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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필자는 한 보수우익단체 계열의 교과서포럼에서 만들어진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를 보았다. 그 교과서에는 김구 선생이 항일 테러활동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또한 그 단체 산하의 한 모임은 백범기념관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임시정부와 윤봉길 의사가 소속된 한인애국단은 알카에다보다 더 무서운 테러조직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당황하겠지만, 필자는 나름대로 그들의 논리를 분석해 보았다. 폭탄은 던졌다는 행위 자체가 불법 폭력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시각을 벗어나 전 세계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객관적’으로 테러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테러를 통해 공포를 조장하고 정치적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액면 그대로만 봤다면 단어 몇 글자 수정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부당한 행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비겁하게 테러 행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더 깊은 내면에는 ‘일제는 비록 우리 민족을 억압했지만, 우리의 근대화를 일깨워준 존재’라는 생각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다. 

후자에 대한 부분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앞선 내용부터 살펴보자. 1932년 중국 상해. 평화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 행사장에 젊은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가 단상에 폭탄을 집어 던졌다. 이 장면만 살펴봐서는 분명 평화를 해친 폭력행위, 테러로 여겨질 만하다. 그러나 진정 평화는 누가 해쳤던가? 일제는 1870년대부터 근대적 무장을 앞세워 무력으로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우리의 수많은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이 일제의 총에 쓰러졌다.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활약할 당시에 일제는 간도참변을 일으켜 많은 양민들을 학살했다. 3·1운동 시기에 일제는 또 수많은 우리 민족을 살해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고 우리 민족이 당했던 것 이상으로 중국인들을 살육했다. 이런 큰 역사적 흐름에서 ‘침략’이 있었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를 테러라 지칭하는 이들은 단순히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는 그 순간의 장면을 가지고 테러라 지칭하였다.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이나 흐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 장면만 바라본 것이다. 

이건 애초에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을 모르는 유아적 사고에 불과하다. 역사 이해에 있어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특히 유명한 전쟁, 발명, 사건 등을 보면서 그 안의 장면에만 신경 쓰다 보면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놓치거나 그 내면에 흐르는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의 승리만을 기억하면서 임진왜란의 본질을 고찰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순신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만약 이순신이 살아 있었다면 일본에 쳐들어가지 않았을까?’하는 유아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모두 역사의 한 장면에만 집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다시 윤봉길 얘기로 돌아가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전 세계는 한민족이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중국인들은 한민족을 ‘일제와 함께 싸워야 할 동맹군’으로 여기기 시작했으며, 이는 민족연대전선을 낳게 되었다. 이런 노력으로 결국 일제 패망과 함께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는 역사적 성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규정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침략과정 → 우리 민족의 저항과 운동 → 세계 여론의 환기와 독립의 약속 → 독립’이라는 큰 역사적 흐름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큰 틀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 큰 사건이었고, 지지부진한 독립운동이 일제에 대한 반격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런 유아적 실수를 토대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일까? 보통 역사의 장면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특정한 생각이나 방향을 강조하기 위하여 역사의 한 장면을 발췌하여 넣는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넣어버리면 자신의 생각과 부조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 가운데 유리한 부분을 자르고 잘라, 한 장면만을 넣는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역사적 흐름에서 ‘의거’라고 규정해 버리면, 자신들이 교과서에 쓴 일제에 의한 근대화, 일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데 큰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그 장면만을 부각하여 ‘테러’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우리 민족과 윤봉길 의사를 분리해 버렸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만족하고 사는데, 특정 정치세력이 무리하게 독립을 요구하려다 테러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강조한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뒤져 보아도,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한 사람을 테러라는 부정적 단어를 덧씌워 기술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역사 교과서에 워싱턴 대통령이 반란군의 수괴라고 기록되어 있고, 보스턴 차 사건이 강도질 또는 테러 행위로 적혀 있을 리 만무하다. 간디의 불복종 운동을 불법 집회, 불법 파업이라는 식으로 인도 교과서에 적혀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일부 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있게 해 준 독립운동이 테러활동으로 변신해 있다. 이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땅을 부정하는 것이고,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 극우세력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필자는 그들의 어이없는 주장을 보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지금 이런 교과서가 나오는 것도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닐까? 우리가 역사를 냉철하게 살펴볼 수 있는 지혜를 쌓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역으로 우리가 ‘아, 역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구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단어 하나에도 신중을 기해야 하는구나’라고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역사적 장면만을 꼬집어서 만든 유명한 교양서가 있다. 한국사 100장면, 세계사 100장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책을 막상 살펴보면 그 장면에 대한 설명은 맨 처음 1~2문단에 불과하다. 나머지 3~4쪽은 그 장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에 대해 폭넓게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역사적 흐름에서 전체적으로 그 장면을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있다. 이런 책들을 학생에게 읽힐 때, 학생들은 역사를 이해하는 능력이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역사는 스냅사진이 아니라, 활동사진(흐름)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5월 20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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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과 쇄국. 오랫동안 회자된 논제이다. 

대체로 우리는 ‘쇄국’ 때문에 조선은 근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 속에서 사람들에게 늘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조선의 문을 꽁꽁 닫은 사람이었다. 이 때문인지 대중들은 흔히 흥선대원군을 떠올릴 때 꽁한 옹고집을 가진 어르신 정도로 인식한다. 과연 그럴까? 

