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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아버지가 출마한 제1기 지방선거부터 나는 지방선거와 인연이 많았다. 아버지 선거는 당연하고, 2002년에는 민주노동당 후보들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2010년 김두관 도지사 후보 캠프에서 온라인 팀장을 하기도 했다. 이후 기자로써 지방선거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선거 보다 지방선거가 나는 익숙하고 편하다. 최근 경남지역 시사블로거들과 함께 내년 지방선거 출마가 확실시되는 공민배 전 창원시장, 전수식 전 마산부시장, 허성무 전 경남정무부지사와 간담회를 했다. 


말이 간담회지 근 2시간 넘도록 온갖 질문이 쏟아지는 자리였다. 간담회 내용은 누가 잘했다 못했다 현직 기자인 내가 평가하긴 어렵다. 다만 이제 지방선거는 어떤 선거인가 '실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서 글을 쓴다. (이는 경남/경북 선거 경험에서 기초한 글이라, 수도권이나 대도시 선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민배 전 창원시장. 사진 순서는 간담회 순서.



1. 이제 프로 선거꾼 시대


지방선거도 이제 1991년, 1995년, 1998년, 2002년, 2006년, 2010년, 2014년을 거쳐 2018년이면 무려 8번이나 치렀다. 


이제 8번이면 사람들의 노하우도 충분히 쌓일 때다. 사실 다른 선거 보다 지방선거는 뭔가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났다. 대통령 선거야 최고 전문가들이 하는 거고, 국회의원 선거도 정부 수립 이후부터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방법이나 노하우, 표 계산 등이 정교해질 대로 정교해졌다. 사실 전국에서 비례대표 빼면 250명 정도 밖에 안 뽑는 선거니 아마추어들이 끼일 자리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방선거는 워낙 선출 인원이 많기 때문에 아마추어 브로커·참모들도 어째 요행으로 끼어들 여지가 있었다. 그렇게 선거에 맛을 들인 아마추어들도 여러 번 하다보니 이제 프로가 됐다는 말이다.  이번이 처음인 선거 신참과 여러 번 구른 프로 선거꾼 사이 격차는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 


전수식 전 마산부시장.



2. 사람 구하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후보자는 프로 선거꾼을 빨리 포섭해야 한다. 이미 선거판에서 어느 정도 평판이나 검증이 된 프로 선거꾼은 누구나 데려가려고 한다. 또 프로 선거꾼은 여러 선거에 걸치지 않는다. 한 선거에 집중한다. 여러 선거에 기웃대는 사람은 진심을 다하기 어렵고, 자기 이익 계산부터 한다. 그런 이들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늘어 놓지만 실효성이 없고, 되레 선거 조직에 위해가 된다. 


이런 점을 알기 때문에 눈치 빠른 후보는 빨리 움직였고, 지금 프로 선거꾼 가운데 70~80%는 뛸 곳을 결정한 듯 보였다. 아직 선택하지 않은 20~30%는 여러 곳에서 콜을 받고 있거나 혹은 다른 이와 '전공'이 중복되거나 아니면 과거 선거에서 손발이 안 맞은 뭔가가 걸려서 선택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들도 연말 전에 갈 곳을 정할 것이다. 따라서 2018년이 지나서 선거 준비를 한다는 것은 이미 늦은 셈이다. 물론 자신이 엄청난 인지도와 영향력을 갖췄다면 프로 선거꾼들을 흡수할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경남에서 그 정도 힘을 갖춘 사람은 별로 없다. 


허성무 전 경남 정무부지사.



그러면 이런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도지사의 경우 아직 누가 나올지 불투명한데 너무 섣부르게 단정짓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당에서 선거를 치러준다고 하더라도 후보로 나설 마음이 1%라도 있으면 이미 움직임이 있다. 후보로 나설 사람은 서울에서 딴청 피우고 있지만, 이미 지역에서는 혹시 만일을 생각해서라도 사람을 모을 수밖에 없다. 이런 움직임이 전혀 없는 사람은 내년 선거에 안 나선다고 봐도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딱 한 사람, 프로가 옆에 있든 없든 선거를 자체적으로 치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김경수 의원. 이 사람은 최소한의 보좌진만 데리고 그냥 열심히 돌아다니기만 해도 기본적으로 40% 이상은 득표 가능한 사람이다. 


3. 극단적인 변수는 갈수록 적어진다


모든 게 연결되는 이야기다. 선거꾼들도, 심지어 유권자들도 이제 프로다. 누가 되고 안 되고 짐작할 수 있다. 고로 승산없는 사람이 득표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앞으로 지방선거 가운데 대규모 선거(도지사, 교육감, 창원시장) 출마자가 천천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무슨 '진보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미래를 보기 위해 이름 알리기' 식의 출마를 하기에는 대규모 선거의 경우 소모되는 비용이 너무 크다. 그리고 뭔가 이색적인 것을 내세워도 유권자들이 그거 하나만 보고 동하진 않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단일화 해 주고 도의원이나 시의원 하나라도 더 보장 받는 것이' 실질적으로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정당들도 알 것이다. 

민주당에서 만든 허성무 전 경남 정무부지사 홍보물. 소주병에 붙여서 감쪽같이 만들었다. 최근 경남에서 민주당 선거역량은 놀랍도록 성장했다.



고로 대규모 선거의 경우 본선에서 2~3명의 싸움으로 승부가 날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개인 경험으로 비춰봐서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 뭘까?  


4. 지방선거에서 유의해야 할 점


-중요한 공약이나 '패'는 지금 오픈하지 마라. 주목 받기도 힘들 뿐더러 상대를 편하게 해 준다. '아 저쪽은 저게 핵심이네, 그럼 여기서는 이렇게 받아치지' 상대에게 너무 편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 내년 3월, 혹은 4월이 지나서 오픈해도 된다. 

-출마/불출마 여부도 최대한 늦게 말해야 한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리가 됐다고 하더라도 상대편은 누가 출마하고 누가 출마하지 않는다고 알면 대응하기가 편해진다. 지방선거는 선출자들도 많고 복잡한 선거다. 상대를 편하게 해줄 이유가 없다. 

-각 분야별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참모들도 SNS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속 보이게 후보 알리는 데에 집착하면 친구들이 떨어져 나간다. 지금은 편하게 친구 맺는 데 집중하고, 내년 3월 이후에 '본색'을 드러내야 한다. 

-돈 관리는 직접(혹은 최측근이거나 가족) 해야 사고가 안 생긴다.

-지역조직에서 책임자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선거를 하다 명함을 막 파주다 보면 옥상옥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분명 분란이 생긴다.

-업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장기 목표, 중기 목표, 일별 목표를 세워 놓고 매일 진전도를 보고 해야 한다. 

-대학생들을 사귀어야 한다. 나중에 필요할 때가 분명 생긴다. 

-아줌마들 한 무리 정도는 확실하게 포섭해야 한다. 역시 나중에 필요할 일이 분명 생긴다. 

