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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8 14:17

1919년 2.8독립선언서 기타/역사2017.02.08 14:17

1919년 2월 8일은 재일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날이다. 우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만 알고 있지 2.8독립선언서 내용은 잘 모르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 보다 훨씬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강경한 내용이다. 


2·8 독립선언서(현대식으로 번역)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획득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선언하노라.

 

4천 3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의 오래된 민족 중의 하나이다. 비록 한 때 중국의 역사를 섬긴 일은 있었으나, 이것은 양국왕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한 것이었고 조선은 항상 우리 민족의 조선이고 한 번도 통일 국가를 잃고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일이 없도다.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이와 잇몸의 관계에 있음을 자각함이라 하여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 서 승인하였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도 독립을 승인할뿐더러 이를 보전하기로 약속하였다. 한국은 그 뜻에 감사하여 단단히 마음먹고 제반개혁과 국력의 충실을 도모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녕을 위협하니 일본은 한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하였다.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보전은 실로 이 동맹의 취지인지라 한국은 더욱 그 호의에 감사하여 육해군의 원조는 불가능하였으나 주권의 위엄까지 희생하여 가능한 온갖 의무를 다하여서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의 양대 목적을 추구하였다. 급기야 전쟁이 종결되고 당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중재로 러일 간의 강화회담(포츠머스 조약)이 열리게 되니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의 참가를 불허하고 러일 양국 대표자 간에 임의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안건으로 올렸으며, 일본은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는 옛약속을 위반하여 미련하고 어리석은 당시 한국 황제와 그 정부를 위협하고 속여서 “한국의 충실함이 족히 독립을 득할 만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이를 일본의 보호국을 만들었다.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세계 여러나라들과 직접 교섭할 길을 차단하여 “상당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사법, 경찰권을 빼앗았고, 다시 “징병령 실시까지라”는 조건으로 군대를 해산하며 민간의 무기를 압수하고 일본군대와 헌병경찰을 각지에 두루 배치하며 심지어 황궁의 경비까지 일본경찰을 사용하고 이렇게 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전혀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 후에, 다소 명철하다 하는 한국 황제를 쫓아내고 황태자를 옹립하고 일본의 주구로 소위 합병내각을 조직하여 비밀과 무력에 내부에서 합병조약을 체결하니 이에 우리 민족은 건국 이래 반만년에 자기를 지도하고 원조하노라 하는 우방의 군국적 야심에 희생되었도다.

 

실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행위는 사기와 폭력에서 난 것이니 실상 이렇게 위대한 사기의 성공은 세계흥망사에 특필할 인류의 대욕치욕이라 할 것이다.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에 황제와 적신(賊臣) 아닌 몇몇 대신들은 모든 반항수단을 다하였고 발표 후에도 전 국민은 맨몸으로 가능한 온갖 반항을 다였으며 사법, 경찰권을 빼앗길 때도 군대해산 시에도 그러하였고 합병을 당해서는 수중에 쇠붙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온갖 반항운동을 다하다가 정예한 일본무기에 희생이 된 자가 부지기수다. 그 후로 15년 독립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희생된 자 수십만이며 참혹한 헌병정치 아래에서 손발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면서도 일찍이 독립운동이 끊긴 적이 없나니 이로 권하여도 한일합병이 조선민족의 의사가 아님을 알지어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 아래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때에 당연히 이를 바로잡기를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오늘날 세계 개조의 주역이 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지난 날 자기들이 솔선하여 승인한 잘못이 있는 까닭으로, 이 때에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또 합병 이래 일본 조선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 시의 선언에 반하여 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계속 사용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종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적지 않이 구속하며 행정, 사법, 경찰 등 제기관이 조선민족의 인권을 침해하였다.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과 일본인 간의 우열의 차별을 말하며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인에 비하여 열등한 교육을 실시하여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인의 노예로 살게 할뿐 아니라 역사를 개조하여 우리 민족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업신여겨 소수의 사람 이외는 정부의 여러 기관과 교통, 통신, 군사시설 등 모든 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을 사용하여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생활에 지능과 경험을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니 우리는 결코 이러한 무력과 억압으로 제멋대로 처리하는 잘못된 불평등한 정치 하에서 생존과 발전을 누리기 불가능하다. 그 뿐 아니라 원래 인구가 넘치는 조선에 무제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니 대대로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해외에 유리함을 면치 못하여 국가의 모든 기관은 물론이고 사설의 모든 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채용하여 한편 조선인으로 하여금 직업을 잃어버리게 하며, 한편으로 조선인의 부를 일본으로 유출케 하고 상공업에도 일본인에게만 특수한 편익을 부여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산업적 발전과 부흥의 기회를 상실케 하였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서로 배치되며 항상 그 해를 보는 자는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생존할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마지막으로 동양 평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강대국이던 러시아는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를 건설하려던 중이며 중국도 그러하며 더욱이 이후 국제연맹이 실현되어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다. 그러할진대 한국을 합병한 최대이유가 소멸되었을 뿐더러 만일 조선민족이 무수한 혁명과 민란을 일으킨다면 일본에게 합병된 한국은 동양평화를 뒤흔들 불행의 근원이 될 것이다. 우리 미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이 어찌 동양평화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다.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우리 민족은 유구하게 고상한 문화를 지녀왔으며, 반만년 동안 국가생활의 경험을 가진 민족이다.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 아래에서 여러 해독과 불행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새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 줄을 믿는 바이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이룩할 것을 선언하노라.