흥선대원군의 부인은 의외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우리에게 개화파의 거두로 알려진 박규수를 평안감사와 좌의정으로 적극 등용하였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증기선을 모방한 증기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속도가 느려서 실패했다. 서양의 총알을 막아내려 방탄복도 만들었으나 너무 무거워 실용화엔 실패했다. 또 프랑스와 협력하여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 그가 개인적인 신념만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나라를 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고는 할 수 없다. 나름대로 개방을 모색하기도 하였고, 상황에 발맞춰 대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정보가 부족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일단 조선 내부를 안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표면적으로 쇄국정책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흥선대원군의 고민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열강들은 개항한 나라를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고, 정치적인 지배력까지 행사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개항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개항론자들의 주장은 달랐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구 열강과 무력으로 맞서다 개항했으며, 이로 인해 서구 열강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선이 주도권을 쥐고 개항을 전략적으로 추진했다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우수한 문물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유림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보수 유림들은 경제적으로 판단해 볼 때, 조선이 얻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서양과 교류를 하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은 서양의 사치품이나 신기한 물건들인데, 이를 들여오면 그 대가로 지불할 것이 쌀밖에는 없다. 조선의 쌀이 빠져나간다면 조선 백성들의 삶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유림들의 주장처럼 개항 이후 쌀값은 폭등했고,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래서 방곡령을 발동하여 쌀과 곡식의 반출을 막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사례로 볼 때, 흥선대원군이나 보수적인 유림들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개항 불가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논리가 있고, 현실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개항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생각에만 빠져 무조건 개항하거나 무조건 쇄국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은 당대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역사의 이면이나 진정한 내용을 보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대중매체나 완전하지 못한 교과서에 의존하여 역사를 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논리도 없이, 현실 인식도 없이 결과론만 들고 과거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기, 다른 나라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일본은 개항을 선택했다. 1850~60년대 개항을 통해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개항으로 인한 식량 부족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을 강제로 개항하여 조선의 쌀을 토대로 간신히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 나아가 만주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반면 미국은 일정 부분 문을 닫아버렸다. 당시 영국의 철강은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미국도 영국 철강을 수입함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다. 그러다 미국인들은 여기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은 영국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급격하게 올리기 시작했고, 특히 철강 제품에는 50% 이상의 ‘미친 관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국은 문을 닫고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하여 철강 산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의 공업이 충분한 기술력을 갖췄을 때, 전 세계에 철강제품과 공산품을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문을 닫아거는 나라에는 힘으로 문을 열고 시장을 잠식해 갔다. 

근대화 시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포항제철과 현대자동차 등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산업들은 철저히 문을 잠그고, 정부의 엄청난 지원으로 빠르게 기술력과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기간산업이 되었다. 

이렇듯 문을 열고 닫는 것은 그 시대적 상황과 자국의 현실과 적절히 발맞춰 이뤄져야 한다. 개방해서 성공했으니 우리도 무조건 따라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위험한 논리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미 FTA와 세계 금융 공황으로 인해 다시 ‘개방이냐, 보호냐’라는 19세기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을 최대한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생각이나 특정한 사례에 매몰되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다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쳐올 것이다.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치밀한 꼼꼼함이, 한쪽으로의 일방적인 정책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다면화된 정책이 필요할 때이다.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4월 8일자 기고글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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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반. 한 해양 강국이 있었다.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장악했으며, 당대 최고의 선박이 만들어지고, 세계 금융의 허브였던 곳, 이 나라는 바로 네덜란드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큰 부를 쌓았고, 네덜란드 사회는 풍족했다. 튤립이라는 꽃은 네덜란드인들이 유독 사랑한 꽃이었다. 색깔이 다양하고, 또렷할 뿐만 아니라 키우기도 쉽지 않았다. 키우기 쉽지 않으니 오히려 더 신경을 썼다. 

상류층에서 시작된 튤립 재배는 서서히 네덜란드 전 국민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하나의 기호였다. 그러나 이것이 투기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튤립에 가격이 매겨지고, 튤립을 위한 시장이 만들어졌다. 이 시장에서 튤립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는 일이 생겨나자 드디어 사람들은 다른 일들을 뒤로하고 튤립 투기에 나섰다. 모두 일확천금을 꿈꿨다. 

1634년부터 시작된 튤립 투기는 1635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튤립 한 포기에 황소 수십 마리 가격으로 판매되기도 하였다. 주식시장 안에서 튤립시장이 만들어지고, 다른 곳에서도 튤립시장이 만들어졌다. 큰손들의 장난으로 튤립 가격은 급등락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튤립 투기에 미친 네덜란드인들은 하층민까지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거품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짐작한 이들이 있었다. 소위 큰손들은 적은 이윤을 남기고 튤립을 내다 팔고, 시장에서 자취를 끊기 시작했다. 큰손들의 실종으로 비로소 정신이 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튤립을 팔려고 내놓았다. 하지만 아무도 튤립을 사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수많은 귀족과 더 많은 국민들이 채무자로 전락했다. 당연히 튤립을 살 돈은 빚을 내서 장만한 것이다. 반면 큰손들은 산업이 초토화된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자본이 다 빠진 네덜란드는 더 이상 세계 강국이 아니었다. 이것을 바로 ‘튤립공황’이라고 부른다. 

1920년대 중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금리를 대폭 인하하고 돈을 무한대로 풀기 시작했다. 저금리의 시혜 속에서 속속 은행들이 세워졌고, 은행들은 한참 오르고 있는 주식시장에 돈을 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식이 폭등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주식으로 순식간에 수백, 수천 배를 버는 일이 가능해졌다. 미국인들은 벌게진 눈으로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당시 미국에는 유행하던 금융상품이 있었다. ‘마진 론’이라는 것으로 주식의 10% 가격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돈을 빌리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주식을 보유할 수 있었다. 적은 비용으로도 주식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국인들은 온 국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식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마진 론’에는 함정이 숨어 있었다. 바로 90% 돈을 빌려준 사람이 ‘돈 갚아라’고 콜을 당기면, 48시간 내에 돈을 갚아야 했다. 일부 미국인들은 이를 걱정했지만, 주식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기에 곧 근심을 놓고 주식 투기에 뛰어들었다.