-지역 토호들은 과거 보다 영향력이 약하다. 그들에게 휘둘릴 필요 없다. 뭉치표 갖고 온다는 보장이 없다.

-동창회 명부, 동문 명부 등을 가져오면서 생색을 내는 사람이 있다. 사실 구하는 건 어렵지 않고, 또 그 사람은 여러 곳을 돌면서 이미 명부를 뿌렸을 것이다. 이 캠프 저 캠프 기웃대는 사람은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

-선거 구호, 정책, 비전 등은 반드시 주변 '일반'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 지 알 수 있다. 캠프 속 여론에 매몰되어서 결정하면 안 된다.

-봉투를 주지 말아라. 불법일 뿐더러, 이제 시골에서도 갈수록 돈의 위력이 안 통한다. 시골에서 출마했다면 차라리 '저는 돈을 한 푼도 안 쓰겠습니다. 제가 지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돈 선거는 여기서 끝을 봐야 합니다'라고 전략을 세우는 게 나을 수 있다. 우리 아버지가 상대 50억 쓸 때, 어설프게 10억 쓰다가 물량에서 밀렸다. 위에 얘기한 대로 아버지가 했다면 이겼을 것이다.

-공보물 기획·인쇄처를 미리 정해놔야 한다. 공보물 수요가 더 많아질 것이고, 나중에 급할 땐 밀려서 선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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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1. 19:29

글쓰기 기초 '간단하게 써라' 기타/시사2017. 9. 1. 19:29

저도 문장력이 참 떨어지는 기자 중 한 사람입니다. 볼 때 마다 어색한 부분이 자주 나옵니다.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글도 수 차례 수정을 하곤 합니다. 저의 문제를 알아본 김주완 이사가 권하는 글쓰기 기초입니다. 기자가 아니더라도 글쓰기로 애먹는 분은 참고하길 바랍니다.



-기사를 쓸 때에는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는지를 항상 확인하라. 

-초등학생 정도가 읽고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쓰도록 노력하라. 

-한 문장에는 가급적 하나의 의미만 담아라.

-내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은 아예 쓰지 마라. 모르는 용어도 쓰지 마라. 

-단어 앞에 들어가는 수식어는 하나 이상 넘어가면 안 된다. 

-컴퓨터 상에서 문장의 길이가 두 줄을 넘어가면 길다. 가급적 두 문장으로 나눠 써라. 

-다 쓴 후에는 반드시 읽어보고 중복되거나 호흡이 막히는 데가 있으면 고쳐 써라. 


이걸 인쇄해서 어딘가에 붙여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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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40대 이상에게 1987년 태풍 ‘셀마’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6.29선언과 민주화, 곧이어 시작된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1987년. 7월 15일과 16일에 걸쳐 한반도는 태풍 셀마의 내습을 받았다. 이로 인해 무려 345명이 숨지거나 실종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345명의 인명피해는 해방 이후 역대 3위(1959년 사라 849명, 1972년 베티 550명)에 해당되는 큰 피해였다. 


먼저 태풍 셀마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 


태풍 셀마 최전성기 사진(필리핀 동쪽 해상).






태풍 셀마는 1987년 5번째 태풍으로 괌 인근에서 발생했다. 이어 필리핀 동쪽해상에 도착했을 때 중심기압 911헥토파스칼, 중심최대풍속(1분) 초속 65미터에 달하는 매우 강한 태풍으로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태풍 셀마의 압권은 바로 태풍의 크기(영향권)이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초속 15미터 이상 강풍이 부는 범위가 무려 1850킬로미터에 이른다. 한반도 4~5개가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간다는 소리다. 최근 5년새 영향권 1800킬로는 고사하고 아예 1000킬로미터가 넘는 태풍이 거의 없을 정도로 셀마는 엄청난 영향권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건 필리핀 동쪽 해상에 있을 때고, 아시다시피 태풍은 올라오면서 점차 힘이 약해진다. 태풍 셀마는 전남 고흥반도 부근에 상륙하게 되는데 당시 중심기압이 970헥토파스칼, 중심최대 풍속은 40미터 정도로 상당한 힘을 자랑했지만 ‘역대급’은 아니었다. 참고로 태풍 사라나 태풍 매미 등은 중심기압 950헥토파스칼, 최대풍속 5~60미터를 곳곳에서 기록할 정도였다. 강우량도 산청 296미리를 최고로 강릉 270미리, 남해군 265미리 등 200미리 이상을 기록했다. 강우량도 적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2002년 태풍 루사(강릉에 870미리), 1991년 태풍 글래디스(부산~울산에 500미리 이상) 퍼부은 것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자,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사실 바람이나 강우량 모두 역대급은 아닌 태풍이다. 그런데 왜 역대급 피해를 봤던 것일까? 


기상청(당시는 중앙기상대)은 태풍 셀마가 북상할 때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고 대한해협, 특히 대마도 인근으로 빠져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일본이나 미 해군 기상대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상륙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기상청은 대마도로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고집스레 예보했고, 이로 인해 어선들이 대피하지 못했다.


7월 15일 태풍이 제주도 인근까지 올라왔지만 예상 진로는 여전히 대마도로 빠져 나갈 것이라고 고집했다. 매일경제 1987년 7월 15일 자 보도.



사실 초대형 태풍도 아닌 중형 태풍이 대마도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예보하면 당연히 경남 서부~호남지역 어민들은 ‘우리는 큰 피해 없겠네’라고 마음을 놓게 된다. 


그 결과 345명 인명 피해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대피하지 않은 어선 어부들이었다. 또한 산업현장, 항구에서 넋 놓고 있다가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었다. 


더 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기상청에서는 태풍 셀마가 분명히 고흥반도를 지나 한반도 남부내륙을 통과해 동해상으로 빠져 나간 것을 알고도 ‘책임 회피’를 위해 자신들이 예상했던 진로대로 대한해협을 통과해 나갔다고 거짓 보도자료를 냈다. 약간 수정된 것이 있다면 대마도가 아니라 부산 앞바다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1987년 7월 17일. 동아일보가 태풍 셀마 진로에 대해 처음으로 의혹을 제기했다. 재밌는 건 진로도 맨 왼쪽 기상대가 발표한 경로다. 자신의 오류를 막기 위해 (대한해협으로 빠져 나갔다는 것) 최대한 부산 앞바다에 스쳐 지나간 것으로 발표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7월 17일 1면 기사에서 일본 기상청 진로도를 참조해 ‘예상진로가 틀린 게 아니냐’는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하지만 기상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7월 22일 민주당은 자체 조사를 통해 책임회피를 위한 자료조작 행위가 있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상청은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후 노동자 대투쟁, 대통령 선거 국면, 또 다시 이어진 태풍과 폭우로 이 사실은 어물쩍 넘어가는 듯 했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88년 1월, 기상청이 발행하는 <기상월보> 에 태풍 셀마 진로가 슬그머니 고흥반도를 지나 남부내륙을 통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 동아일보 기자에게 들켰고, 이로 인해 기상청 고위 관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게 된다.