 

 

<결의문>

 

1. 본단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뒤흔들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이루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강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위의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여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 해당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강화회의에 파견함. 위 위원은 앞서 파견된 우리 민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할 때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함. 

 

1919년 2월 8일

재일본 동경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Posted by 임종금 JKL

울릉도 주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업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울릉도 특산물은 바로 오징어다. 1950년 당시 울릉도 주민들은 잡은 오징어를 홍콩자유시장(당시 홍콩은 영국령)에 판매했다.


홍콩자유시장에 도착한 울릉도 오징어는 곧 중국 내륙으로 팔려 나갔다. 문제는 당시 한국전쟁 중이라는 점이었다.


1950년 10월 말, 평양이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자 중국은 한반도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가 흔히 중공군이라 부르는 중국군을 파병한다.


당시 중국군은 빨치산식 게릴라 전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게릴라 전법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규 보급 따위가 없었다. 현지에서 보급하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넘어올 때 가지고 있던 식량으로 버텨야 한다.


중국에서 넘어올 때 가지고 있던 식량, 게릴라들이 먹는 식량이다. 휴대하기 좋고, 잘 변하지 않아야 하고 먹기 편해야 하고, 일정 정도 영양가도 있어야 한다. 중국군은 가방에 말린 육포와 오징어를 한 가득 싣고 압록강을 넘어왔다.


연합군은 중국군이 가져온 오징어의 출처를 캤다. 바로 울릉도산 오징어였다. 

건조 중인 울릉도 오징어./울릉군청



울릉도산 오징어는 곧바로 수출금지령이 내려졌다. 울릉도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 일거에 사라졌다.


난감해진 울릉도 주민들, 하지만 그들에게도 버틸 구석이 있었다. 바로 울릉도의 딸린 섬 독도. 독도와 주변 바다에는 해산물이 풍부하게 난다. ‘독도에 가서 해산물을 캐서 팔자’ 울릉도 주민들은 그렇게 독도로 향했다.