운명의 1929년 10월, 큰손들은 조용히 주식시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충분한 차익을 실현한 큰손들은 최후의 카드를 사용했다. 바로 ‘돈 갚아라’라고 일제히 콜을 당긴 것이다. 엄청난 사람들이 주식시장에 주식을 팔기 위해 몰려들었고, 주식은 대폭락을 거듭했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 은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바로 세계 경제 대공황의 시작이었다. 이 대공황으로 무려 1만6000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고, 이 과정에서 큰손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경쟁 은행의 붕괴로 금융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굳혔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미국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위의 두 사례에서 하나의 시나리오를 볼 수 있다. 어떤 상품에 대한 열풍이 일어나고, 이는 곧 투기로 이어지고, 너나 할 것 없이 투기판에 뛰어들어 거대한 거품이 일어난다. 이쯤 되면 큰손들이 발을 빼고, 의도적으로(혹은 자연스럽게) 공황을 일으킨다. 

‘튤립공황’을 보고 네덜란드를 비웃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부동산 열풍이 휘몰아쳤고, 이는 부동산 폭등으로 이어졌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빌려서라도 아파트를 구입하고, 가만히 앉아서 폭등하길 기다린다. 발 빠른 큰손들은 팀을 꾸려 집값을 폭등시키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이익을 챙긴다. 허름한 20평짜리 아파트가 부르는 게 값이 되는 기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은행들은 아파트 값이 오를 거라고 믿고 아파트 시세보다 더 많은 돈을 빌려줬다. 이렇게 거대한 거품이 낀 상태에서 세계 금융 위기가 닥쳤다. 

은행들은 200조원을 초과해 주택대출을 해주었고, 이로 인해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마지막 남은 시나리오는 부동산 대폭락뿐이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외국인들이 들어오고 언론이 띄워주자 금방 주식 열풍이 일어났다. 2000을 넘어, 3000, 5000까지 찍을 것 같았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타이밍에 맞춰 주식시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2중, 3중, 4중으로 얽혀진 파생상품의 고리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백척간두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큰 이유 중 하나가 과거로부터의 교훈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정치사에 치중하여, 사회·경제적 역사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 필자는 거의 모든 임금들의 재위 순서와 재위 연도를 외울 정도지만, 당시의 경제 구조가 어떠했으며, 어떤 경제생활을 했는지는 그저 몇 줄 막연하게 알 뿐이다. 우리 교과서에서는 네덜란드의 튤립공황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 뿐더러, 미국의 경제공황도 막연하게 기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경제적’인 것이라 심도 있는 기술을 포기하고, 일어난 결과만 다루고 있다. 역사는 어제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오늘을 살피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거울을 통해 비쳐진 우리의 현재 모습을 인식하고, 과거의 거울을 통해 우리의 내일을 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거울은 반 이상은 깨어지고 파편만이 남아 있다. 이래서는 우리의 얼굴조차 제대로 비춰 볼 수 없다. 

수차례 경제위기를 겪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놓인 오늘을 살면서도 역사책을 보면 반면교사로 삼을 내용이 없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3월 18일자 기고글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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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무엇일까? 

중고등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중앙집권화’라는 단어를 많이 꼽는다. 역사에서는 중앙집권화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타난다. 우리 역사만 보더라도 고구려의 중앙집권화, 백제의 중앙집권화, 신라의 중앙집권화, 고려의 중앙집권화 등이 있다. 

중앙집권화에 성공하면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으며, 이로 인해서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그 나라의 전성기를 활짝 연다. 보통 이런 임금들이 오랫동안 기억되고, 위인전에도 이름이 오른다. 이렇게 본다면 중앙집권화는 역사에서 매우 좋은 방향으로 해석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방에 있어 중앙집권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중앙집권화는 국가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 일사불란하게 지휘함으로써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과거 중앙권력이 동원하지 못했던 지방민들과 지방의 경제력을 임금의 명령 한마디면 바로 동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과 자원, 권력이 모두 중앙으로 집결한다. 이렇게 중앙이 점차 커지면서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귀족이나 토호들은 점점 중앙으로 몰려든다. 이리하여 중앙은 비대해지며, 중앙권력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몇몇은 온 나라의 백성들과 경제력을 한 손에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이를 빼앗기 위한 쟁탈전이 중앙에서 벌어진다. 중앙에 의한 국가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반면 지방은 국가의 역사에 끌려가기 시작한다. 지방에 있어 중앙집권화란 역사를 빼앗기는 것이다. 비대해진 중앙권력의 정점에 선 임금은 더욱 지방에 대한 착취를 일삼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착취하지 않으면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언제 어떻게 쫓겨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지방은 가혹한 착취에 시달린다. 이러한 착취는 백성들의 이탈로 이어지며,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이민족의 침입에 쉽게 노출되어 삶의 기반이 붕괴된다. 