기상청이 애초에 태풍 예보를 제대로 했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인명피해. 그리고 자신의 오보를 숨기기 위한 진로조작. 태풍 셀마 진로조작 사건은 기상청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진상을 밝혀낸 것은 동아일보의 공이 컸다. 언론 역시 공공기관의 자료를 받아쓰기만 할 게 아니라 항상 의심을 품어야 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다시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붉은 선이 당시 기상청 예상 경로다. 태풍 진행 경로보다 약 300킬로미터 이상 오차가 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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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한때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진영의 '국제주의'는 아름다웠다.


비록 내 나라, 내 민족의 일이 아니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그들의 결기는 찬란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수만 명에 달하는 유럽 좌파들이 스페인 공화국군을 돕다가 죽었다. 


일제시대 때에 중국 공산당과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공적인 일제에 맞서 싸웠고, 심지어 일본인 가운데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남몰래 독립운동을 지원해줬다. 비록 자기는 일본인이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조선인과 중국인을 돕는 이들이 (지금은 일부 사례만 남아 있지만)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쿠바 혁명의 주역 체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쿠바 혁명에 참가한 후 쿠바국립은행장을 하다 볼리비아 사회주의 게릴라들을 돕다 죽는다. 아프리카에서도 이 같은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들의 국제주의와 연대를 상징하는 노래가 바로 인터내셔널가다. 현재 최소 50개 언어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가사도 내용도 약간씩 다르다고 한다. 

인터내셔널가를 상징하는 이미지



그런데 나는 유독 민중가요 가운데 인터내셔널가는 참 귀에 꽂히지 않았다. 리듬이 문제가 아니라 가사가 참 귀에 안 들어왔다.


지금 가장 많이 불려지고 있는 인터내셔널가 한국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 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

참, 뭐랄까. 딱딱하고 경직된 단어들이 한없이 늘어져 있다. 운동권 선전물에서 자주 쓰던 단어들의 결집체라고 할까? 초등학교 교가 느낌? 군가 느낌이라고 할까? 뭔가 정이 안 가는 가사였다. 


나는 그냥 원래 인터내셔널가는 이런 줄 알고 넘어갔다. 


최근 갑자기 인터내셔널가가 생각났다. 유튜브에 검색해 보니 다양한 나라의 인터내셔널가가 번역돼 있었다. 그러다 인터내셔널가의 '본가'라고 할 수 있는(원래는 프랑스 파리 코뮌이 원조지만) 소련의 1978년 당대회 당시 부른 인터내셔널가가 있다. 그걸 번역한 영상이 있었다. 


===

일어나라, 저주받은 낙인이 찍힌, 전 세계의 굶주린 이들과 노예들이여

격분한 우리의 정신이 끓어올라 생사를 건 투쟁으로 인도할 각오가 되었노라

전 세계의 강압을 우리는 파괴하리라.

그 후에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리라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 세상 전부가 되리라

이는 우리 최후의 그리고 결정적인 쟁투이니

인터내셔널과 함께 인류는 일어나리라

===


한국어 인터내셔널가와 소련 인터내셔널가는 비슷한 것 같지만 내용이 참 다르다. 


먼저 한국어 인터내셔널가는 '노동자'라는 단어로 '우리'의 범주를 한정해 버렸다.  반면 소련 인터내셔널가는 '저주 받은 낙인이 찍힌 전 세계의 모든 굶주린 이들과 노예들'로 최대한 폭을 확장했다.


한국어 인터내셔널가는 '세계'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등장하지만 그건 전 세계를 의미하기 보다는 한국 안에서의 새 세계를 만든다는 개념에 가깝다. 하지만 소련 인터내셔널가는 '전 세계·인류'를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어느 가사가 인터내셔널가의 정신에 맞다고 보는가? 나는 후자가 맞다고 본다. 


또한 소련의 인터내셔널가에는 명문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 세상 전부가 되리라'. 굶주린 노예 상태인 민중은 하루살이 피지배층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이 일어나서 세상을 뒤집으면 세상 전체가 민중의 것이 된다는 뜻이다. 


이 세상 모든 운동가들은 이 긴 설명을 어떻게 쉽게 알기 쉽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리한 것은 찾기 쉽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 세상 전부가 되리라


번역이 어렵게 됐고, 이 가사대로 부를 순 없지만, 소련의 인터내셔널가는 한국어 인터내셔널가와 달리 기억에 바로 남았다. 


내가 운동권 인사를 많이 보진 못했지만, 운동권 사람들은 운동권만 보면서 투쟁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쉽고 편하고 접점이 생기도록 하는 노력보다는 '이만하면 알아듣겠지' 싶은 선전과 구호가 많았다. 물론 옆에 있는 운동권이야 바로 알아듣겠지만 대중들은 '아니 도대체 같은 한국말인데 저쪽 말은 왜 저렇게 이상하고 어색하지?' 하는 느낌이 끊임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 당 대회 모습도 잘 살펴보면 보면 젊은 사람들도 많고, 옷차림도 각양각색이다. 물론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앞 줄에 양복입은 사람 몇몇과 군복 입은 몇몇이겠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다는 시늉이라도 보이려 한 듯 하다. 우리가 생각한 사회주의 국가(북한, 중국)의 국가행사 때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튼 운동권의 시대는 막이 내렸다고 하지만, 운동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쉽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노력 또한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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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모니 2017.08.01 1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국공산당이 민생당 사건으로 만주 한국인 수만명 도살하고 쏘련공산당이 고려인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면서 수십만 도살한게 일제 군함도 만행보다 더 야만적이지만 그냥 잊고 삽시다. 공산당 하면 우리의 친구 아니오??

    • 임종금 JKL 2017.08.01 15: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뿐입니까? 자유시 참변으로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죽었고, 상처를 입고 갈라졌습니까? 게다가 민생단 사건 말고도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 민족갈등으로 참사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런 문제는 제가 따로 또 다루겠습니다.

      헌데 그런 것을 다 쳐도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반에 반도 못 미칠 뿐더러, 어쨌든 일제에 맞선다는 공동목표를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게 훨씬 많습니다.

나는 1988년 초등학교에 갔고, 200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갔다. 

전교조는 1989년 불법화 됐으며, 1999년 합법화됐다. 나는 학창시절 대부분 전교조가 불법이던 시절을 관통했다. 


따라서 전교조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 어느 교사도 '내가 전교조'라고 말하는 교사는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전교조 교사는 아무래도 표가 났다. 


기억1


1994년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사회 선생님이 운영하는 역사 동아리에 들어갔다. 1994년 4월 말쯤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두꺼운 사진책 하나를 들고 오셨다. 더러는 흑백사진도 있었고, 더러는 컬러사진도 있는 책이었다. 끔찍한 시신 모습이 한 쪽에 하나씩 실려 있었다. 시신 중에 형체가 온전한 것은 소수였고, 나머지는 도대체 몸 어디가 어딘지 알아보기 힘든 시신이 많았다. 헌데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시골에서 개나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장면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 사진으로 본 시신 사진은 의외로 무섭지 않았다. 


