화 민족의 일원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단군이 황제의 후예가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도 14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동북공정 전후 중국의 한국 고대사 인식’을 주제로 갖는 학술회의에서 한국 고대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학계의 문제를 짚는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유물과 학문적 성과의 미흡 등을 이유로 고조선실을 별도로 만들지 않았으나 단군신화 내용을 포함하는 고조선실을 조만간 설치하기 위해 추진 중이다.

(동아일보 보도)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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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9. 20:08

왕검성 과거 글들/사전2008. 2. 29. 20:08

  • 왕험성, 평양이라 불리기도 한다.

왕검성의 성격

왕검성은 아래의 3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 단군왕검의 건국지: 고조선 초기 단군왕검의 정치적 근거지로서의 성격.
  • 고조선의 중심지: 단군왕검 이래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
  • 고조선의 수도: 고조선이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면서 단순한 중심지가 아니라 행정, 군사적인 수도로서 성격.

위치

현재 가장 의견이 분분한 것은 왕검성의 위치이다.

  • 고정설(왕검성은 그 위치가 고조선 내내 변하지 않았다는 설)
    • 요동 소재설: 비파형 동검의 출토 범위와 고인돌의 분포지를 근거로 하여 만주 지방 요동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 표기로 이해하고 이를 왕검성의 위치로 보는 학설이 있다. 본 역사신문에서도 요동 소재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 평양 소재설: 북한도 1980년대까지는 요동 소재설을 기본적으로 적용하다가 '단군릉' 발견이후 고조선의 성립 이후부터 줄곧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의도(주체사상의 완성을 위한)를 의심할 만하다. 다만 평양지역도 고조선 초기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설을 뒷받침 할 만한 고고학적 발굴은 많이 이루어졌다.
  • 이동설: 많은 고대사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설로서, 초중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만주지역과 요동 일대였으나, 후기에 이르러 연나라의 침공 등을 맞으면서 조금 더 안정적인 평양 인근 한반도 서북부로 중심지를 옮겼다는 설이다. 특히 이 설의 배후에는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역사적 뒷받침을 안고 있다. 그러나 본 역사신문에서는 당시의 '패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요하로 전제하고 있다.
  • 기타 학설: 왕검성이 중국 내륙에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는 요서설, 복수수도설 등이 제기된다. 다수의 재야사학계에서는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 기존학계와는 확연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역사

왕검성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고조선 형성 초기부터 중요한 정치적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의 왕검성은 한반도-만주 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단군 왕검세력)의 근거지에 불과하였다. 즉, 고조선이나 한반도-만주를 대표하는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검성은 북방과 서방에서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시 된다. 따라서 왕검성은 고조선 내에서 점점 그 위상이 높아졌으며, 왕검성 일대는 어느 순간 고조선에서 가장 발전된 지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수한 문물을 전파하는 창구의 역할도 맡게 된다.

고조선이 차차 체계적인 국가로 성장해 나가자 왕검성의 위상도 그에 맞게 점점 높아진다. 왕검성 내에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체계와 주변 부족 세력들이 몰려드는 곳이 되었다.

연나라와의 대립(기원전 3~4세기 경) 이후 왕검성은 더욱 발달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연나라의 일원화 된 체계를 보면서 고조선의 왕검성도 연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러 지역으로 연결된 교통망과 관료체계, 군사체계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곧 고조선을 일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사실상의 고조선의 수도로 기능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점점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힘이 왕검성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다 위만은 왕검성을 점령하고(기원전 194년)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변 세력의 큰 반발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왕검성의 주인=고조선의 최고 지배자'라는 것이 일반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에도 왕검성을 점령하면 곧 고조선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하여 양복의 수군은 군대가 만들어지자 곧바로 왕검성을 공격하게 된다.(기원전 109년 가을)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 답게 우수한 방어시설과 많은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서 한나라 군대는 감히 무력으로 왕검성을 점령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왕검성 내부의 분열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듯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이자, 동방(만주-한반도)의 최고 도시 답게 한나라 군대를 막아내었다.

왕검성이 붕괴한 이후, 그 지역에는 낙랑군이 설치되고, 왕검성은 낙랑군의 치소(행정중심지)가 되어, 한나라가 옛 고조선 영토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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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8. 20:58

위만 과거 글들/사전2008. 2. 28. 20:58

사기삼국지에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위만이 중국계라고 하여도 그가 고조선에 망명할 당시 상투를 틀고, 복식을 고조선식으로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과 인접한 지역에서 고조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진나라한나라의 왕권강화책에 반발하여 고조선에 망명한 중국 귀족세력이 상당히 있었다. 위만도 이 때문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연나라 왕 '노관'이 제후들과 한나라에게 공격을 받아서 연나라를 버리고 흉노로 달아나자, 위만도 당시의 혼란 속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기원전 195년.