또한 중앙의 비대화는 필연적으로 국가 운영의 비효율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에게 나간 녹봉이 조선 전체 예산의 절반에 이르렀다는 통계는 중앙의 비대화가 국가 운영의 비효율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분노한 지방의 백성들은 중앙권력에 대항하여 항쟁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중앙권력이 보낸 군대에 형편없이 무너지지만 차츰 항쟁이 확대되면서 중앙권력은 허둥대기 시작한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지방 세력을 모아 자립을 선언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자립한 세력은 스스로의 군사를 거느리고, 중앙권력과의 단절을 통해 지방민들의 호응을 이끌어 낸다. 이제 중앙권력의 거대한 착취는 사라졌다. 대신 새로운 지방권력에 약간의 충성만 행사하면 된다. 중앙권력은 이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지방권력을 쥔 자들의 기득권과 지방민들의 결합을 끊기는 쉽지 않다. 지방은 사실상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역사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면서 중앙집권화는 무너지게 된다. 

중앙과 지방은 이렇게 역사적 주도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근대에 이른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대체로 중앙에 의한 국가의 역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좁은 영토, 한정된 인구에서 근 1000년 이상의 역사를 보냈기 때문에, 중앙은 지방의 움직임을 쉽게 알 수 있으며, 오랜 관료 시스템으로 정교해진 중앙권력을 지방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흐름들이 중앙으로 모여들게 된다. 

근대를 넘어 현대에 오면서 중앙은 더욱 비대해지기 시작한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중앙과 지방 간에 존재하던 물리적 장벽마저 사라지면서 중앙은 더욱 확실하게 지방을 잠식해갔다. 급기야 196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국가에서 지방권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도지사, 시장, 군수를 대통령이 임명하며, 지방의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중앙에서 처리되고 지방에서는 그저 떡 하나 떨어질까 구경만 하고 있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고, 지방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지방의 역사도 다시금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방예산은 여전히 정부의 지원금에 의존하고, 지방 시민사회단체들과 언론들도 많건 적건 정부 지원금을 받았다. 정권이 바뀐 후로는 그마저도 끊어져 어려운 살림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실정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중앙과 지방이 이원화되어 있으면 비효율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지방의회를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서 보다시피 중앙의 비대화는 지방에 큰 고통으로 이어진다. 정치인은 중앙당의 공천을 받는 것이 지역에서의 지지율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지역민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중앙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노력한다. 대형 할인 매장에서 결제를 할 때마다 결제 금액은 자동으로 서울 본사로 올라가 지방의 경제력은 나날이 쇠퇴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세금 수취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재판을 받으려 해도, 서류를 떼기 위해서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도 항상 먼 거리를 올라가야 한다. 과연 이것을 효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지방은 아무런 의사결정권도 가지지 못한 채 중앙의 역사에 의해 지방의 역사도 자동으로 결정된다. 대한민국 서울시가 붕괴하면 대한민국이 붕괴하고, 자동으로 경상남도도 붕괴할 것이다. 결국 이 나라의 주권은 서울시 안에만 있는 것이다. 지방의 역사가 없고, 지방의 의사결정권이 없다는 것은 고대나 중세와 다를 바 없이 지방은 늘 백성이며, 동원의 대상이며, 경제적 착취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앙의 역사, 지방의 역사 중 어느 것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지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2월 4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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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의 역사관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반일사관’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반일사관은 단순한 피해의식을 넘어 역사적으로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필자는 반일사관의 역사적 근거를 따지기 위해 펜을 든 것은 아니다. 반일사관 이면에 감춰져 있는 우리의 기이하고 모순된 모습들을 살펴보면서 진정으로 일본의 잔재를 우리가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기 위해서다.

1948년 8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경무대에 입성했다. 그가 경무대에 입성한 뒤 제일 먼저 한 것은 ‘콘센트 때려 부수기’였다. 전기 콘센트가 일본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기분 나쁘다며 ‘망치로 콘센트를 다 부수어라’고 지시한 것이다. 곧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다 부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전면에 기용했다. 이후 대한민국의 주요 요직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의해 지배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 특히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조선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인식한다. 이는 조선의 붕당정치를 비판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인들은 세 놈만 모이면 싸운다’는 출처불명의 속담도 만들어 내었다. 또 우리의 역사는 외부의 이식에 의해서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중국의 문물 전래를 떠올리면서 외부의 도움이 없다면 역사를 이끌어가기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일제 강점기 시절의 근대적 경험이 바로 한국의 경제성장과 근대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도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는 큰 발전 없이 정체된 상태로 이뤄졌다는 생각도 있다. 비슷비슷한 역사가 삼국시대니, 고려시대니, 조선시대니 이름만 달라져 그대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우리 한국인이라면 한 가지씩은 가질 법한 일반적인 ‘상식’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모두 일제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논리들이다. 국가를 역사의 최선봉에 놓고, 국가에 대한 공헌을 개인을 평가하는 데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 우리의 생각은 전형적인 일제 전체주의의 역사관이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절대적인 희생을 근간으로 유지된다. 따라서 개인의 희생을 유도하기 위해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노력했다는 인물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국가를 위해서 일했으니 어떤 다른 평가도 불가하다. 이런 전체주의 사고는 일제가 물러간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은 용서 못하지만, 일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반민족 행위자들은 ‘국가에 공을 세웠다’는 막연한 이유로 용서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다음으로 조선이 당파싸움으로 망했다는 사실 역시 일제가 남겨놓은 유산이다. 일제는 조선의 침략을 미화하기 위해서 ‘조선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로 무너지고 있었다’고 강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제가 주목한 것이 조선의 붕당정치이다. 얼핏 그것은 끝없는 정치게임처럼 느껴지기 쉽다. 일제는 이를 더욱 확대하여 ‘당파성론’이라는 논리를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따지면 조선의 붕당정치가 조선의 멸망을 이끌었다는 오명을 쓰기에는 무리다. 조선의 붕당정치는 당시 봉건사회로서는 가장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법이었다. 붕당이란 요즘의 여당과 야당과 같이 여러 사안에 각기 다른 생각과 대안들을 내세우면서 치열한 논리다툼을 통해서 더 합리적인 국가운영을 꾀하려는 노력이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다른 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역사를 발전시켰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다. 문제는 이 생각들의 이면에 ‘중국이 없었으면, 역사발전이 후퇴했을 것이다’는 막연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또한 일제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역사인식이다. 이를 ‘타율성론’이라고 한다. 일제는 타율성론을 주입하고, 타율성론의 연장선에서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논리를 개발했다. 모든 나라와 민족은 서로 문물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한다. 중국이 우리에게 준 것도 있지만, 우리가 중국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다. 또한 우리에게 전해진 중국 문물도 또 다른 곳에서 중국으로 이식된 것이다. 