다만 도대체 이게 뭘까 싶었다. 사회 선생님은 '이게 바로 광주에서 전두환에게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시사 잡지(신동아)를 계속 봐왔기 때문에 바로 '아하' 싶었다.


당시에는 사교육이 없었고 사회시험, 특히 중학교 1학년 과정에는 세계사가 많았다. 세계사는 범위도 넓었고, 외울 게 많았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면 나를 포함해 한 반에 80점 넘는 사람이 서너 명에 불과했다. 반 평균이 40~50점 정도 됐을 거다. 이 선생님은 점수 낮은 친구들을 체벌했다. 물론 아주 심하게 체벌하지는 않았다. 이어 80점 넘는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각자 3대씩 맞았다. 아니 왜? 


"니들은 친구들을 좀 가르치고 물어보면 얘기도 해주고 그랬어야지. 니들만 점수 잘 받으면 그만이냐?"


내 평생 점수 높게 받았다고 맞아 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기억2. 


1997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모교는 울산시내에서 학성고-울산고 다음으로 넘버 3~4를 치열하게 다투던 중이었다. 서울까지 포함해서 전국 최초로 수능모의고사 만점이 나오고 지방에서 서울대에 거의 100명 가까이 보내는 학성고, 학성고에 아깝게 들어가지 못한 울산고 학생들은 감히 상대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그 다음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신입생이 되자마자 바로 밤 10시 혹은 10시 30분까지 야간강제학습을 했다. 단체기합도 많이 받았다. 선생들한테 많이 맞았다. 내 평생 가장 많이 맞아본 시기였다. 


1997년 겨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당선된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교장 정년을 대폭 줄여 버렸다. 65세에서 62세 정도로 줄여 버린 것으로 기억한다. 1998년 여름 우리 학교 교장도 졸지에 백수가 되고, 대신 비교적 젊은 교장이 승진했다. 


이 교장은 앞선 교장과는 달랐다. 만약 교내에서 쓰레기를 보면 앞선 교장은 "어이, 이것 좀 주워라"고 시킬 사람이었다. 한데 새 교장은 학생이 있어도 자기가 직접 쓰레기를 줍고 다녔다. 학교에 굴러다니던 쓰레기가 줄어들었다. 교장이 하도 열심히 줍고 다녀서 그랬는지 아니면 교장이 줍고 다니니 학생들이 덜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교내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는 줄었다. 2학년이 됐는데 야간강제학습이 되레 줄어 밤 9시 30분에 마쳤다. 체벌과 단체기합이 사라졌다. 고2~고3때 다 합쳐도 5대도 안 맞았던 것 같다. 


우리 반에 공부를 제법 했지만 미용사가 꿈인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서 미용사 자격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만화에 환장한 친구들이 있었다. 동아리를 만들고 예체능 계열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학교 복도에 신문 가판대가 생겼고, 비교적 중도적인 한국일보를 보도록 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학교는 감옥에서 생동감 있는 곳이 됐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적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울대-연고대 가는 친구들은 작년이나 올해나 몇 명 뿐이었다. 이사장은 서울대-연고대 카운터가 중요할 따름이었다. 


전교조 느낌의 선생들은 사회/국어/과학계열에 많았다. 박사학위를 가진 국어 선생님은 그 유명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려줬다. 중국음식 먹고 독립선언서 지들끼리 낭독하고 일제에 자수해서 아무 저항도 없이 끌려갔다. 보다 못한 한용운이 부칙 3조를 넣어서 그나마 저항의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을 나는 1998년에 알았다. 


사회 선생님은 예시를 주면서 시민단체 발족 선언문을 써보라고 하기도 했다. 박정희 경제성장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배웠다. 1998년 당시 중국이 얼마나 무섭게 성장할 것인지 얘기해줬다. 중국이 일본이나 러시아 보다 더 세질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학생들은 믿지 않았다.


그렇게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전교조는 합법화 됐지만, 어느 선생님도 '내가 전교조 교사요'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저 파편적인 기억으로 '저 선생님이 전교조였을거다' 짐작만 할 따름이다. 


내가 짐작한 전교조 교사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철학적이거나 어려운 질문을 자주 던진다. 예를 들어 왜 지금 우리가 6공화국이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무슨 뜻인데? 국가가 잘 사는 것과 국민이 잘 사는 것이 같은 것인가? 

2. 아이들을 덜 때리거나 거의 안 때린다. 

3. 동아리나 특별활동에 성의를 기울인다. 당시 특활시간은 그냥 잠자는 시간이거나 그저 시간 떼우고 마는 시간이다. 당시 대학은 무조건 수능 점수로만 결정되던 시대였다. 그걸 열심히 한다고 한 들 학생이나 교사나 아무런 이득이 없었지만 일부 선생님들은 열심히 했다. 

4. 시사적인 이슈에 대해 민감하다. 

5. 내신이나 수능과 관계없는 자료를 인쇄해서 읽어보라고 나눠주기도 했다. 

6. 학생들의 개성을 다소 이해해준다. 그래도 나름 중위권 이상 인문계 학교에서 미용사 시험을 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7. 아는 게 참 많고 당시 내가 들어도 논리가 정연했다. 그냥 무조건 이게 옳다고 하는 건 별로 없었다. 


어쨌든 내가 학창시절 '비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전교조 혹은 전교조 비스무리한 선생은 이게 전부다.  


참고로 1989년 당시 문교부에서 학교와 학부모에 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다. 위의 내가 규정한 특성과 얼마나 비슷한지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신문반, 민속반 등의 특활반을 이끄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탈춤, 민요, 노래,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

-자기 자리 청소 잘 하는 교사

-학부모 상담을 자주 하는 교사

-사고 친 학생을 정학이나 퇴학 등 징계를 반대하는 교사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보는 교사




기억3. 


그러다 사회 나갔다. 사실 공식적인 전교조 선생은 사회에서야 만나게 됐다. 