그런데 독도에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미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이승만 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독도가 한국령이라고 만방에 공포했지만 그건 서류상 공지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자기 땅 처럼 독도를 드나들었다. 분개한 울릉도 주민들은 경상북도 경찰청의 지원을 받아 총기로 무장하고 독도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경찰이 민간인들에게 총기를 빌려준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지만, 당시는 전쟁 상태였다. 경찰 또한 군대 못지 않은 총기와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경찰이 준 소총, 가늠자 없는 박격포 등을 가지고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침탈한 일본인을 쫓아냈다. 놀란 일본은 순시선과 전투기 등을 동원해 울릉도 주민들을 쫓아내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일본은 당시 샌프란시스코 화의 직후로 패전국의 멍에를 짊어진 상태였다. 대놓고 군사작전을 하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일본은 외교적으로 "한국이 군대를 독도에 파견해 무력으로 점거했다"고 항의를 했지만 그리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1954년부터 독도는 완전히 우리 땅으로 기능하게 됐다. 1956년에는 울릉도 주민을 대신해서 경상북도 경찰청에서 경찰을 파견해 경비를 서고 있다. 법적으로 문제 없는 실효지배한 일상적인 우리 영토기 때문에 군대가 아니라 경찰이, 주둔이 아니라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독도 이야기에서도 보듯이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Posted by 임종금 JKL

프로그램명 : MBC경남 라디오 '좋은 아침'

진행 : 김진철 아나운서

방송시간 : 8월 24일(수) 오전 8시 39분-48분까지

전화연결 : 8월 24일(수) 오전 8시 37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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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시간이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올 3월에 출판한 ‘대한민국 악인열전’에 대한 이야기부터 했으면 합니다. 악인열전이라는 책 제목이 눈길을 끌기도 하는데요, 어떻게 책을 출판하게 되셨나요?


답: 제 고향이 경주입니다. 경주에서 경주시 내남면 주민 200명을 학살한 이협우라는 사람을 알게 됐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3선 국회의원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 대한 기사를 쓰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이걸 보고 제가 느낀 게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혼란한 틈을 타서 온갖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너무 안 알려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선별해서 기사를 쓰고 그걸 보완해서 책으로 펴내게 됐습니다.


2.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관련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작업을 할 때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요?


답: 자료가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모두 단편적인 자료가 많다 보니 내용이 서로 안 맞는 것도 있고, 자료를 다시 뒷받침할 2차 자료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신문에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기사는 나와 있지만 증언해 줄 사람도 없는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책에는 확실하게 입증 가능한 것들을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3.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근거가 남아있지만 독립유공 훈장을 받지 못한 경남의 인물이 222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역사 속에 묻혀 있었나 싶어 놀랍기도 한데요, 이 가운데 도민들에게 꼭 알려줬으면 하는 분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답: 제가 알기로 말씀하신 222명은 항일의병들 숫자만 확인한 겁니다. 1920년대 이후는 거의 반영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락된 분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제가 최근에 알게 된 분으로 진해 출신 김주석 선생이 계십니다. 1943년 불과 16살에 경성전기학교 학생들과 진해지역 친구들과 학우동인회라는 항일결사조직을 꾸렸습니다. 대담하게도 조선총독 암살을 모의했습니다. 그러다 이 조직이 들통나 친일 헌병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셨는데 당시 불과 17살입니다. 고문 받던 장면과 형무소 수형생활을 생생하게 친필 수기로 남겨놓으셨습니다. 해방 이후 미술교사로 평생 교직에 계셨습니다만 독립운동에 나선 사실은 철저히 함구하셨다가 후손들이 뒤늦게 친필 수기를 발견하면서 이런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4. 그런데 이렇게 많은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답: 2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자료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정황상 분명하다고 해도 정부에 서훈을 받으려면 ‘공식적인’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김주석 선생 가족들도 부산지방법원 당시 재판기록을 확보하지 못해 서훈 신청을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좌익이나 좌익동조자로 몰려 학살당하거나 혹은 학살당할까봐 독립운동 사실을 함구한 것도 많습니다. 여운형 선생 같은 경우도 좌익과 연루됐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못 받다가 2008년 2월 노무현 대통령 퇴임 직전에 훈장이 추서됩니다. 반면 김원봉 선생은 아예 아무런 훈장도 못 받았습니다. 