어떤 문물을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든 것보다는 받아들여서 어떻게 재창조했느냐를 따지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사가 큰 변화 없이 정체되었다는 생각도 일제가 만들어낸 논리이다. 사실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고대나 중세의 역사는 겉모습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역사를 살펴도 마찬가지다. 신분제에다가, 왕이나 군주가 다스리며, 농사짓기가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임은 변함이 없다. 일제는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우리에게 ‘한국 역사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네’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등장함으로 인해서 공장이 생겨나고, 도로가 닦이고, 서구식 삶을 사는 등 ‘한국 역사가 획기적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결국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듯 반일사관을 외치는 우리는 기실 일제가 남겨놓은 역사적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일을 죽어라 외치고, 일장기를 아무리 태워도 우리는 여전히 일제 강점기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본을 욕하면 정상이지만, 일제가 남겨놓은 논리를 비판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이 오늘날 ‘반일국가’ 대한민국의 참모습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8년 12월 3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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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월드컵 준비로 한창이던 2002년 1월, 중국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 이름은 설명하기도 복잡할 정도로 길다.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이를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부른다. 

동북공정은 그 길고 긴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단순한 ‘역사적 조작, 왜곡’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국의 동북지역,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시아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이 편입하려 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 동북공정은 우리의 생각 범주를 넘어 이뤄지고 있었다. 동북공정 연구 과제 가운데 3가지는 △중국동북변경과 러시아 극동지역의 정치·경제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 안정 전략 연구 △한반도의 형세 변화와 그것이 중국동북변경지역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이다. 이 주제의 목적은 보시다시피 중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의 기초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해 마련하고자 하는 중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은 무엇일까? 필자가 정치외교학이나 국제관계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도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중반에 각 신문에 실린 기사다. “소련이 붕괴하고 옛 소련지역의 정세가 불안한 틈을 타서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자립’을 할 가능성에 대해서 (러시아 연방정부가)우려하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연해주의 경제권은 고려인들이 독점한 상황이다”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중국도 비슷한 우려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한반도가 통일 국면으로 들어서면, 19세기 말부터 대규모로 유입된 조선족, 고려인들은 동요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사회 안정 전략’을 동북공정은 포함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중국의 한반도 전략을 살펴보아야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급속도로 북진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평양이 점령당하자 명나라는 부랴부랴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 일본에 의해서 조선이 강제로 개항되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개화세력들이 나타나자 청나라는 바로 군대와 원세개를 보내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낙동강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미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평양을 점령당하고 압록강 인근까지 밀리자 중국은 바로 지원군을 파견한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의 공통점은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서 어떤 전략을 폈는지 알려준다. 중국은 한반도가 중국과 다른 특정 세력에게 넘어가거나,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여지없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미 남한이 ‘미국’이라는 힘의 영향력 아래 있는 상황에서 북한마저 흔들리거나, 불안한 상황이 되면 중국은 언제든지 개입할 것이다. 

북한 핵 위기가 절정인 2005~2006년 압록강 인근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의 여러 차례 교전이 있었고, 중국은 북한을 긴장시키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여러 번 감행했다. 2005년 1월 6일 미국 내 중국 전문가 브루스 길리는 월스트리트 아시아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전 세계에 위협이 되며 인권문제도 심각하다”면서 “중국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북한을 침공해 과도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한반도의 형세 변화와 그것이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는 바로 중국의 ‘한반도 개입’에 대한 기초연구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은 ‘간도협약’이라는 일본과의 불법적인 조약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간도지역을 빼앗았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정착되고, 통일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분명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거론될 것이다. 중국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켜 이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이다. 

이렇듯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 문제에만 국한된다면 우리는 동북공정에 대해서 아무런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야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중국이 지난 5년 동안 동북공정으로 만든 역사적 결과물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해괴한 논리와 자료부족, 한민족 역사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가히 ‘대하 역사 장편소설’을 지어낸 것이다. 반면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자료와 논문들과 학문적 성과를 낳았다. 학문적으로는 중국은 남북한의 역사적 성과를 따라잡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에만 열을 올려서는 안 될 것이다. 차분히 냉철하게 판단하고, 동북공정에 숨어 있는 이면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동북공정을 통해서 국가가 의도적으로 직접 ‘역사’라는 학문적 영역에 개입한다면 어떻게 역사가 뒤틀리고, 왜곡되는지 반성하는 시선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8년 10월 22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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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다 해안에서 지평선 너머를 본다면 아마 몇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높은 곳에서는 훨씬 멀리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 성인봉은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봉우리이다. 성인봉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100㎞가 넘게 떨어져 있는 독도를 훤히 볼 수 있다. 독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곳이 바로 울릉도이다. 