2006년 내가 26살 때였다. 당시 '공모제 교장'이라는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학교장이 그냥 승진해서 교육감이 인사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 자격요건을 갖추면 학교운영위에서 심사해서 교장을 선정하는 제도였다. 당시 경남 전교조 1세대인 이영주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알게 됐다. 이영주 선생은 2003년 간선제로 치뤄진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성향 고영진 교육감에게 아깝게 패할 정도로 거물이었다. 나는 당시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장이 운동권 출신이라 이영주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영주 선생은 공모제 교장을 통해 교육개혁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전교조 교사가 만든 경영계획서는 너무나 딱딱해 학교운영위원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마침 우리 사장이 '임 주임이라고 우리 직원이 있는데 참 글을 잘 쓴다'고 침을 튀겨가며 자랑을 한 것 같다. 그래서 학교경영계획서를 수정하는 일을 맡게 됐다. 중학생이 봐도 이해하게 쉽게 재구성 해 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쨌든 이영주 선생은 남해 설천중학교 공모 교장으로 선임됐고, 공모 교장 4년 동안 참 잘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추억이다. 냉정하게 되돌아 봐도 나쁜 기억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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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6~7일에 걸쳐 강릉, 삼척 지역에 산불이 크게 났다. 그 결과 200헥타르 남짓한 산림이 탔다고 한다. 톱 뉴스에서 참 오랜만에 산불 뉴스를 보는 것 같다. 그럼 우리나라 산불 중 끝판왕은 언제일까? 내 기억으로는 톱 3 산불은 다음과 같다.


3위. 2005년 양양 낙산사 산불: 973헥타르 피해. 등산객실화로 산불. 낙산사 소실.

2위. 1996년 고성 산불: 3834헥타르 피해. 인명피해 없음. 군부대 실화로 산불.


하지만 앞선 두 대형 산불을 씹어먹고도 남을 초대형 산불이 있었으니. 


바로 2000년 동해안 산불. 2000년 4월 7일부터 15일까지 무려 8박 9일 동안 산불로 산림 2만 3700헥타르가 잿더미가 됐다. 1헥타르가 3000평이니, 평수로 따지면 7169만 2500평이 불에 탄 셈이다. 참고로 여의도 면적이 87만 평 정도라고 하니 서울 여의도 면적 100개 가까이가 불에 탔다고 보면 된다. 


이 산불은 시골에서 쓰레기 소각을 하다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4월 초순에 초속 26미터가 넘는 강풍을 타고 엄청나게 빠르게 산불이 확산됐다. 무려 12만 5500명이 동원됐으니 당시 강원도 군부대에 근무했던 분들은 이 산불이 기억날 수도 있겠다. 



산불은 고성에서 발화해 삼척, 동해, 강릉, 경북 울진까지 진출했다. 정말 아슬아슬 했던 것이 울진원전 코앞에까지 산불이 덮쳤는데, 필사적으로 산불을 막았다. 만약 울진 원전에 산불이 덮쳐 전원공급장치가 고장나면, 냉각펌프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그럼 일본 후쿠시마 원전처럼 끝장나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아찔한 일이다.


이 산불 이후로 시골에서 논두렁, 밭두렁, 쓰레기 태우기를 금하기 시작했으며, 산불감시원이 생겨난 것으로 기억한다.

울진 원전 코앞에서 멈춘 동해안 대산불.



논문을 살펴보니 산불 관련 논문이 제법 있었다.


논문 중 "역사문헌 고찰을 통한 조선시대 산불특성 분석"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이것을 살펴보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산불 양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대형산불이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봄철이 73%였으며, 동해안 지역이 56%로 현대와 별 차이가 없다. 산불이 극심할 경우 관리를 유배시키거나 심지어 목을 베고 효수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원칙이 지금까지 이어졌으면 고성군수는 여러 번 '진짜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난개발 때문에 산림이 많이 훼손되지만 역설적으로 산불 진압에는 난개발로 만들어진 도로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진화 기술은 그때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헬기를 동원해 물 붓고,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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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2016국방백서가 있기에 한 번 들춰봤다. 


국방백서는 생각보다 작았다. A4 사이즈 보다 조금 작은 용지로 총 296쪽이다. 

백서는 2017년 1월에 나왔다.


책은 표지부터 내지까지 모두 컬러로 인쇄돼 있으며

종이 품질 또한 광택이 나고 잘 찢어지지 않는

(역으로 손가락이 베이기 쉬운) 

질 좋은 종이로 돼 있었다.


국방백서 표지, 제목인 '국방백서'는 볼록하게 도드라져 있다.



1. 공고한 김정은 정권


국방백서의 내용 가운데 몇 가지 내가 관심있는 분야를 들춰 봤다. 


먼저 북한에 대한 서술이다. 

백서에 '김정은'이라는 단어가 총 16개 쪽에 걸쳐 나올 정도로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국방백서는 김정은 정권에 대해 

'1인 지배체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18쪽)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이 실패하면서 

주민들의 기초생활이 악화되었고

고위급 인사 탈북, 내부 체제결속을 주력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다. 


23쪽에는 "김정은은 국무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면서 북한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나머지는 대남도발과 북한의 대남정책과

부록으로 남북한 관계일지를 정리하면서 김정은이 언급되고 있다.


국방백서에 김정은 부분을 읽어본 느낌으로는

북한에 실질적인 김정은 체제가 확립 됐다는 인상이 강하다. 

종편 보수 논객들은

당장 북한이 무너질 것처럼 얘기하지만

국방백서를 읽어본 느낌으로는 김정은이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으로 국방백서는 종편 보수 논객과 달리

냉정하게 상대를 분석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2. 별 내용 없는 사드 배치


사드 배치가 작년 국방이슈 가운데 최대 이슈였다.

하지만 백서에 사드 관련 언급은 매우 적었다. 


61쪽 하단과 62쪽 상단에 걸쳐 2/3쪽 정도였으나

그래픽 이미지를 빼면 고작 4문단에 불과했다. 

A4용지 보고서로 치면 1/3쪽에 불과한 내용이다.




좀 솔직히 의외였다.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위 이미지가 국방백서 내 사드배치에 대한 모든 내용이다.

물론 남북관련 대립이나 일지에서 사드에 대한 반발

이런 식으로 '사드'라는 단어는 언급되지만 내용은 이게 다였다.


3. 경악할 사진


하지만 정말 내가 놀란 것은

172쪽과 173쪽 양쪽에 걸쳐

엄청 큰 사진을 실어 놨는데

바로 아래 사진이다. 


온라인을 뒤흔들어 놓았던

발목지뢰 동상이다. (정확한 명칭은 '지뢰도발 평화의 발 조형물')




국방백서는 1년에 한 번 나온다. 

300쪽도 안 되는 책이다. 

그런 중요한 책에 2개 쪽을 걸쳐 

사진 하나로 한다면

그 사진은 굉장히 중요하거나 

잘 찍은 결정적 사진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온라인에서 엄청난 욕을 먹은 사진을 실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쨌든 엄청 큰 사진으로 보니

사람들 표정이 생생히 드러나는데

다들 굳은 얼굴이었다.


이 사진은 7장 '자랑스럽고 보람있는 군 복무 여건 조성'

도입부 사진이다.

이 사진 이후 병영문화 혁신, 장병복지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조형물 이미지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4. 그래도 쓸모는 있다


국방백서 편집 자체만 가지고 말하자면

상당히 잘 된 편집이라고 여겨진다. 


재질도 좋고, 글자 크기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그래픽 이미지가 충실했다. 

물론 그래픽 중에 오류가 있는지는 내 전공이 아니라 모르겠다. 

