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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힘이 없는 세력이 있다. 반면에 힘이 있는 세력이 있다. 힘이 없는 세력들은 힘이 있는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힘을 모은다. 그것은 연대나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의 연대와 연합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을까? 우리 역사에서 적어도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연합은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나제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백제는 고구려에게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이 참수당했으며, 신라는 고구려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면서 신하의 나라로 자처했다. 압도적인 고구려의 국력 아래 나제동맹은 ‘고구려를 몰아내는 것’이 아닌, 그저 두 나라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나제동맹, 나당동맹은 일시적 연합일 뿐

이후 고구려의 국력이 잠시 퇴조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고,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어떤 분명한 비전이나 가치에 대한 공유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한 나제동맹은 그 한계가 분명했다. 적이 사라지자,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 멸망까지 두 나라는 근 100년이 넘도록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도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최후의 보루인 대야성마저 빼앗기자 다급해졌다.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 후방 공격을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곧바로 서로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서인과 남인의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두 세력은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연합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후 두 세력은 갈등하기 시작했고, 숙종 때는 환국정치를 통해 서로를 몰살시키기에 이른다. 

‘공동의 적’ 사라지면 또 다른 전쟁 시작 이렇게 공동의 적을 상정한 가운데 성사된 연합은 얕은 수준밖에 이르지 못한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후에는 서로 또 다른 전쟁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반면에 비전과 신념까지 공유하는 깊은 연대가 있다.

깊은 신념 공유하는 연대도 있어

대표적인 것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말 신흥무장세력과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 세력 간의 연합이다. 당시 고려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생겨난 권문세족은 고려를 좀먹고 있었고, 왜구·홍건적 등의 침공으로 국토는 피폐해졌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족들은 여전히 그 힘을 누리고 있었고, 개혁을 원하던 공민왕과 신돈을 제거했다. 당시 신진사대부의 힘만으로는 권문세족을 꺾을 수 없었다.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와 손을 잡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둘의 연합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연합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연합이었다. 그렇게 신진사대부와 이성계의 결합은 조선 왕조를 태동시켰다. 

위의 사례와는 달리 얕은 연합에서 깊은 연대로 변환한 사례가 있다. 바로 구한말 의병전쟁이다. 일제의 강점을 막기 위해 양반 위정척사파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민중들도 자체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 시대 내내 기득권과 피지배층으로 살아왔던 두 세력이 손을 잡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 두 세력의 연합은 문제가 많았다. 양반 의병장들은 민중 의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평민 출신 의병을 죽이기도 했다. 일제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일시적으로 서로를 인정해 주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두 세력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의병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1910년 이후에는 모두 공동운명체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두 세력은 만주와 연해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처음에 두 세력의 연합은 그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을 뿐이었으나, 민족해방의 신념을 공유하며, 오랜 시간 동안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깊은 동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깊은 연대가 꼭 좋은 역사적 사례만 낳은 것은 아니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90% 가까이 좌익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손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반공 이념과 좌익세력 척결이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이승만 정권을 탄생시켰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연대니 연합이니 하는 얘기가 자주 들려 온다. 과연 그것이 단순한 상황 타개를 위한 논리인지, 아니면 신념과 비전을 공유하고 먼 길을 함께 가자는 것인지 유권자들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념과 비전을 공유한 깊은 연대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우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3월 31일 자 기고글입니다. 원 제목은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18) 역사 속 연합과 연대" 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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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02 2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임종금 JKL 2014.08.03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죄송합니다. 급히 자료들을 백업한다고 글들을 올리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됐습니다. 저도 그걸 우려해 그제께부터 하루에 한 편 씩만을 올리고 있습니다. 유의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준비로 한창이던 2002년 1월, 중국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 이름은 설명하기도 복잡할 정도로 길다.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이를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부른다. 