당시 고조선준왕은 그를 신뢰하여, 위만은 중국과 인접한 고조선 서부(대릉하~북경 인근)의 공백지 방어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박사(당시의 지방장관?)라는 직위도 얻게 된다. 그 지역은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 중국의 망명인들이 많이 정착해 있던 곳이었다. 위만은 이들을 모아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으로 침공하였다.(기원전 194년) 준왕은 '진국'으로 피난을 가고, 그는 왕검성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왕검성을 장악한 이후 강력한 대외정복, 중앙관제 확립을 꾀하게 된다.

위만은 중국 사람인가?

  • 망명 당시 상투를 짜고 고조선의 옷을 입었다.
  • 당시 요서방면에는 한나라 망명인들과 고조선인들이 섞여 살았다.
  • 준왕의 신임을 쉽게 얻은 점으로 보아서 완전한 중국계는 아닐 것이다.
  • 위만정권이 무너질 당시 관직들을 보면 그 명칭이 '고조선식'이었다는 것을 볼 때, 위만정권도 고조선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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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8. 20:44

부왕 과거 글들/사전2008. 2. 28. 20:44

준왕의 아버지. 고조선의 임금. 연나라의 공격에 의해 막대한 타격을 입은 고조선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왕권이 강화되어 왕위를 아들인 준왕에게 물려줄 정도였다.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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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8. 20:41

준왕 과거 글들/사전2008. 2. 28. 20:41

고조선의 임금. 부왕의 아들이라고 알려져있다.

위만을 등용하여 고조선 서부영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기원전 194년 위만의 쿠데타로 왕검성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 남쪽 진국으로 피난하였다. 피난한 위치는 현재 아산만 인근 인천지역이라는 설과 평양 인근이라는 설로 나뉘어져있다.

진국으로 피난한 준왕은 그곳의 임금을 자칭하고, 우수한 철기문화로 진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후에 마한세력을 통합하고 '한왕'을 칭했다고 전해진다. r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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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7. 20:18

단군 왕검 과거 글들/사전2008. 2. 27. 20:18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단군왕검은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웅녀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선진 유목세력인 (청동기를 보유한) 환웅세력과 만주일대의 토착세력인 웅(곰)부족이 결합한 것으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단군왕검은 190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는 한 개인이 통치한 것이 아니라, 단군왕검과 관련된 직계(혹은 방계)가 고조선을 지배한 시간을 나타내리라 짐작된다. 혹자는 이 기간의 고조선을 '단군 조선'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단군 왕검의 '단군'은 신성한 임금이라는 종교적 의미의 지배자를 뜻하며, '왕검'은 강력한 검이라는 뜻으로 대부족장이라는 정치적 지배자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제정일치사회로 학자들은 짐작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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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완만한 발전을 거치다가 철기문화의 도입과 중국세력과의 접촉을 통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일단 철기문화의 도입은 농업생산력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무기로 활용되어 정복전쟁을 낳게 되었으며, 부족간의 통합도 가속화 하였다. 그럼으로써 기존에 느슨했던 정치적 연대는 철기로 인한 통합으로 보다 강화되었다. 이 때 8조 법금과 같은 기초적인 율령이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8조 법금은 후에 60여개의 조항으로 발전한다.)

부족간의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왕검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치세력이 성립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4세기 경으로 짐작된다. 또한 중국세력과의 접촉은 연나라와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고, 고조선은 고대국가로 발전한 연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통합과 중앙집권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때 기본적인 관직과 관등서열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왕검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치세력은 지방세력을 흡수, 통합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 고조선의 동북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초기 발전단계를 모방한 부여라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고조선의 남쪽에서도 진국이라고 통칭되는 소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한편 고조선이 성장하자 중국에서는 진나라와 한나라의 중앙집권책에 반발한 귀족들이 고조선으로 망명하게 된다. 고조선은 이들을 서부지역에 상주케하고, 중국세력과의 완충지대로 활용하려고 한다. 이들 망명세력들은 고조선에 중국의 정치·사회·경제체제를 소개하여 철기문화를 더욱 확산시키고, 선진적인 지배시스템을 고조선에 보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힘을 키워 왕검성을 급습함으로써 고조선의 정치권력을 빼앗았다.(위만조선의 건국) 물론 이들은 수 십년간 고조선의 영향력 아래 머물면서 고조선화 된 상황이었다. 과거 고조선의 지배세력이나 소국들과도 큰 마찰없이 정권을 교체하였다.

위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력은 곧 고대국가로 이행하기 위하여 왕위 세습 체계 확립, 관료체제의 운영, 군사제도의 정비, 수취제도의 정비 등을 시행하면서 고조선은 한층 더 진보된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대외원정을 시행하여 진번, 임둔 등을 복속하고 수천리에 달하는 세력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흉노와도 세력권이 맞닿을 정도로 힘이 강성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집권화는 가속화되고, 왕권도 강화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왕권과 지방을 기반으로 둔 귀족세력간의 갈등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표면화된 것은 기원전 128년 예군 남려 세력이 한나라에 투항한 것이다. 한나라는 이들을 받아들여 북경 인근에 창해군이라는 군현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창해군은 126년 폐지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의 투항이 고조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미 고조선 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면화 된 (현재까지 남아있는)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정세는 급변한다.