5. 지난 해 영화 ‘암살’이 흥행몰이를 하면서 밀양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김원봉 선생의 서훈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는데요,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답: 실질적인 진전은 없습니다. 밀양시의회에서 언론에는 추서를 추진한다고 했지만 어떤 조치도 안 취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나마 실질적으로 추서 운동을 하고 있는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에 문의해봤더니 추서 운동은 실제 훈장 추서를 받기 위한 노력도 있지만 이런 운동으로 김원봉 선생의 독립운동이나 밀양 사람들의 독립운동을 알려나가는 계기로 하는 측면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로 미뤄볼 때 앞으로도 추서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6. 얼마전 박근혜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광복절을 건국절로 표현해 논란을 됐습니다. 이른바 ‘건국절 논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답: 우리나라 제헌헌법에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분명히 명시했고,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에서도 당시 모두 정부수립이라고 했지 건국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행사 이름도 정부수립기념식이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이라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지만 건국절을 강조하면 역사가 분리되는 겁니다. 조선시대와 고려시대가 분리되듯이 일제시대와 정부수립 이후 역사가 완전히 분리되는 겁니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통 뉴라이트나 극우성향의 분들이 많은데 일제시대 친일 문제 이런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하시는 분들입니다. 건국을 1948년으로 못 박아 버리면 1948년 이전의 일들은 아예 떼어 놓고 별도의 역사니까 대한민국과 관련 없는 것처럼 따로 서술할 수 있게 됩니다. 정부수립 이전의 친일 문제 이런 것을 저 멀리 던져 놓을 수 있는 겁니다. 또한 건국절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국가를·대한민국을 부정한다’ 이런 식으로 이념적으로 씌우려는 정파적 의도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대한민국 악인열전이 출간된 지 한달 보름 정도 되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악인열전을 보도한 매체와 관련 서평을 남긴 이들을 총 정리해봤다.


<언론보도>

경남도민일보 보다 타 언론사의 보도가 더 빨랐다.

-경상일보 2월 29일친일·학살·고문…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8인

-민중의 소리. 3월 3일, 구자환 기자. 부끄러운 역사 드러낸 ‘대한민국 악인열전’ (SNS 1651회 공유)

-경남도민일보. 3월 4일. 박정연 기자. 우리 조카가 꼭 알아야 할 역사 <대한민국 악인열전>

-서울신문. 3월 4일. 온라인 이슈팀. 독립운동가 고문한 노덕술 다룬 ‘대한민국 악인열전’ 나와

-동양일보. 3월 9일. 박장미 기자. 부끄러운 민낯을 마주하다

-머니위크. 3월 12일. [BOOK] 돈만 모으는 여자는 위험하다 外

-강원도민일보. 3월 12일. 현대사 ‘부끄러운 민낯’ 드러내다

-충북일보. 3월 16일. 유소라 기자. 책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악인열전'

-오마이뉴스. 3월 17일. 김용만 시민기자. 있어서는 안 될 책 <대한민국 악인열전>

-기호일보. 3월 17일. 김경일 기자. 연수구의 역사Ⅰ외

-한라일보. 3월 18일. [새로나온 책] 헬로 타이베이 外

-중부매일. 송창희 기자. 3월 21일. 임종금 경남도민일보 기자, '대한민국 악인열전' 출간


<블로그>

-김주완·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사익에 충실한 사람이 성실한 이유

-보림재(정운현 선생). [서평]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악인열전>

-종을 울려라(경남도민일보 이종현 기자). 대한민국 악인열전,

-흙장난의 "책" 이야기. 우리는 왜 악인을 기록해야 하는가

-윤거일 연구소. <대한민국 악인열전>의 저자 임종금 기자의 통쾌한 북 콘서트!

-김용만의 함께 사는 세상. 대한민국 악인열전, 북 콘서트에 가다

Posted by 임종금 JKL

고향 사람 200명을 무참히 학살한 이협우

일제시대 고문기술 70%를 개발한 노덕술

민간인·부하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을 죽인 김종원

일본 국회의원이 된 깡패 출신 친일파 박춘금

안두희를 '안 의사'로 불렀던 이승만의 양자 김창룡

일제가 동상까지 세워 준 친일파 김동한

어린 학생도 고문한 악질 친일헌병 신상묵, 박종표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고, 기존 역사책에서도 거의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다.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한 사람들조차 스쳐 들은 이름일 따름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던 그들의 뿌리를 캐봤다. 역시나 일제 때부터 악질 친일 반민족 행위자였다. 상상을 뛰어넘는 그들의 가공할 만한 악행을 역사의 법정에 세운다. 우리는 그들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후세에도 전해야 한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화가 나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모든 게 상상 그 이상이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여름 누리꾼을 분노케 한 경남도민일보 뉴스펀딩 기획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이름들'을 기초로 썼다.