동북공정은 그 길고 긴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단순한 ‘역사적 조작, 왜곡’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국의 동북지역,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시아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이 편입하려 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 동북공정은 우리의 생각 범주를 넘어 이뤄지고 있었다. 동북공정 연구 과제 가운데 3가지는 △중국동북변경과 러시아 극동지역의 정치·경제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 안정 전략 연구 △한반도의 형세 변화와 그것이 중국동북변경지역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이다. 이 주제의 목적은 보시다시피 중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의 기초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해 마련하고자 하는 중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은 무엇일까? 필자가 정치외교학이나 국제관계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도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중반에 각 신문에 실린 기사다. “소련이 붕괴하고 옛 소련지역의 정세가 불안한 틈을 타서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자립’을 할 가능성에 대해서 (러시아 연방정부가)우려하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연해주의 경제권은 고려인들이 독점한 상황이다”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중국도 비슷한 우려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한반도가 통일 국면으로 들어서면, 19세기 말부터 대규모로 유입된 조선족, 고려인들은 동요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사회 안정 전략’을 동북공정은 포함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중국의 한반도 전략을 살펴보아야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급속도로 북진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평양이 점령당하자 명나라는 부랴부랴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 일본에 의해서 조선이 강제로 개항되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개화세력들이 나타나자 청나라는 바로 군대와 원세개를 보내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낙동강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미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평양을 점령당하고 압록강 인근까지 밀리자 중국은 바로 지원군을 파견한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의 공통점은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서 어떤 전략을 폈는지 알려준다. 중국은 한반도가 중국과 다른 특정 세력에게 넘어가거나,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여지없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미 남한이 ‘미국’이라는 힘의 영향력 아래 있는 상황에서 북한마저 흔들리거나, 불안한 상황이 되면 중국은 언제든지 개입할 것이다. 

북한 핵 위기가 절정인 2005~2006년 압록강 인근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의 여러 차례 교전이 있었고, 중국은 북한을 긴장시키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여러 번 감행했다. 2005년 1월 6일 미국 내 중국 전문가 브루스 길리는 월스트리트 아시아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전 세계에 위협이 되며 인권문제도 심각하다”면서 “중국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북한을 침공해 과도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한반도의 형세 변화와 그것이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는 바로 중국의 ‘한반도 개입’에 대한 기초연구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은 ‘간도협약’이라는 일본과의 불법적인 조약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간도지역을 빼앗았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정착되고, 통일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분명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거론될 것이다. 중국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켜 이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이다. 

이렇듯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 문제에만 국한된다면 우리는 동북공정에 대해서 아무런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야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중국이 지난 5년 동안 동북공정으로 만든 역사적 결과물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해괴한 논리와 자료부족, 한민족 역사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가히 ‘대하 역사 장편소설’을 지어낸 것이다. 반면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자료와 논문들과 학문적 성과를 낳았다. 학문적으로는 중국은 남북한의 역사적 성과를 따라잡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에만 열을 올려서는 안 될 것이다. 차분히 냉철하게 판단하고, 동북공정에 숨어 있는 이면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동북공정을 통해서 국가가 의도적으로 직접 ‘역사’라는 학문적 영역에 개입한다면 어떻게 역사가 뒤틀리고, 왜곡되는지 반성하는 시선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8년 10월 22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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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6 23:04

나제동맹 과거 글들/사전2008.02.26 23:04

신라백제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공동대처하기 위하여 433년 나제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초기 동맹은 견고하지 못하였다. 서기 475년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 한성(서울)을 점령하고 백제 개로왕을 죽일 때까지 신라군은 겨우 백제 국경을 넘는 정도였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충청도 남부지역까지 밀려나고, 신라포항 이북까지 고구려에게 넘어가는 등 두 나라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동맹은 견고해지기 시작했다. 양국은 493년 결혼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서 같이 군대를 움직이기로 약속했다. 553년 백제 성왕신라 진흥왕은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백제는 한강유역과 경기도 일원을, 신라경북 북부와 강원도 지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과 경기도 일원을 기습, 점령함으로써 나제동맹은 깨어졌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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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5 15:08

외눈박이의 「역사」 과거 글들/시사2008.02.25 15:08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그래서 집에서도 역사책을 있는 대로 사주었고, 필자는 있는 대로 보았고, 학교에서도 있는 대로 봐주었다. 필자는 무주공산을 내딛는 천리마와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필자의 ‘역사공부’에는 몇 가지 성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첫째, 영토에 관한 ‘애정’이었다. 둘째, 군사력에 관한 ‘집착’이었다.


역사책을 보면 항상 지도가 나온다. 특히 설명이 복잡한 고대사의 경우, 자주 등장한다. 대부분 지도에서 표시된 영역이나 세력권은 비슷했다. 그런데 미세하게 보면 책마다 조금씩 다른 것을 알았다. 역사책을 있는 대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미세한 것들이었다. 필자는 책들을 모아서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 지도의 형태가 동일했다. 그런데 일부 책들의 경우에는 조금 더 넓은 경우도 있었다. 책들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서점에 가서 역사 관련 지도를 ‘수색’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의 책에서는 영역이 통상영역보다 2배 이상 넓은 것도 나왔다. 백제 영토가 중국 동해안을 휩쓸어 있는 지도도 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생각을 다만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한다.’ 라는 말이 있다. 물론 그것은 어른들에 한해서이다.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기존의 것들은 던져버리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다.


