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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4 19:39

초간략 고려사 과거 글들/역사연재2008.03.24 19:39

 

고려는 후고구려의 임금인 궁예를 몰아내고, 호족들에 의해 추대된 왕건이 918년 건국하였다.


고려는 후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신라를 고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리하여 935년 신라는 고려에 나라를 바침으로서 고려는 후삼국 통일에 좀 더 다가가게 되었다. 마침내 고려는 후백제가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서 후백제를 멸망시키니 이때가 936년이다.


이후 고려는 왕족과 호족들간의 내분으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원인은 왕건이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결혼정책을 썼는데, 무려 27명의 왕비를 거느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왕자들이 태어나게 된다. 호족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왕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였다. 이 혼란은 광종(재위: 949년~975년) 대에 이르러 수습된다. 광종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으며, '광군'이라고 하여 40만 대군을 양성하였다. 또한 노비안검법을 제정하여 호족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호족들 외에 다양한 인재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하였다.


광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토지를 원칙적으로 국가가 모두 소유하고, 대신 벼슬아치들에게는 토지의 일부에 대한 '수조권(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을 줌으로서 벼슬아치들은 거기서 나오는 세금을 가지고 먹고살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전시과 제도였다. 이를 기반으로 중앙관제가 튼튼해졌다.


이후 고려는 거란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국력을 총동원했다. 발해의 옛 땅을 근거지로 힘을 키운 거란은 3차례에 걸쳐서 고려에 침입했지만 고려의 현명한 대처로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고려는 더욱 나라를 발전시켜 11대 임금인 문종(재위: 1046년~1083년)에 이르면 나라의 모든 질서가 자리 잡혔다.


이 시기에는 각종 문화와 불교, 유학이 발전하여 고려는 번성하였으나 반면에 무신(장군)들에 대한 대접은 소홀해졌다. 이는 나중에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단초가 된다.


고려의 혼란


고려가 안정을 누리기 시작하자 귀족(옛 호족)들의 기강이 흐트러져, 힘 있는 귀족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마구 빼앗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17대 임금인 인종(재위: 1122년~1146년)대에 이르면 그 현상이 심각해지고, 귀족들은 왕의 자리마저 노리게 된다. 그리하여 일어난 것이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자,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북방에 거란을 대신하여 금나라가 등장한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가 굴복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는 두 주장으로 나뉘게 된다. 금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금나라에 순종하자는 김부식 세력과 금나라와 강경하게 맞서고, 금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는 묘청 세력이 그것이다. 하지만 김부식 세력이 승리하고, 묘청 세력은 평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김부식에게 패배하였다.


인종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의종 임금(재위: 1146년~1170년)대에 이르면 나라의 기강은 더욱 흐트러져, 왕과 귀족들은 향락과 사치에 빠지게 된다. 또한 예전부터 있었던 무신에 대한 홀대는 점점 무신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결국 1170년, 무신들은 반란을 일으켜 왕을 몰아내고, 귀족들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무신정변'이다.


나라의 힘을 움켜쥔 무신들은 자기들끼리 싸움을 하면서 임금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등 극도로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였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힘없는 백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사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무신들 간의 피비린내나는 권력쟁탈전 끝에 최충헌이라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승자가 되었다. 최충헌은 허수아비 임금을 내세우고, 자기 자식들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최충헌과 그의 자손들에 의해 고려가 다스려지게 되니 이것이 최씨무신정권이다. 이 시기에 무신들의 횡포는 절정에 달했으며, 백성들의 삶도 매우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몽고까지 고려를 침입(몽고의 침입: 1231년~1254년)하여 고려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고려조정은 몽고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강화도로 나라의 수도를 옮겼다. 강화도에서 왕족들과 무신들, 귀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편안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지만, 육지에 있는 백성들은 몽고의 침입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끌려가고, 땅과 삶의 터전이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귀중한 유산들이 몽고에 의해 파괴되었다.