 이런 이유로 독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울릉도 주민이었고,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섬’이었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 되었고, 울릉도와 함께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울릉도에 딸린 독도. 이것은 곧 울릉도의 주인이 바로 독도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한다. 

울릉도는 512년 이사부에 의해 신라의 영토로 포함된다. 따라서 독도 또한 신라의 영토로 포함된다. 그리고 신라의 뒤를 이어 고려, 조선이 한반도와 울릉도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독도의 국적 또한 자연히 고려, 조선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모든 문제의 씨앗이 생기기 시작한다. 조선은 치밀한 관료국가였다. 이 관료제의 목적은 백성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이 기본이다. 백성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여야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정부의 입장에서 울릉도는 ‘불안한’ 지역이었다. 언제 폭풍우가 몰아닥쳐 백성들이 휩쓸릴지 모르며, 식량이 없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이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조선은 ‘공도(空島)정책’이라고 하여 섬을 비우는 정책을 쓰게 된다. 섬 주민들을 육지로 소환하여 육지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울릉도와 독도는 빈 섬이 되었다. 빈 섬인 울릉도와 독도에는 당연히 일본 어부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일본의 최대 논리인 ‘빈 섬을 우리가 먼저 차지한 것일 뿐’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용복은 친구 박어둔(朴於屯) 등과 함께 스스로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하는 관리를 칭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재확인하였다. 

당시 안용복은 중인 신분이었고, 친구 박어둔은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아주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다. 결국 나라가 할 일을 힘없는 백성들이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안용복은 함부로 관리를 칭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후 조선의 독도 영유권 재확인과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인정한 사례는 많이 있다. 그리고 구한말에는 고종 황제가 직접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한다는 근대적 칙령을 내려서 영유권 문제에 못을 박았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독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동해 한복판에 있는 독도는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또한 독도 주변 어장은 일본 어민들이 꿈에도 그리던 황금어장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 시마네현은 조례로 독도를 시마네현의 관할로 둔다고 1905년 선언했다. 이것은 몰상식적인 발상인데, 비유하자면 창원시장이 어떤 타국의 섬을 창원시의 관할로 넣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국가의 영토 문제에서는 고작 시 단위의 조례가 아니라, 대한제국처럼 황제의 칙령이 급에 맞는 것이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국’으로 급을 낮춰서 불렀다. 일본은 이제 일본국 본토와 일본의 식민국인 조선국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독도를 ‘조선국’의 관할에 포함시켰다. 당시 일본인들이 만든 대부분의 자료에서 독도는 조선국, 혹은 조선총독부 관할로 되어 있다. 해방 이후, 연합군은 1946년에 독도를 한국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또한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영토는 선언이나 문서로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독도를 드나들었고,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1954년에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고, 경상북도 경찰의 도움을 받아 의용수비대가 경비를 서게 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경찰청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경찰이 경비를 서는 이유는 외교적으로 ‘안정된 한국 영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독도에 군대가 무장을 하고 있으면 외교적으로 ‘분쟁지역 하 한국 영토’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독도의 역사에서 일본이 가질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게 유리한 자료들이 압도적이며, 제3자가 상식적으로도 판단해도 독도는 우리의 영토이다. 일본은 이곳을 어떻게 해서라도 분쟁지역으로 국제사회에 인식시키고, 국제사법재판소까지 끌고 가는 것이 목표다. 우리가 일본의 도발에 차분히 대응만 한다면 과거처럼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으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영유권 문제 말고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독도를 보는 우리의 태도이다.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일본이 도발하면 불같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장기를 태우고, 반일을 외치고, 손가락을 자르면서 극렬하게 항의한다. 그러나 반일을 외치는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사,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 등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이 모순 속에서 ‘독도에 해병대를 두어야 한다’는 외교적으로 위험한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도대체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필자는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다른 하나는 영웅주의적 시각이다. 안용복과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을 장군이라 부르면서, 그들의 업적을 찬란하게 묘사한 것이다. 주로 위인전이나 초등학생 역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들을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잘못하면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적 시각이다. 독도는 지배권력이 신경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의 가난한 민중들이 힘을 모아서 지켜낸 역사라는 것이다. 물론 안용복과 독도의용수비대는 중간 이하 계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나 대한제국, 우리 정부가 이들에게만 맡겨 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름대로 외교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 하나의 생각을 절대화하기 위한 수사법으로 느껴진다. 

이렇듯 독도는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의 많은 생각들이 쌓여 온 곳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습도 함께 볼 수 있는 참으로 독특한 소재가 되고 있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8년 10월 8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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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꼭 묻는 질문이 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역사는 돌고 돌뿐인가?’라는 것이다. 

한쪽을 보면 역사는 진보하는 것 같아 보인다. 발전된 현대문명, 컴퓨터에서 클릭 몇 번만 하면 물건을 바로 살 수 있으며, 얼굴을 보면서 전화를 할 수 있는 시대. 어르신들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세상에 경탄을 하면서 ‘정말 세상 좋아졌다’를 연발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을 보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가난한 사람은 아직도 굶주리고 있으며,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권력을 위한 경쟁은 그치질 않았으며,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방식은 큰 변화가 없다. 아마 청동기 시대 사람들을 데려놓아도 처음에는 현대문명의 화려함에 놀라겠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우리들처럼 적응하고 살 것이다. 왜냐면 큰 틀에서 비슷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돌고 돈다는 것인가? 아니면 진보한다는 것인가? 혹은 퇴보한다는 것인가? 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기 전에 몇 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는 화려한 고대문명이 꽃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기를 개발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기를 생산하는 전지 항아리를 만든 것이다. 전지 항아리들은 지금도 유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19세기 초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볼타가 전지를 만든 것이 최초의 전지라고 알고 있다.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다. 그 규모와 정밀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지금 기술로도 피라미드를 만들려고 한다면 건축학자들이 난색을 표할 정도이다. 1969년, 미국은 달에 사람을 보냈다. 이후 몇 차례 달에 사람이 갔지만, 1970년대 이후부터는 달에 사람을 보내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역사가 진보하거나 퇴보하거나 반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고대문명이 발달하였다. 그 문명의 근저에는 연금술의 발달에 있었다. 연금술사는 고대문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하였다. 그러다 그들은 특정 금속과 몇몇 물질들을 조합하면 전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았다. 그리하여 항아리 전지를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명백하게 진보이다. 