한나라 무제가 집권하면서 한나라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친다. 흉노를 토벌하여 서역을 개척하고, 남방을 토벌하였다. 북방을 공격하여 동호족을 몰락시킨 한나라는 기어이 고조선까지 칼날을 겨누게 된다. 한나라는 일단 섭하라는 사람을 보내 우거왕에게 '한나라에 편입하라'고 강권한다. 물론 우거왕은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 섭하라는 사람은 섭섭하게도 패수(현재 요하로 추정된)에서 자신을 배웅하던 비왕(왕이라는 칭호가 붙는 것으로 보아 왕 바로 아래의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장'을 죽였다. 아마 한나라 조정은 섭하에게 '교섭이 제대로 안 되면 전쟁을 일으킬 만한 명분을 얻어라'라고 말이 맞춰져 있었을 것이다.

분노한 우거왕은 패수를 건너 요동군을 습격하였다. 한나라는 드디어 전쟁을 벌일 명분을 얻은 것이다. 한나라는 기원전 109년 가을에 군대를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1차 침공이라고 할 수 있다. 육군은 양복이라는 장수의 지휘아래 5만 군대를, 수군은 좌장군 순체의 지휘아래 7천 군대를 이끌고 수륙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들 군대는 모두 고조선의 방어에 막히게 되었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방어가 단단하자 위산이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어 외교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전쟁 준비를 완벽하게 해서 2차 침공을 위한 시간벌이가 아닌가 싶었다. 위산과 순체는 우거왕에게 담판을 벌이자고 요구하였고, 우거왕은 태자를 보냈다. 당시 태자가 이끌고 간 군대만 해도 1만 명이 되었다고 알려진다. 고조선의 군사력은 고대국가의 그것과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는막강한 군대였다. 하지만 위산과 순체는 태자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패수를 건너라'라고 지시한다. 기가 막힌 태자는 담판을 벌이지도 않고, 왕검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위산은 교섭에 실패한 대가로 참형을 받게 되었다. 아마도 무리한 요구로 시간을 충분히 끌지 못한 것에 대한 한무제의 분노였을 것이다.

어쨌든 시간을 끈 한나라는 18만 대군으로 2차 침공을 강행한다. 2차 침공군은 고조선의 패수(현재 요하라고 짐작됨)방어선을 돌파하고 왕검성을 포위한다. 그러나 왕검성을 포위하였을 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초조해진 양복과 순체는 오히려 작전권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두 장군의 작전권을 조율하기 위해서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공손수는 순체의 말만 듣고 양복을 조선과 내통했다고 하여 체포하였다. 그러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공손수를 죽여버린다. 한나라 군대를 제대로 화합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해가 흘러 한나라가 왕검성을 포위한 지 1년이 넘었다. 한나라 군대는 많이 지쳤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때, 왕검성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거왕에 반대하는 니계상 참, 조선상 노인 등이 우거왕을 죽이고, 왕검성을 들어 통째로 한나라 군대에 바치려고 하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니계상, 조선상 등은 바로 지방에 세력을 둔 귀족으로서 상(相)이라는 직책은 대부족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거왕의 중앙집권책에 밀려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왕검성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들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고, 우거왕을 죽이고 고조선이 붕괴하면 중앙권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들이 원하는 '자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거왕이 죽어도 왕검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의 직책을 갖고 있는 '성기'라는 사람이 왕검성 사람들을 독려하여 끝까지 성을 지켰다. 그러나 한 번 균열이 간 왕검성을 끝까지 지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투항한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라는 사람과 우거왕의 아들인 '장항'이 성기를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왕검성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분열로 무너지고 말았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잔존 세력은 이후로도 1년 간 한나라 군대에 저항했으나, 결국 고조선의 주요지역은 한나라 군대에 짓밟히고 말았다.(기원전 107년) 한나라는 4군을 설치하여 고조선의 옛 영토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4군은 고조선의 모든 영토를 4등분하여 다스린 것이 아니라, 필요한 거점에만 군대와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수많은 부족·소국들에게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것은 통치비용을 줄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고조선이 붕괴되자 고조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수많은 부족들과 소국들의 방패막이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이들을 느슨하게나마 묶어주던 중앙세력이 사라졌다. 이들은 스스로 자립을 해야했다. 바야흐로 동방에 분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한 군현은 어느 특정 세력이 우위에 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교묘한 분열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동방은 각 부족, 소국들간의 치열한 경합으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대 분열기는 삼국이 정립되는 4~5세기까지 이르게 된다.

고대국가의 문턱에서 무너진 고조선. 고조선의 붕괴로 동방은 대 분열기를 겪게 된다. 이는 우리의 고대사가 손쉽고 안정적인 발전의 길이 아니라, 힘겹고 불안한 경쟁을 통해서 발전하게 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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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철희 2010.01.12 0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희왕 전쟁 대한민국 이길거야 북한가면 졌다 대한민국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