최씨무신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몽고는 자신들의 항복요구를 거절한 최씨무신정권을 가만두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몇몇 사람들이 반발하여 최씨무신정권을 몰아내고, 강화도에서 개경(개성)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몽고와 화친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가 다시 정상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려는 찰나, 몽고의 간섭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간섭으로 고려는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다. 매년 수많은 물품을 몽고에 바쳐야 했고, 그 물품 중에는 처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고가 일본 원정을 결정하자, 고려는 그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준비하고, 배와 군대도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몽고는 자신들의 마음에 안 들면 임금을 마음대로 내쫓고, 새로운 임금을 내세우는 등 고려는 다시 혼란스러운 시대에 빠져들었다.


고려의 멸망


몽고의 간섭에서 벗어난 사람이 바로 공민왕(재위: 1351년~1374년)이다. 공민왕은 몽고의 간섭을 물리치고, 몽고가 빼앗을 고려의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귀족들이 함부로 빼앗은 백성들의 돌려주기 위하여 전민변전도감을 설치하였다. 이런 정책을 ‘공민왕의 개혁정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공민왕이 개혁정책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홍건적과 왜구가 고려에 침입하여 다시금 고려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를 비롯한 장군들의 힘이 막강해졌다.


이성계는 새로 떠오르는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고 위화도 회군(1388년)을 하여 임금을 몰아내고 허수아비 임금을 내세웠다가, 아예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바로 조선의 건국이다. 이때가 1392년이다. 고려는 이로써 475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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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고조선 고인돌, 비파형동검 출토지역과 일치

청동기문명 주도… 지배층 상징 다뉴경 분포가 증명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한국 고대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의 한 신화(神話) 학자는 지난해 말 ‘단군신화는 중국인들의 공동 조상인 황제(黃帝)집단으로부터 기원한 곰토템 신화의 일부’라는 주장을 담은 책을 통해 단군신화를 자국의 신화에 편입시켰다. 한국 학계도 이에 맞서고 있으나 고조선사의 경우 건국 시기와 영토 등 대응 논리 개발에 기본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국내 학계에서 의미 있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2005년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만든 ‘고조선사 연구회’가 연구의 첫 결실로 논문집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학연문화사)를 펴냈다. 이 연구회를 이끄는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단편적으로 이해돼 왔던 문헌사료를 정밀하게 검토했고 이를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 접목해 체계화했다”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총론 성격의 ‘고조선의 발전과정과 강역의 변동’에서 “고조선의 형성은 동북아 청동기 문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고조선의 영역을 “서쪽으로는 대릉하 유역에서 연나라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진나라와 이웃하며 동북쪽으로는 예맥, 부여, 숙신과 접했다”고 규정했다.

‘청동기를 통해 본 고조선과 주변 사회’를 쓴 이청규 영남대 교수는 청동기 문화의 분포를 통해 그 문화를 주도한 정치체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요하 유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청동 유물 가운데 지배층을 상징하는 다뉴경(多(뉴,유)鏡)의 분포에 주목했다.

이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다뉴경이 출토된 무덤은 기원전 8세기 대릉하 유역 중류에서 처음 형성돼 △기원전 5, 6세기 요하 중류 지역 △기원전 3, 4세기 압록강, 대동강 유역 △기원전 2세기경 영산강 유역으로 확대됐다. 이 교수는 “문헌 기록에서 전하는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 시기와 경로가 다뉴경 출토 무덤의 이동 경로와 맞아떨어진다”고 밝혔다.

하문식 세종대 교수는 ‘고조선 사람들이 잠든 고인돌과 동굴 무덤’에서 고인돌 분포 지역이 고조선 초기의 영토로 인식되는 공간과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또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標識) 유물인 비파형동검 분포권과도 거의 일치한다는 게 하 교수의 분석이다. 비파형동검은 중국의 중원 지역에선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하 교수는 “고인돌이 요동 쪽에만 분포한다는 사실은 공통 문화 성격을 가진 고유한 집단이 있었다는 뜻으로 고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논문집 외에도 한국 고대사를 지키려는 학계의 움직임이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우실하 항공대 교수가 이끄는 고조선 유적 답사단은 지난달 중순 요하 지역의 고대 유적지를 답사했으며 ‘요하 문명과 한반도 문명의 연계’를 부각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을 예정이다.