그리고 부록으로 나온 각종 일지는

관련 기사 쓰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특히 남북관련 기사를 쓸 때 옆에 끼고 볼 만한 책이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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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좋아하지는 않고, 유대인 격언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나마 내가 하나 공감하는 게 있다. 


"누군가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줘라"


우리나라 언론도 이런 적극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슈만 키워놓고, 나머지는 시민단체나 정치권에 맡겨 놓고 빠져 버린다면 그게 기자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


내가 진주시 수곡면 사전투표 비례대표 몰표 사건을 취재할 때였다. 몰표 논란이 된 개표결과지는 심인경 씨에게서 받았지만 문제의 관건은 수곡면에서 '새누리당을 찍지 않은 사전투표한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다. 방법은 딱 하나다. 모든 인맥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조직국장에게 전화했다. 공보국장과는 말이 안 통했다. 그래서 그나마 가까운 조직국장에게 말한 것이다. 조직국장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개인적으로 친한 형님에게 얘기해서 힘을 넣도록 했다. 내가 아는 민주당계 인맥을 상당히 동원한 끝에 조직국장이 움직였다. 그리고 당원 명부를 뒤져서 수곡면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명이 나왔다.


수곡면은 농업지역이다. 농민이 많다. 농민회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전국농민회 사무총장이 마침 아는 사람이었다. 진주 수곡면 농민회에서 선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수곡면 농민회에서 2명이 나왔다. 이 3명을 찾아냈기에 기사가 됐고, 진주시 수곡면 사전투표 재검표가 이뤄졌다.


작년 여름에 쓴 '아파트 승강기 관리업체 1원 계약'도 마찬가지다. 1원 계약으로 '물을 흐리는 업체' 때문에 일감을 빼앗긴 업체의 제보로 취재가 시작됐다. 나는 기사를 쓰기 전 한번 만난 이후 결코 그 업체 사장과 만나지 않았고 지금 연락도 끊었지만 (딱 보아하니 접대할 사람이었다) 그 사장과 아예 무관한 기사라고 할 수는 없다. 내 기사로 누군가 불이익을 본다면 누군가는 이익을 볼 것이다. 어차피 승강기 업계가 뻔한 바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사를 썼다. 승강기 1대 2년 관리금액이 1원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날림 관리는 물론이고 어딘가 다른 형태로 뒷돈이 오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기사는 국민안전처 장관까지 올라가 일제 점검이 이뤄졌다고 한다.


이렇게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이미 깊숙이 사건에 개입할 일이 많다. 특히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더더욱 깊이 연계될 수밖에 없다. 


2.


박근혜 대통령이 3차례 대국민담화(라고 쓰고 대국민통보라 읽는다)를 하고 얼마 전에는 청와대 기자단을 갑자기 불러 홀로 중얼중얼 온갖 소리를 쏟아내고 가버렸다. 말이 간담회지 사실 기자들이 한 텍스트의 비율은 0.5%나 될까 싶다. 수십 명의 기자들이 있었지만 질문은 몇 개에 불과하다.


기계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한국언론의 문제가 JTBC기자의 정유라 신고처럼 '적극성(오바)' 때문에 문제일까? 아니면 소극성 때문에 문제일까? 나는 소극성 때문이라고 80% 이상은 생각한다.


내가 출입처가 있는 취재기자는 아니지만 들리는 말을 종합해 보면 출입처에서 보도자료 내면 질문하는 기자는 드물다고 한다. 경남으로 치면 한겨레나 경남도민일보처럼 깐깐한 언론 외에는 거의 질문이 없다고 한다. 많은 기자들이 출입처 논리(분위기)에 묻어 간다고 한다. 질문이 없는 기자들, 현장에 없는 기자들, 현장을 파고들지 않으려 하는 기자들. 그러니 기사들이 고만고만 비슷비슷하다. 일반인도 기사 몇 개 보면 기자인 나랑 수준이 비슷하다. 당연하다 비슷한 기사 비슷한 정보니 말이다. 한정된 정보지만 거기서라도 새로운 시각이나 관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잘 안 보인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기자들이 소심해졌다고 본다. 편안한 출입처 시스템이 깔려 있고, 정권 차원에서 언론을 장악하고, 대드는 기자는 짤리거나 소송 당하고, 괜히 오바했다가 광고 짤리거나 사업 짤리면 누가 '적극성'을 가지고 오바하고 싶을까. 그냥 고만고만하게 쓰다가 기자칼럼 같은데서나 한 풀이 비슷하게 몇 마디 하는 게 많다. 이렇게 기자도 소심한 회사원, 공무원 마인드로 가는 경우가 많다는 느낌이 든다.(경제도 어려운데 기자 때려 치우면 어디 가서 일하겠나?)


3.


나는  JTBC의 신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글을 봤다. 내 입장은 이렇다.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최순실의 딸로 알려진 정유라 씨.



박상현 이사님은 '선'을 강조했다. 나는 그 선이라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어차피 새로운 시대다. 과거에 어떤 '선', '틀'이 무너져가는 시대다. 그래서 선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에 일단 나는 거부감을 갖는다. 애초에 취재란 굉장히 역동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영역이다. 선을 긋기 쉽지 않다. 솔직히 내 생각엔 취재 영역에 선을 긋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언론을 길들이려는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선은 그으면 그을 수록 언론은 소심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만약 JTBC기자가 직접 신고하지 않고 슬쩍 교민이나 유학생에게 흘려서 신고하도록 유도했다면 선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더 심각한 팩트 침해라고 본다. 자기가 다 설계해 놓고는 자기는 우연히 알게 된 것처럼 쇼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식의 기사는 많았다. 어떤 기사가 나자마자 득달같이 고발이 이뤄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건 기자가 차마 직접 고발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관계 반대편에게 슬쩍 흘려서 손발을 맞춘 게 대부분이다. 내가 과거 미디어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방통위에 '이런 저런 사례가 있다'고 하는 순간 사실상 기자가 방통위 과장에게 민원을 넣은 셈이나 다름 없다. 이처럼 그 선은 많이 허물어져왔고, 애초에 그 선이 옳은 것이라고 분명히 답하기 어렵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기사만 쓰고 앉아 있을 순 없질 않나. 미국의 사례를 들었는데, 사실 미국의 저널리즘과 한국 언론 현실과 단차원적으로 비교하는 글 자체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언론의 모습도 그 사회와 역사의 모습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게 있더라' 정도는 얘기 가능해도 '이래서 이래야 한다'고 규정하려면 훨씬 더 많은 연구와 근거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자는 외계인이 아니다. UFO타고 다니며 슬쩍슬쩍 사진 찍으며 인류나 지구체제를 분석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기자는 사람 사이에서 나오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을 디디고 사람의 언어로 기사를 공개한다. 보도자료를 베껴쓰지 않는 이상 기자가 직접 취재에 나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순간 이미 개입한 것이다. 이미 판도라의 문은 열려져 있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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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망했다. 