한국근현대사는 살육과 배반, 참혹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시대였다.

무수한 사람이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단죄 받지 않고 넘어갔다.

그 가운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8명을 역사전공 기자가 고르고 골랐다.


이들은 그냥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어린 아이도 죽였고, 자기 부하도 죽였다. 화풀이를 하거나 장난 삼아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이들은 그냥 친일을 한 것이 아니다.

일제마저 그들의 솜씨와 노력에 눈물을 흘릴 정도였고, 조선인으로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지위와 호사를 누렸다.


이들은 그냥 출세를 한 것이 아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 중용 돼 젊은 나이에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위에 올라 세상을 떨게 했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친일과 학살, 고문, 음모, 공작, 불의를 생생하게 목도하는 순간 당신은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Posted by 임종금 JKL
2015.10.05 17:20

[취재노트]늑대의 난 기타/역사2015.10.05 17:20

1907년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이후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조선인은 총을 가지지 못하게 하라'고 방침을 세웠고, 포수가 가진 총마저 압수해 버렸다. 분개한 일부 포수들은 홍범도를 따라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총을 가지지 못한 민족'은 먹이사슬에서도 강등되고 말았다. 1910년대부터 늑대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상위 포식자인 호랑이와 표범이 거의 사라지고, 사람들은 총이 없으니 늑대 무리는 민가를 식량공급원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호랑이와 표범에 물려 죽은 사람은 모두 75명이었으나, 늑대에 의해 죽은 사람은 1915년 한 해만 하더라도 113명에 달할 정도로 피해는 엄청났다. 이 또한 건성건성 집계한 것에 불과해 실제 피해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야말로 '늑대의 난'이었다. 일제는 이에 대해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급기야 1922년 6~7월 늑대 수백 마리가 부산과 동래 지역을 습격한다. 부산진 매립지에서 14살 아이를 물어가고, 초량진 수정동에서 늑대에게 뜯기고 발목만 남은 시신이 발견됐다. 서면 당감리에서는 9살 먹은 아이가 방안에서 물려갔다. 한반도 침략 전진기지인 부산지역이 늑대에게 습격당하자 그제야 일제는 자신들이 세웠던 방침을 포기하고 조선인 포수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내내 늑대에 의한 희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해방과 전쟁 이후 늑대는 크게 줄어들었고, 1975년 전북 완주군에 나타난 것을 끝으로 늑대는 사실상 멸종됐다.


'늑대의 난'은 당시 식민지 민중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였는지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건이다. 일제 도움으로 우리 민족이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임종금 출판미디어국 기자

Posted by 임종금 JKL

기자의 부모님이 증언한 한국전쟁 전후 경주시 양남면 일대 민간인 피해. 기자 부모님은 1938년생, 1940년생임. 




나: 6.25때 아버지가 알라(어린애)였습니까?




아버지: 아니지. 12살 때지. (빨치산이)방에 들어왔는데 ‘우린 알랍니다’ 이러니까 그러고(넘어가고)…그 때도 순경이 하도 서민을 괴롭혀 놓으니까니..돈 있는 놈들이 그래 싸니까네(나쁜 짓을 하니까)..그 때도 비행기가 뜨면 속으로 저기 지서(경찰서)를 폭격했으면 했다고..(한국전쟁)직전이라. 전쟁 직전인데도 워낙 사람을 (좌익)단속을 하고 죽이고 패고 그러니까.




나: 그럼 경찰들이 순경들이 사람을.