중국이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을 근거로 이 지역에서 발원한 모든 고대 민족을 중화 민족의 일원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단군이 황제의 후예가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도 14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동북공정 전후 중국의 한국 고대사 인식’을 주제로 갖는 학술회의에서 한국 고대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학계의 문제를 짚는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유물과 학문적 성과의 미흡 등을 이유로 고조선실을 별도로 만들지 않았으나 단군신화 내용을 포함하는 고조선실을 조만간 설치하기 위해 추진 중이다.

(동아일보 보도)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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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red Diamond


1987년 5월 디스커버 지


농경의 시작은 인류에게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이었다. 농업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 성의 불평등. 각종 질병들과 (아직까지도 암묵적으로 냉엄히 존재하면서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신분제가 인류에게 생겨났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중세 사람들보다 더 잘 살고 있다. 중세 사람들은 구석기 시대 거주자들보다 더 잘 살고, 구석기 시대 거주자들은 원숭이보다 더 잘 살지 않았는가? 우리는 가장 다양하고 많은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고, 최고의 도구들과 물질적 재화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장수를 하고 가장 건강한 삶을 누린다. 우리 대부분은 기아와 포식자로부터 안전하다. 우리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땀을 흘려 얻지 않고 석유과 기계에서 얻는다. 이것은 훨씬 진보된 것이 아닌가?


우리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부분 시간 동안은 수렵-채집 생활로 연명했다. 식량은 재배되지 않았고 저장되는 것은 거의 없었음으로, 굶어 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야생에서 식량을 구하고 매일 매일의 투쟁에서의 휴식은 없었다. 우리가 이런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난 것은 약 만 년 전에, 세계 여러 곳에서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들을 길들이기 시작할 때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농업혁명은 점차적으로 전파되어 오늘날에는 수렵-채집 부족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들을 진보주의 사관이라고 한다.)에게는 “왜 거의 대부분의 수렵-채집 조상들은 농업을 채택하였나?”는 질문은 바보 같은 일이다. 그들이 농업을 채택한 것은 당연히 농업이 일은 더 적게 하고 식량은 더 많이 얻는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재배된 작물들은 뿌리나 딸기들보다 단위 면적당 더 많은 수확을 준다. 견과류를 찾고 야생 동물들을 쫓느라고 탈진한 야만인들이 처음으로 과일이 가득한 과수원과 양들로 가득한 초지를 응시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농업의 이점은 너무나 명백하다.


진보주의적 사관은  과거 수천 년에 걸쳐 발생했던 예술의 놀라운 발전을  때때로 농업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농작물은 저장될 수 있음으로,  그리고 밭에서 식량을 줍는 것이 들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보다 시간이 덜 들므로 농업은 수렵-채집 인들이 결코 갖지 못했던 자유 시간을 주었다. 우리 조상들이 판테온 신전을 지으면서 B-단조의 노래를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은 농업 때문이었다.


진보주의 사관을 지지하는 증거들이 압도적인 것 같지만, 증명하기는 어렵다. 만 년 전에 사람들이 수렵-채집을 포기하고 농업을 채택했을 때, 더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나?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고고학자들은 간접적인 테스트에 의존해야 되었었는데 그 결과들은 (놀랍게도) 진보주의 사관을 지지하지 못했다.