대통령 지위나 하야 여부를 다 떠나서 그냥 망했다. 


박근혜가 망하면서 60대 이상 어른의 마음은 무너졌다.


그분들에게 박근혜, 그리고 박정희라는 명사는 자신들이 쌓아올린 성과를 보상해 주는 이름이었다. 


비록 박정희, 박근혜는 구중궁궐에서 호사스럽게 살았지만, 또 그렇게 허술하게 쌓아올린 것은 IMF외환위기 때 많이 허물어졌지만.


어쨌든 그분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보상해주는 이름이었다.


박정희가 있었기에, 그 밑에서 자신들이 허허벌판에서 이 나라를 일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되는 성역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를 부정하면 자신의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박정희 생가 입구./경남도민일보DB



따라서 그들은 박근혜를 찍어줬다. 


하지만 나는 지난 대선 때 그분들이 겉으로는 표를 안 냈지만 속으로는 그들도 살짝 불안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자다, 살림 한 번 안 해봤다'는 불안감이 살짝 따랐지만 그래도 박정희의 딸이기에 주저없이 표를 주었다. 


또한 자기를 꼴통이라 취급하는 젊은놈들에게 어른의 힘을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도 있었다. 그렇게 그분들은 하나로 뭉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박근혜가 망한 지금 엄청난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물론 젊은놈들 앞에서는 표를 안 내겠지만 조금만 길게 대화를 하다보면 그 상처가 적지 않다는 것을 단박에 알 것이다. 게다가 마음도 많이 지쳐 있을 것이다. 손에 일이 안 잡혔을 것이다. 자신들의 시대가 무너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나는 이 시점에 이분들을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세력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나이 들면 보수화 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최소한 젊은 사람의 말을 어느 정도 듣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가오는 선거에 대비할 수는 있지 않을까?


1. 박근혜를 찍었던 마음을 이해하자. "박정희 딸인데 그래도 보고 배운게 있어서 찍어주셨을 낀데"

2. 박근혜의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자. "저희가 걱정했던 것처럼 박근혜가 순진해서 이 꼴이 난 것 같아요." -> 이 얘길 하면 "하긴 그래. 지가 세상을 뭘 알겠노. 살림을 살아봤나" 요 말을 하거나 따라나오기 쉽다.

3. 고생한 것을 인정하자. "그래도 어르신이 그 고생을 했으니 젊은 사람들이 이만큼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하면 온갖 옛날 얘기 나올 것이다. 침착하게 다 들어주자. 

4. 마지막은 젊은 사람이 살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자. "이젠 어차피 앞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나라 아니겠습니까? 이번만은 젊은 사람이 밀어주는 사람으로 좀 찍어주이소."


이 4단 콤보로 어르신의 마음을 조금은 돌릴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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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직 고등학생이던 1990년대 후반, 우리 아버지와 친한 시의원이 있었습니다. 그 시의원은 "종금아, 아재가 돈 버는 법을 갈차줄까?"라고 했습니다. 그 시의원이 가르쳐 준 돈 버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느 시골 빈 터에 땅을 사놔라. 아무데라도 상관없다. 그린벨트나 절대농지만 아니면 된다. 니가 갖고 있으면 니 평생에 한 번은 거기 개발을 하거나 길을 내거나 할 끼다. 그러면 땅 값이 10배로 뛰는 기라. 100배로 벌고 싶으면 니가 나중에 커서 힘이 생기면 거기 산단을 할 수 있도록 해 봐라. 산단이 되면 도로 나고, 전기 들어오고, 상하수도 들어오면 기맥힌 땅이 되는 기다. 굳이 산단이 아니더라도 산단 인근에만 땅이 있으면 땅을 용도변경하기도 쉽다"고 침을 튀겨가며 말했습니다. 저는 "아재요. 그래도 산단인데 뭔가 공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교?”라고 묻자 "아이다. 그럴 필요 없다. 창고 몇 개 지어 놓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서민-노동자-영세사업자들이 미친 듯이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을 누군가는 ‘한 방’으로 손쉽게 벌 수 있다는 것을 저는 그 때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왜 지역 유지인 우리 아버지가 코오롱개발(이상득 전 의원이 사장이었습니다)에서 ‘민원’실장으로 있고, 왜 땅 가지고 정부랑 소송하는 지 그제야 온전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코오롱개발과 영포라인 큰 손들은 큰 판을 벌이고 싶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목장부지였던 어느 땅을 골프장으로 만들고 종합리조트사업으로 발전시키면 엄청난 이익이 된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지역 실정엔 밝지 않았습니다. 또한 과연 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지, 주민 반발은 없을 지, 토지수용은 가능한 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체크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은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사급 대우를 해 주면서 각종 개발편의를 봐주고, 주민들의 민원을 처리해주는 사람입니다.


코오롱개발은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지역문제는 아버지가 정리해주면서 그 결과 1990년대 후반 우리가 아는 마우나오션리조트가 건설됐습니다.(2014년에 2월 신입생 환영회 하다 붕괴사고가 일어난 그곳 맞습니다). 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되자마자 그곳에서 핵심 참모들을 모아놓고 축하연을 연 그곳입니다. 


마우나오션리조트 자체로도 큰 돈을 벌었지만 울산과 경주를 잇는 도로가 생기면서 주변 땅값은 10배 이상 치솟았고, 과거엔 ‘짐승들이 나오던’ 깊은 산에 지금은 펜션과 레저단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큰 이익을 봤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지역 실무자’인 우리 아버지 또한 이익을 어느 정도 챙겼을 것이고, 부끄럽지만 제가 누리고 있는 삶도 그 단물을 조금은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동산과 개발사업이 연계하면 뭔가 큰 이익이 생긴다. 그건 지금도 여전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익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을 주무르는 세력이 있습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 농공단지 전경. 군에서 혈세를 들여 만든 부지 4만 2000평을 어느 업체가 4억 9000만 원에 분양 받았다./경남도민일보DB



바로 토호라고 불리는 지역의 기득권 이익집단입니다. 그들은 직접 개발회사를 갖고 있거나 혹은 대형 개발회사에 접촉해 큰 판을 벌이고 이익을 차지합니다.


토호들은 무기가 많습니다. 그들은 관변단체를 뿐 아니라 지역의 어지간한 사회단체는 모조리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맥과 영향력을 발휘해 민원을 해결해주거나 누군가를 취직시켜 주는 일도 많이 해 줍니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은 토호의 영향력 아래 묶여 있으며 토호들은 이를 볼모로 삼아 선거철에도 막강한 힘을 행사하거나 혹은 직접 출마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요지나 개발예정지에 어떤게든 판을 벌려 수십 배의 이익을 차지하고자 합니다. 보통 선거철에 토호들은 시장·군수 출마 예정자와 거래를 하고, 당선이 되면 약속대로 토호들이 소유한 토지에 개발사업을 진행하거나 하다 못해 지역지구변경·지목변경·용도변경이라도 추진해 개발이 가능하도록 편의를 봐줍니다. 