필자는 빠르게 새로운 것들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하, 이래서 영토가 이렇게 넓었고, 이런 점들이 기존 학자들은 모르고 있었구나. 아, 이들은 진실을 말해주기 위해서 얼마나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가? 아, 기성 역사학계에 막혀 이들은 이렇게 배척당하고 있구나. 아이(필자의 어린 시절)는 보수적인 학계에 분노를 터뜨리며 지도를 모았다.


군사력에 대한 집착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군사력에 대한 자료들을 또 있는대로 모아봤다. 그 중에서 아이는 수 천 명과 수 천 명이 싸운 시시껄렁한 전투는 던져버렸다. 수 만 명과 수 만 명이 싸운 전투도 재미없었다. 적어도 양국끼리 전쟁이라 함은 수십 만 명과 수십 만 명이 붙는 대규모 스펙타클한 전쟁이어야 했다. 혹은 달랑 수 천 명이 수십 만 대군을 물리친 기적 같은 전투도 아이를 자극했다. 아이는 전쟁에 동원된 군사력을 줄줄 꿰기 시작했고, 그 과정과 결과도 줄줄 외우고 다녔다. 큰 전쟁에는 사람이 많이 죽는 법, 전사한 숫자도 줄줄 외우고 다녔다.


아이는 지도와 전쟁으로 역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듣는 이의 입장에서도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재미난 것이었다. 듣는 입장에서는 사회경제사, 정치사, 문화사에 대해 들어주는 것보다는 훨씬 덜 지루한 일이었다. 잘난 척 하는 입장에서도, 잘난 척을 애써 받아주는 입장에서도 서로 윈윈 하는 내용이었다. 한 동안 어린 필자에게 역사란 ‘전쟁과 영토가 낳는’ 산물이었다.


그러면서 잊혀져간 것들이 있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 시대의 정치․사회 시스템은 어떠했는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전쟁사를 공부하다보면 약간은 그런 것을 배우기 마련이다. 아이는 ‘전쟁사’를 이해함에 있어 필요한 정도의 정치․사회․문화적 지식만 익혔다.


아이의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아이는 마치 전쟁을 하듯이 어른들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있었다면 인터넷에서 신나게 대전을 벌였겠지만, 인터넷이 없던 당시, 필자의 눈에 보이는 가장 뛰어난 역사적 지식을 가진 사람은 ‘국사 선생님’이었다. 아이는 국사교과서를 찢어버리고 당당하게 선생님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제자가 용하다 생각했는지, 아니면 귀찮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이 들통날까 두려웠는지 모르겠지만 ‘니 말이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물러서곤 했다. 아이는 이를 두고 ‘새로운 진보된 지식이 기성의 낡은 지식을 깨는’ 승리라고 자축하였다. 아이의 친구들도 미친놈처럼 책만 보는 자신들의 친구가 이상했지만, 적어도 역사실력만은 인정해주기로 하였다. 그렇게 아이는 새로운 ‘역사’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외눈박이 「역사」였다.


어떤 나라를 보면 그 나라가 최전성기를 구가한 직후, 순식간에 무너지는 나라가 있었다. 몽고 제국이 그러했고, 티무르 제국이 그러했다. 무너지는 이유는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러했다. 기초가 부실한 외눈박이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필자의 외눈박이 역사는 스스로 무너져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시사를 공부한 것이다. 고2부터 신문과 월간지들을 보면서 필자는 시사에 대한 관심을 넓혀나갔다. 시사는 우리시대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치․사회․경제․문화․관념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우리의 삶을 구축해 나간다. 아이는 시사에 나오는 우리의 삶처럼, 과거 조상들의 삶도 복원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전혀 복원할 수 없었다. 전쟁과 지도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의 무지함에 스스로 놀랐다.


영토가 넓다는 것은 그만큼 치러야 할 전쟁이 많다는 것이다. 전쟁의 규모가 클수록 대량 살육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전쟁터에 끌려가는 병사들은 처자식을 남겨두고, 자신이 가꿔야 할 땅들을 남겨주고 떠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행히 그 병사가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처자식은 굶어죽지 않았을 지, 자신의 땅은 잡초만이 무성히 자라고 있지 않을 지, 또 언제 다시 끌려갈 지, 두려운 마음으로 귀향할 것이다.