간접적인 테스트의 한 예를 보자 : 20세기 세계각지에 산재한 칼라하리 부시맨 같은 수렵-채집 인들은 농부들보다 진짜로 못 사는가?  소위 원시 부족이라고 불리는 수십 개의 집단들은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 이들 부족들은 넉넉한 여가 시간을 갖고 있고 , 충분히 잠자고 , 그들의 인근 농부들보다 덜 힘들게 일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식량을 구하는데 바쳐지는 시간은 부시맨 집단에게는 12-19시간, 탄자니아의 하즈다 유랑민에게는 14시간 전후였다. 한 부시맨에게 왜 농업을 채택해서 이웃 농부들을 따라 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니까. 그는 “먹을 수 있는 밤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그래야 되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농부들은 쌀과 감자 같은 고탄수화물 작물들에 치중하는 반면,  수렵-채집인들의 식사에는 야생 식물들과 동물들의 단백질과  균형 잡힌 각종 영양소들이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부시맨의 하루 평균 식량 섭취 (식량이 풍부한 한 달 간에)는  2,140 칼로리, 93그램의 단백질이었는데, 이는 그들 신체 크기에 권장되는 것보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최소한 현존하는 수렵-채집 인들의 삶은(비록 농부들이 그들을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곳으로 내몰아도) 불결하거나 야만적이지 않다. 그러나 현대의 수렵-채집 인들은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조건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진보주의 사관은 먼 과거에 대한 주장을 하고 있다. 원시인들의 생활은 그들이 농업으로 전환했을 때 더 나아졌다는 주장 말이다.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 쓰레기 더미에서 야생 식물과 동물들의 잔재를 길들인 것들과 구분함으로써 그 전환의 시기를 측정할 수 있다.

Posted by 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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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 BC - 1000 AD



월력에 따라 이자율이 결정됨


 이자율은 메소포타미아는 매달 1/60, 그리스는  연 1/10. 로마는 연  1/12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은 대출에 따르는 위험성을 감안하여 , 생산성과 이윤 수준을 반영한다는 이론을 만든다. 독일의 경제사가인 Wilhelm Roscher는 고대로부터의 이자율의 장기적인 감소는 “문명의 진전”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는 사회 안정, 시장 효율성과 신용의 안전의 개선 때문에 투자의 위험이 감소하여 이자율이 하락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윤 마진이 줄어들고(거나) 가축과 작물의 수확 체감도 채무자의 이자 지불 능력을 축소시켰을 것이다.



이 접근 방식을 따라서, 경제사가들은 이자(그리스어로 tokos )를 나타내는 말인 “kid”나 “송아지”를 가축의 증가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메르에서 그리스를 통해 로마에 이르기까지 왜 그러한 증가가 하락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자율이 대부분의 재배자(사육자)들의 지불 능력 내에 있다는 의미에서 “경제적”이었다고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대 문명들의 핵심 금융 역학은 많은 채무자들의 지불 능력을 벗어나는 채무가 산처럼 쌓이는 문제였다. 이것이 2400-1700 BC 사이에 왕에 의해


“깨끗한 판” amargi, andurarum 그리고 misharum을 선포하기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농업 빚을 취소하였다. 



상업 신용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수메르,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이자율과 용어들은 이들 경제들이 고립적으로 검토될 때에는


잘 눈에 띄지 않는 패턴들이 비교를 통해서 나타난다. 각 지역에서 관습적 이자율은 그 지역의 분수 시스템. 특히 “단위 분수‘를 반영했다. 메소포타미아에의 60진법 시스템에서의 매달 1/60, 그리스의 10진법에서는 1/10 , 로마의 12진법에서는 1/12 . 고대의 이자에 대한 말인 어린애나 송아지로서 지불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산술적 고려가 작용했다. 수메르, 그리스 그리고 라틴어 모두에서 이자에 대한 단어가  ”출생“과 ”신생“에 연관이 있지만,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송아지나 작물이 아니라 단위 분수의 주기적 증가나 출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이자율들은 수세기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자율이 사원들, 왕궁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단지 전통에 의해 관리되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을 자본 채무(원금)에 대한 약정된 회수율의 주기적 지불로 정의한다.  이자를 낳는 채무들은 전형적으로 서면 계약, 담보, 증인들을 동반한다. 그리고 종종 , 이자율은 공적으로 규제된다.