아버지: 사람을 많이… 많이… 저기 봉곡티라고 있었어. 거기 빨갱이들 죽여 놓고. 또 수렴(현 관성해수욕장) 모티 옆에 도랑이 있었는데 처박아 놓고…빨갱이 시신을.




나: 빨갱이들도 사람을 죽였지요?




아버지: 많이 죽였지.




나: 저번에 불 질러 죽였다는 데가




아버지: 상라(경주시 양남면 상라리). 18명.




나: 책에(양남면지)는 23명이라 적혀 있던데.




아버지: 23명이가? 전부 우리 외갓집 아이가. 몰살을 시켰지.




나: 아버지 보기엔 누가 많이 죽였습니까? 우익이 많이 죽였는 것 같습니까? 좌익이 많이 죽였습니까? 우리 양남에.




어머니: 국군이 많이 죽였지 마. 뺄갱이 짓 했다고. 마케(모두) 보도연맹이라고 다 죽였지.




아버지: 그때 보도연맹하고 다 죽였으니 우익이 많이 죽였지.




아버지: 석읍(양남면 석읍리)에는 전부 빨갱이 마을이라고 마을에 군인들이 왔어.




나: 경찰로 안 되니까.




아버지: 그렇지. 군인들이 와서 1개 소대가 와 가지고 소대장이 소위가 왔는데. 불로 다 지르고 다 죽이려고 왔는데. 석읍에 최한용이라고. 그 어른 되게 점잖은 어른이 있었어. 당시 부자 같으면 빨갱이 한테 맞아 죽고 했는데 워낙 점잖고 양반이니까 서민들도(도와주고) 하니까 빨갱이도 가깝고 그랬는데. 딱 보니까 동네 다 죽인다고 하니까.




아버지: 그게 석읍 옆에 빨갱이 아지트가 있었어. 그 앞에서 순경이 몇이 죽었는기라. 




나: 그럼 빨갱이를 잡아 죽여야지 석읍 사람을 다 죽입니까. 석읍 사람 안에 빨갱이가 숨어 있다고?








아버지: 그래 숨어 있다고. 그 근처는 다 질러 버리고 사람들을 다…그걸 무슨 ‘청소’라고 하노. 최한용 씨가..당시 군인들도 얼마나 배가 고프노. (최한용씨가)즈그 집에 있는 소 한마리 부터 잡았다고 하데. ‘우리는 죽더라도 군인들(밥은 주고 죽겠다)’ 그리고 소위한테 그때 돈을 엄청난 돈을 줬다. 그래서 살려줬어.




아버지: 상라는 빨갱이 한테 (우리 외갓집이)몰살을 당했기 때문에 (옆 마을인 석읍엔)일부러 군인이 그까지 왔더라. 순경들이 몇이 죽었거든.




어머니: 그땐 그 뺄갱이 말 안 들으면 죽었부제, 또 뺄갱이 말 들었다고 마케(몽땅) 다 붙잡아가 죽였부고.




나: 그러니까 빨갱이가 오면 총을 들고 오니까 말을 들어줘야 하는데, 가고 나면 빨갱이 말 들어줬다고 또 죽이고




어머니: 그래 그 지랄을 안 했나. 나는 기억나는게 (어머니 친정은 굉장히 부자였다) 뺄갱이 들이 뭐라카노 ‘조선.. 만세’ 뭐라 카고




아버지: 인민공화국 만세.




어머니: 그래. 인민공화국. 총을 다 둘러메고 마케(몽땅) 내려오니까. 그러니까 그땐 아버지…남자들은 집에 없어. 밤엔 우장(비옷) 쓰고 다 어디 갔빗고(밤엔 빨치산이 내려오니까 이미 도망을 쳐 버렸고) 엄마는 빨갱이 오는 소리를 들으니까 다 숨으로 뒤양간(외양간)에 솥갓배까리(여물을 대량으로 쌓아놓은 곳)가 있었어. 죽 세워놨는데…그 사이에 다 숨었어. 나는 미처 몰라가지고 못 숨어서 다 보니까 엄마도 없고 나 혼자 방에 있는데, 보니 오빠가 여름에 홑이불을 덮어쓰고 자고 있어. 나는 인자 가만히 앉아 있어. 보니 엄마도 없고 아무도 없고 뺄갱이는 소리를 질러쌌제, 개는 짓어쌌고 (짓다가) 총을 들고 오면 다 쪼짓겨(쫓겨) 가부렸어. 끽 소리가 없어. 개가 어디 가서 숨었는지.