그러나 항아리 전지는 당시 쓰일 곳이 없었다.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족들이 항아리 전지를 만지면서 찌릿찌릿하는 느낌을 즐기거나 불꽃이 튀는 것을 보면서 즐기는 사치품에 불과했다. 귀족들의 취향이 변하자, 항아리 전지는 아무런 쓰임새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연금술사들은 항아리 전지를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피라미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당시에 피라미드가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피라미드를 제작하는데 국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피라미드 제작과정에서 고난도의 수학적 기법과 돌을 능숙하게 다루는 어떤 방법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피라미드와 같이 소모적인 건설은 필요 없어졌으며, 그로 인해 건설과정에서 개발했던 고난도의 수학적 기법이나 돌을 다루는 기술도 함께 사장되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주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다. 미국은 국력을 기울여 우주개발에 착수했고, 어마어마한 인력과 돈을 들여 드디어 달에 사람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곧 미국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달에서 몇 번 돌아다니는 것이 미국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체제경쟁에서 이겼다는 우월감뿐이었다. 그 외에 남는 것은 엄청난 액수의 청구액이다. 미국은 이 소모적인 우주개발을 줄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달에 사람을 보내지 않고, 우주왕복선을 통해서 몇몇 실험을 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이 사례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 바로 ‘필요성’이다. 고대에는 연금술사들의 뛰어난 능력이 ‘필요’했고, 전지를 만들어내는 ‘진보’까지 이루게 된다. 하지만 전지는 그 시대에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피라미드의 경우도, 피라미드 건설이라는 목표를 완수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지만, 피라미드의 건설이 무의미해지자 그 기술들도 ‘필요성’을 잃어버리고 사라지게 되었다. 미국이 달에 인간을 보낸 경우도 동일한 이유이다. 

이렇듯 역사는 필요에 따라 진보하기도 하고, 반복되기도 하며, 퇴보하기도 한다. 만약 누군가가 ‘역사는 진보한다’, ‘퇴보한다’, ‘반복된다’고 정의 내린다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거나, 한 면만을 보고 확대해석한 것이다. 동일선상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는 진보할 것인가, 퇴보할 것인가, 반복될 것인가를 놓고 논의가 무성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진보하거나 다시 찾을 것이고, 인류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퇴보할 것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저자)

경남신문 2008년 8월 18일자 기고글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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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8월,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한 후보는 이렇게 발언했다. 

“나는 백인과 흑인을 정치적·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양자는 신체적 차이가 있는 바, 내가 판단하기에는 그 때문에 양자가 완벽한 평등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란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이란 필수적인 것입니다. 나 역시 당신(상대방 후보)처럼 내가 속한 인종(백인)이 더 우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 후보는 또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흑인에게 선거권을 주거나 배심원으로 삼으려 한 적도 없고, 흑인들에게 공직을 부여할 생각도, 백인과의 결혼을 허용할 생각도 없습니다.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 우리(백인)와 정치적·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만든다고요? 내 안의 감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동등해질 수 없어요.” 

이 후보는 우리가 노예해방선언으로 잘 알고 있는 에이브라함 링컨이다. 

기원전 60년경, 네덜란드 해안에서 두 사람이 구조되었다. 이 사람들은 당시 유럽인들이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었다. 폭풍으로 네덜란드까지 좌초한 것이다.

유럽의 수도사들은 선교여행을 자주 떠났다. 6세기 아일랜드의 수도사 브렌던은 서쪽을 향해 배를 타고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 내용은 ‘수도사 성 브렌던의 항해’를 비롯한 몇몇 책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986년 바이킹 비야르니 헤르욜프손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이후 바이킹들은 캐나다 동부 해안에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리고 1418년 중국인들은 아메리카 해안이 그려진 지도를 제작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아메리카 대륙을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와 같은 내용들은 우리에게 혼란을 준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유감스럽게도 위의 새로운 내용이 진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내용은 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링컨은 노예해방론자도 아니었고,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왜 우리는 이렇게 거짓을 진실로 잘못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버젓이 교과서에도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들이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탐험가’ 등의 칭호가 붙어버리면서 그들은 ‘사실과 거짓’의 경계를 넘어버린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추앙받아야 하는 이들이고, 그들을 추앙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실을 은폐하고, 심지어 거짓을 대입하여 말을 만들어 내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역사의 경계를 넘어 신적인 영역에 들어가 있는 절대적인 이들이 된다. 신화는 필자가 앞서 말한 ‘외눈박이 역사’와 ‘기억과 망각’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외눈박이 역사’와 ‘기억과 망각’은 역사를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려 역사적 사실을 ‘취사 편집’하는 것이었다. 즉, 역사의 범주를 벗어나진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신화를 만들어 내는 이들은 진실과 거짓, 역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신화로 만들기로 정한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신화로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중대한 이익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콜럼버스 신화를 만든 이들은 ‘위대한 발견’이라는 단어를 내세우면서 유럽인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수천만 명의 살육은 ‘발견, 개척’이라는 단어에 묻혀버린다. 