물론 겉으로는 그럴 듯한 조감도를 그리고 경제유발효과 얼마가 예상된다며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다니 뭐니 하는 명분을 겁니다. 다 개소립니다. 토호들의 이익 외에는 경제유발효과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뜬금없이 이뤄지는 개발사업, 택지개발, 산업단지, 상업지구, 지역대형축제 모두 토호의 손에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뒷 일이야 상관 없이 일단 판만 벌이면 수십 배의 이익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공구리 삽질 공화국이 됐습니다. 


반면 토호들이 이익을 챙길 때 힘 없는 누군가는 개발사업으로 쫓겨났으며, 환경과 유산은 파괴됐고, 지역정치는 갈수록 썩어들어갔으며, 주민들은 갈등하고, 공동체는 붕괴됐으며, 복지와 교육·연구개발 등 생산적으로 쓰여야 할 혈세가 헛된 곳에 낭비됐고, 지자체는 빚더미에 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만, 한사코 지역을 위해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도로를 내주거나 몇몇 사람을 대기업이나 공직에 진출시켜 주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지 진정으로 지역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이 가져가는 거대한 이익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창원 상남동 상업지구 옛 모습. 기자 아는 지인 가운데 여기에 투자해 1000억 원을 벌었다는 사람도 있다./경남도민일보DB


사람들은 묻습니다. 대한민국을 누가 망쳤냐. 누구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중앙 정치판이라고 합니다. 누구는 재벌이라고 합니다. 누구는 검찰이나 사법부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누구는 공무원이나 언론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나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왜 그 명단에 토호가 빠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통령과 거대정당, 국회의원의 선거비나 유지비용이 어디서 나올까요? 일부는 대기업에서 나오지만 상당수는 토호에게서 나옵니다. 전당대회 때 그 많은 사람들 누가 다 데리고 올까요? 일부 자발적인 정치팬도 있겠지만 대부분 토호들이 동원합니다. 토호는 수 백 표씩 뭉텅이 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정치인도 토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재벌은 필수적으로 개발회사를 하나 쯤은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각종 대형 토목사업을 합니다. 그것이 재벌에게는 짭짤한 수입이 됩니다. 이때 지역실정에 밝은 토호들이 손발을 맞춰주지 않으면 재벌들은 개발사업이나 토목사업을 벌이지 못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억한 심정 품고 코오롱개발에 뒤통수를 때렸다면 마우나오션리조트는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지금 보다 훨씬 적은 규모로 아주 늦게 역사에 등장했을 겁니다.


지역에 향판이라고 있습니다. 그 지역 출신 판사입니다. 향판들 역시 토호랑 친합니다. 토호가 잡혀 오면 여러 특혜를 봐줍니다. 일전에 ‘황제노역’이 일었던 광주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노역 일당이 5억 원인데 광주토호세력들이 향판에게 부탁해 그런 식으로 판결을 내리도록 했다는게 지배적인 분석입니다. 사법부도 토호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토호 하나 잡혀가면 탄원서가 수천 장이 쌓입니다. 설령 향판이 아니더라도 기가 질리게 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과 토호, 특히 토목직 공무원과 토호세력의 결탁은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또 토호는 지역언론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 왜곡된 여론과 기사를 만들고 그를 기반으로 삽질 사업의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사실 언론을 통해 지역을 관리하면 훨씬 자연스럽게 지역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덮어 놓고 돈을 처멕이는 것보다는 언론에 좀 실어주고 띄워준 다음 이용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죠. 어디 삽질 사업 벌이고 싶어도 지역의 여론이라고 해놓고 시장에게 건의하는 것이, 어디 은밀한 곳에서 쑥덕대면서 돈 처멕이는 것 보다는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물론 결국 시장에게 멕이는 것은 같습니다)


저는 장담합니다. 토호 또한 대한민국을 말아먹은 원흉에 속합니다. 그들은 지역에 흩어져있고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토호가 있기에 대한민국의 ‘불의한 악의 수레바퀴’는 더 원할하게 굴러가는 겁니다. 토호가 사라지면 정치권, 재벌, 부패 공무원, 사법부, 부패언론 등이 당장 몰락하지는 않겠지만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겁니다.


저는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재원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것을 극소수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저는 재벌이나 사법부나 국가권력과 직접 싸울 능력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토호를 개혁하고 싶습니다. 토호의 힘과 기득권을 약화시키고 싶습니다. 그들의 약한 고리, 그들의 심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44살에 낳은 저를 끔찍하게 귀여워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옆에는 늘 제가 있었습니다. 포항이나 대구에서 유지들끼리 만날 때도 옆에 자주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누구는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고, 누구는 저렇게 해서 나쁜놈이다라고 들었습니다. 토호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에게서 처음 들었습니다. 


토호들의 약점을 잡고 힘을 약화시켜 나간다면 최소한 지역에서 황당한 곳에 혈세를 퍼붓는 미련한 짓은 상당 수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껴진 돈들은 주민복리나 교육·연구 등 생산적인 곳으로 쓰일 것입니다. 밑에서 기반이 되는 토호세력들이 약해지면 부패한 정치권 또한 그들에게 기대지 않고 주민들에게 직접 접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주민들을 위해 애쓰는 시늉이라도 할 것입니다. 


토호를 개혁하려면 토호에 대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누가 어디서 무슨 개발을 했고 얼마나 이익을 얻었고 뒤에는 누가 있었다. 그런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아나가면 토호들의 지역에서 전횡을 휘두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쳐야 하고 무엇이 약한 고리인지 파악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정보가 아니더라도 저에게 개발사업 이름과 그뒤에 어떤 토호가 있는지, 어떤 땅이 영향을 받는지 ‘지번’ 정도만 알려주셔도 됩니다. 지번만 알면 해당 토지의 주인이 누구고 어떻게 변했는지, 토지의 지목과 지역·구역·용도·가치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 알아도 제가 충분히 퍼즐을 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사는 경남부터 토호들을 분석하고 개혁하고 싶습니다. 황당한 개발사업 소문이 들리면 알려 주십시오. 갑자기 땅에 대한 규제가 확 풀리거나 개발열풍이 일 것 같다면 알려 주십시오. 혹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려 주십시오.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지번만 있으면 됩니다. 


2년 안에 토호에 대한 분석을 마무리짓겠습니다. 2년 동안 여러분이 주신 자료를 토대로 토호들의 약한고리를 다 찾아내고 토호개혁을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겠습니다. 그리고 토호개혁에 동의하는 사람을 모아 토호개혁 방안을 제도화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보가 필요합니다. 또한 함께 토호문제를 연구할 분도 있었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제 메일 주소는 lim1498@gmail.com 입니다. 연락처는 016-864-8684입니다.


분명 토호를 개혁하면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임종금 기자 드림.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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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다 2016.08.25 1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을 열어주십시요
    테그가 안됩니다

  2. 2016.09.01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