아버지: 학교 갔다 오는데 우리 개를 순경이 총을 쏴가 잡아가지고 (껍데기를) 벳기고 있더라고.




어머니: 총 소리만 나면, 사향내(화약냄새)가 나면 개가 없어..숨어버리고..그래가지고 이놈의 뺄갱이가 타닥타닥 구둣소리가 마당에 들리는데 들어오더니만 우리 집이 집도 크고 옛날 사람 치고는 잘 산단 말이지(아무래도 당시엔 부자들이 우익에 가까울 가능성이 컸다). 문을 왈칵 열더니만 방에 쑥 들어오더니만..집에 요만한 아 가(아이가) 하나 앉아 있거든. 구둣막에 보니까 홑이불을 덮어쓰고 누가 자거든. (빨치산이) 남잔가 싶어서. 남자라면 다 잡아가버리거든. 서동(양남면 서동리) 사람 몇이 그날 저녁에 다 죽었어. 그래가 총을 가지고 히떡 디시니까(뒤집으니까) 보니까 아(아이)거든. (외삼촌이) 단발머리가 국민학교 들어가 (당시엔 학교서 국민학생도 머리를 짧게 깎았다) 알라니까 보더니 놔두고 가는기라. 엄마라도 있으면 다 끄직고(끌고) 갔붓다. 남자 있으면 다 죽였거든. 나는 벌벌벌 떨고 아가 완전히 새파랗게 되서…가더니 추자나무 밑을 지나면서 서동으로 내려가더만. 서동을 내려 가면서 만세 카면서 절단을(야단을) 지기데. 그제서야 엄마가 와서..아 라니 안 죽이고, 오빠도 머리 깎고 학생 아 라니 놔뒀고..그땐 처자(처녀)가 있어도 끌고 갔거든.




아버지: 6.25사변 며칠 있다가 알았는데. 시우라고 있는데 풀 베러 갔다가 시우가 며칠 있다가 “전쟁 났단다”고 하데. 그러고 피난오고 절단이 났지.




어머니: 그래가 그날 저녁에 서동에 내려가서(어머니 방을 습격한 빨치산 무리들이) 서동 첫 집에 잘 사는 집이었는데




나: 서동에 옛날에 잘 사는 사람이 많았죠?




어머니: 옛날에 왜정(일제시대) 시절에 마케(모두) 오얏곳데 짓을 했지. (빨치산이)서동 첫 집에 가서 바로 첫 집에 가서 총살을 시켰지..(빨치산이) 내려온 걸 몰랐지. 서동에 똑똑은 사람들 많았어(일제시대에 공부를 한 사람이 많았다. 살 만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다 숨었비고. 못 죽이고. 그때 서동 이**씨 아바씨(아버지)가 미처 모르고 있었나봐. 그래 이**씨 아바씨 그 자리에서 총살을 해서 죽였부고..둘이 죽였부고..진짜 똑똑은 사람들은 다 숨었비고.




아버지: (서동 사람들은)정치인들이야. 재산 모으고.




어머니: 그래가지고 둘이 죽였부고 그래가 서동에 이씨들이 (쇠락했다). 왜정 시절에 오얏곳데 짓을 하던 (서동에) 영감씨는 (빨치산이)직살을(그 자리에 총살)을 시켰나.




나: 오얏곳데 짓이 왜놈 앞잡이 짓을 말하는 겁니꺼




아버지: 그렇지. 그때 사람들 머릿속엔 전부 좌익이었어. 다 백여(배어) 있었는데 워낙 이승만이가 단속을 하고 죽이고 하니까..겁이 나니까..지금 김정은이 처럼 공포의 정치를 했어. 공포정치를 했는데..아~~ 이 바로 앞에 와서 사람 많이 패디(경찰이 패더라).