콜럼버스가 몇 번째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는지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무조건 첫 번째 발견으로 우기고 대중에게 유포하면 그만이다. ‘링컨 신화’도 마찬가지다. 다민족, 다인종 사회의 미국은 늘 분열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것을 보완해 줄 초강력 접착제가 바로 링컨이다. 링컨의 개인적인 신념이나 생각들은 중요하지 않다. 링컨은 무조건 노예해방론자였고, 노예해방을 위해서 노력하다 죽은 사람이다. 미국에는 이처럼 위대한 백인이 있으니, 흑인들과 유색인종들은 백인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버리고, 모두 함께 미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힘을 합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과서와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주입되며, 이 과정에서 백인들은 미국사회를 영속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신화는 거대한 장벽이다. 대중에게 다가서도록 노력하지만 신화에 흠집이라도 내면 대중들은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판단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공격이 들어온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는 말한다. “진실의 최대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8년 8월 11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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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순식간에 부산을 점령하고, 우리 지역인 경남과 경북을 거쳐 조선의 전 국토를 유린했다. 1598년 말까지 이 전쟁은 계속되었다. 

7년의 긴 전쟁은 조선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긴 전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보급을 하고, 군대가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주둔지가 필요하다. 우리 경남 지역 중 상당수는 일본군에게 점령이 되어 7년간 일본군이 버틸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 흔적은 왜성이라는 일본식 성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왜성들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반면 우리가 잘 아는 것이 있다. 이순신, 의병 등등. 이순신 위인전을 읽은 사람은 옥포해전, 한산해전, 사천해전, 노량해전, 부산포 해전 등 수많은 해전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도 하나쯤은 이름을 댈 수 있을 것이다. 그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위인전으로, 교과서로, 드라마로, 다큐멘터리로 이순신은 그렇게 우리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반대로 우리 주변에 무수한 흔적들이 남아 있고, 우리 지역에 훨씬 더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일본군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그 기억들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우리는 그 기억들을 잊어버린 것일까? 정말 시간이 오래 지나서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일 뿐인가? 그렇다면 왜 이순신의 수많은 전투는 기억할 수 있는가? 답은 하나다. 우리는 역사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망각해 버린 것이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는 부끄러운 상처로 남아 있다. 나라는 사실상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모든 것은 1/3이하로 떨어졌다. 기억하기 싫은 그 상처를 동여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억’이다. 새로운 기억에는 패배의 상처란 없다. 이순신이 등장하고, 권율이 등장하고, 의병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없이 열악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이끈 영웅이 된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위인전에 포장되고, 의병들이 치른 사소한 전투라도 ‘승리’만 했다면 어떻게라도 전적비를 세운다거나 유적지로 지정해서 사람들에게 승리의 기억을 안겨준다. 

반면 우리에게 잊힌 것들이 있다. 우리가 패배한 곳은 그저 흘러 넘긴다. 의병들과 관군들의 충돌도 잊히고, 일본에 붙어 배신을 한 이들도 잊히고, 의병이라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들도 잊히고, 명나라 지원군이 우리에게 어떤 잔혹한 일을 했는지도 잊혔으며, 일본과의 휴전회담은 조선이 없는 상태에서 명나라와 일본만이 했다는 사실도 잊혔다. 수년 동안 우리 지역을 통치한 왜성들은 그대로 버려졌다. 물론 왜성이 잘 보존되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고 싶은 것을 보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역사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속된 말로 ‘쪽팔리는’ 것은 들추고 싶지 않으며, 옆에서 들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망각되어 갈 뿐이다. 망각으로 비워진 두뇌 공간에는 우뚝하고 영광스러운 기억으로 채워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서 조선이 그토록 밀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본군을 몰아내고 위대한 민족성을 다시 확인한 임진왜란을 기억할 따름이다. 

기억과 망각은 단지 부끄럽다는 심리적인 이유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역사의 편집권을 쥔 승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점만 기억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점은 알리고 싶지 않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에게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망각되어야 할 역사였으며, 신라의 역사는 기억되어야 할 역사였다. 그리하여 삼국사기는 ‘삼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압도적인 신라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 

고려가 멸망하고 나서 ‘고려사’를 쓴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끝까지 고려에 충성한 포은 정몽주 같은 사람은 어떻게라도 강조해야 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조선의 유교이념 중 핵심이념인 ‘충’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어떻게든 반공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좌익이 우익에게 저질렀던 학살은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기억’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정확히 13만명이 학살되었다’라는 명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우익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죽인 이들은 얼마나 되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대충 감으로 ‘50만인지, 100만인지, 150만인지’ 짐작할 따름이다. 그렇게 한쪽의 학살은 철저히 기억되었고, 한쪽의 학살은 철저히 망각되었다.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원자폭탄을 맞았다는 그 기억만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고, 그들이 행했던 많은 학살, 파괴, 잔혹행위는 망각하도록 하였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은 ‘피해자 일본’만이 있을 뿐, ‘가해자 일본’은 망각된 공간이다. 기억과 망각으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렸을 적 필자가 임진왜란 책을 보면서 ‘아니, 조선이 이긴 전투는 이렇게 많고, 패배한 전투는 몇 번 되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전쟁이 오래 갔을까?’라고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진실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고, 필자는 치를 떨어야 했다. 

“기억은 또 다른 망각의 과정이다.” 필자의 지도교수인 도진순 교수의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기억할수록 더 많은 사실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외려 더 많은 사실을 망각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8년 6월 23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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