고구려 을지문덕은 수나라 대군을 막기 위해서 청야전술을 펼쳤다. 수나라 군대의 전진방향에 위치한 모든 마을을 폐허로 만드는 것이 그 전술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끌려나가고, 곡식들은 모조리 불태워지고, 곡식이 자라고 있는 땅은 모두 짓밟혔다. 심지어 집도 헐어버렸다. 수나라 군대는 식량이 떨어졌지만, 고구려 땅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고, 비가 오지만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그렇게 수나라 군대는 지쳐갔고, 고구려 군대는 지친 수나라 군대를 손쉽게 상대했다. 전쟁사에서는 을지문덕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수십, 수백 만의 백성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이 애써 키운 논밭은 폐허가 되고, 집은 사라졌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고구려 백성들도 수나라 군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땅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청야전술은 고구려의 국력을 갉아먹으면서, 백성들의 피눈물을 감수해야 하는 비상수단이었다. 돌아온 백성들의 한숨소리와 피눈물을 아이는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그 시대 사람에게 그 나라의 영토가 넓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무것도 없다. 한 평생 자신의 터전에서만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영토가 넓어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새 영토를 얻으면 그 영토는 모두 귀족들의 손에 떨어진다. 영토가 넓어지면 그 영토를 다스릴 사람이 필요하고, 더 많은 군대가 필요하다. 되레 세금만 오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도의 영토 경계선은 그저 경계선을 나타낼 따름이다. 그 경계선 안의 모습은 말하지 않는다.


외눈박이 역사는 이렇게 무너져갔다. 역사는 사람들의 삶을 토대로 구성되어야 한다. 영토니 전쟁이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필자가 외눈박이를 벗어날 무렵, 또 다른 외눈박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조선의 영토가 수천 킬로미터이다.”, “당시 이런 무기들이 조선의 승리를 가져왔다.”, “실제 조선의 영토는 중국대륙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따지기 전에 우리민족의 영토가 넓었다면 기분 좋은 것이다. 전쟁은 국운이 걸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들은 멈춘다. 왜 그럴까? 필자도 그랬고,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단 하나의 이유다. 어제와 오늘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다.


늘 외침을 받고, 손바닥 만한 한반도 언저리에서 맴돈 우리의 역사, 중국의 지도와 로마의 영역, 하물며 지금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경제력이 뒤떨어지는 몽고조차 한 때는 세계를 지배했었다. 영국은 본토가 손바닥 만했지만, 식민지는 본토의 100배도 더 되었다. 심지어 일본조차 태평양 전쟁 당시 한때 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인근 지역까지 진출했었다.


외눈박이들은 여기에 분노했다. 그래서 기를 쓰고 한 치라도 더 영토선을 넓게 긋기 위해서 문헌을 뒤적이고, 강대국에 부끄럽지 않은 군사력을 가졌다고 강조하며, 우수한 무기로 일당백으로 싸우는 조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반쪽도 못 가지고 있는 우리의 답답한 현실에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조상들의 영토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긍심은 강해지고, 현실에 대한 공격도 강해진다. 자긍심과 비난이라는 두 약물은 두뇌에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그렇게 외눈박이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 이 외눈박이들은 단순한 피해의식의 결과일까? 아니다. 근원을 따지면 성과 중심주의, 결과 중심주의 사회가 나온다. 사람들은 내용이나 과정은 늘 생략하고, 타이틀과 결과만을 보며 사물을 판단한다. 외눈박이들은 우리사회의 기준선을 그대로 따라서 역사를 본 것에 불과하다. 확실히 영토니 전쟁이니 하는 것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내 말을 안 들어줘서’ 숭례문에 불을 지른 외눈박이, 부도덕하고 무원칙해도 경제만 살리면 그만인 누군가에게 표를 준 외눈박이, 천당에 가려면 돈을 내어야 한다고 믿는 외눈박이들이 무수히 널렸다. 당신은 외눈박이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후손들은 두 눈으로 세상을 고르게 볼 것이며, 역사를 볼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은 21세기 초반의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의 국력보다는 우리의 삶, 우리의 생각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1945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외눈박이들의 역사. 이제는 끝낼 때가 오지 않았는가? 쪽팔린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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