나: 패서 죽였습니까?




아버지: 거의 죽도록 팼지.




어머니: 박** 즈그 아버지는 그래 패도 안 죽데? 박** 즈그 어머니도 와~ 개패듯이.




나: 와 팼는교?




어머니: 빨갱이 밥 해줬다고. 박** 즈그 아버지도 개패듯이 맞았나




아버지: 나는 떨면서 봤는데.




어머니: 옛날 그 말만 하면 몸셀정 난다(몸서리쳐진다). 내내 밤에 잠을 잘 수가 있나.




나: 보도연맹으로 양남면 사람 몇 명이나 끌려갔어요? 50명 끌려갔어요?




아버지: 더 많이. 많다.




나: 100명은 됩니까? 양남 사람 하고 강동(울산시 북구 강동면) 사람하고, 신명(울산시 북구 신명동)사람들 하고, 모으면 100명 넘게 되겠네요. (보도연맹으로)총살은 자리는 그대로 있죠?




아버지: 아직 있지.




나: 보도연맹으로 아버지 아는 사람 중에 누가 누가 끌려갔어요?




아버지: 모르지. 오래 돼 가지고.




어머니: 상계(양남면 상계리. 기자의 본가고 고향이다) 여기는 하나도 안 끌려갔다. 우리 작은 아버지가 똑똑아가(똑똑해서).. 왜정시절에 이장 했는데 똑똑아가..전부 다..




나: (보도연맹, 검속자료에서 상계리 주민) 이름을 다 팠붓다(파기해) 아닙니까.




아버지: 그래.




어머니: 그래 다 불에 태웠붓다. 문서 장부에 있는 걸 작은 아버지가 줄라고 해 가지고 다 불에 태웠붓다. 안 그랬으면 서* 영감씨 1등, 저 건네 최**..다 진짜배기 빨갱이 아니가.




아버지: 진짜배기 빨갱이지.




어머니: 그래니(문서를 다 태워서 목숨을 건졌다) 최**는 (어머니 작은 아버지 덕분에 산) 공을 알아가, 저놈의 서* 영감씨는 배은망덕하고 공을 모르더라고. 다른 동네는 다 (보도연맹, 검속자료 명부에 있는 사람은) 죽었비고, 다 보도연맹 끌려가 죽었는데 여기 상계는 우리 작은 아버지가 이장이라서 똑똑아가 하나도 안 죽었다. 작은 아버지는 왜정시절에 날렸다.




아버지: 우리 집안에 억만이라고 있어. 빨갱이로 나갔어.




나: 이름이 임억만 입니까?




아버지: 임억만이지. 빨갱이로 나 가지고 다른 데로 안 가고 요리로 양남으로 돌아 다니고. 그래가 우리 집이 초가집이 있었는데, 기호댁이라고 거기 억만이가 있었는데, (경찰이 그 집에)불로 질러가지고, 불이 번져서 우리 집에도 불티(불똥)이 날라와가지고.




나: 불은 누가 질렀습니까?




아버지: 순사들 경찰이 와가 (불을 질렀지)..그래가 ‘불이야’ 하면서 니 할배가 고함을 지르며 지붕 위로 올라가 물을 (끼얹고) 하니까. 순사들이 내려오라고 말야. "이 동네는 다 불 질러도 괜찮다. 다 탔부야 한다고(상계리 안에 임씨 집안 집성촌이 있음)”. 내려오라고 해도 너그 할배가 안 내려오데.




나: 순사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네요.




아버지: 많이 했지.




어머니: 그래도 상계 여기는 대우가 좋고, 두드려 패지도 않고 그래가지고 진짜배기 뺄갱이가 있어도 동네가 괜찮았다고. 왜냐하면 우리 작은 아버지가 똑똑아 놓으니 그 동네(상계리는)는 못하게 하라고.



Posted by 임종금 JK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