이들 형식들은 , 인류학자들에게 친숙한  좀 더 자유롭게 주고받는 선물 교환 책무와는 대조적으로 , 동등하지 않은 자들 사이에서의 대면 거래를 나타낸다. 선물 교환, 지참금 또는 벌금들은 명기된 이자율을 낳지 않는다. 선물 교환은 관습적인 오버플러스 지불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 용어의 형식적인 경제적 의미에서 이자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이자율과 자산 가격이 서로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자본의 회수율, 위험도로서 이자율을 보았는가?



대부분의 경제 사가들은 이자율을 자본의 (한계) 생산성을 반영하는 일종의 용익권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마치 채무자가 빌려온 돈으로 얼마나 벌 수 있고 , 그러므로 얼마나 갚을 수 있을지에 기초하여 그 대출이 그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계산한 것과 같다. 이 접근법은 이자율이 채권자의 자산에 대한 생산적 사용을 반영한다고 가정한다. 



다른 문제점은 채무가 부유한 개인들에 의해서 필요로 하는 채무자들에게 돈을 내줄 때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데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채무는 여러 가지 타입의 의무들 특히 세금이나 여러 종류의 공공요금에 대한 연체금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경우에는 돈을 빌려 준 적이 없다. 징수자들에게 작물을 지불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윤에 대한 기대는 물론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Heichelheim은 신석기 시대 농부들이 발생적 형태의 회계 계산을 했다고 상상했다: 그들의 잉여 스톡들을 빌려 준 “부유한 소유자들은 작황이 나쁘거나 동물 질병 등에 의한 손실의 가능성에 비추어 높은 이자율을 요구했다.” 문명의 탄생 시기의 높은 이자율은 비상사태에 있는 절박한 가족들에 대한 터무니없이 비싼 대출이 아니라 위험에 대한 보상, 위험-감수에 대한 대가로 설명된다. 



현대의 가정은 경제를 방향을 유도하기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하든 , 시장은 그러한 노력을 헛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현대 경제 이론이


인정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지장 제력”이 그냥 방치된다면, 부와 소득에 대한 금융 클레임이 지불 능력을 필연적으로 상회하는 경향이 있음으로 시장 제력은 점점 벌어지는 경제적 양극화와 증가하는 비평형으로 이끈다. (Frederick Soddy 원리) 이자율은 이윤과 작물- 잉여 율을 능가한다.



실제로 거의 모든 농업 채무는 사업을 위해 빌린 것이 아니라 연체금에서 왔다. 대부분의 경작자들을 채무로 내몬 것은 노다지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작황의 실패였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많은 채무자들은 그들의 가족 성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 채권자에게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도 잃었다.



이자의 목축 기원?



대여와 이자 관계에 대한 ‘capital’, 그리스어의 tokos 같은 목축 단어들의 사용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 몇몇 경제학자들은 이자는 유목 경제에서 출발했다고 추론했다. 소가 대여된 후에 송아지가 이자로 되돌려졌을 것이라는 아이디어이다. 씨-곡물 이론과 유사하게, 초기 농업 대출은 경제적으로 생산적이었다는 것을 이것은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고대나 현대의 가축 부족 공동체에서 그러한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교 인류학에 의하면 가축의 이양은 언제나 가난한 채무자에서 부자 채권자에게로 이다. 스톡들과 다른 자산들은 필수품과 교환하여 서약되고 그것들은 생산적으로 투자되기보다는 소비되거나 세금이나 벌금을 지불하는데 쓰였다. 용익권을 생산하는 것은 바로 채무자 자신의 생산적 자산이다. 그러한 이자는 채무자의 토지에 대해서는 순수한 손실이다.  대출에 의해 생성된 소득이나 이윤에 의해 지불된 것이 아니라 , 담보로 서약된 채무자 자신의 스톡에 의해 이자가 지불되었다. 이것이 고대 경작자가 한번 빚에 빠지면, 왕의  Clean Slate 선포가 없는 한 , 빚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이다.



부족 경제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은 가축이나 토지가 대출 과정의 일부가 될 때에는, 그것은 서약 담보물로서 채권자에게 일련의 서비스와 용익권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금업의 본질은 용익권이 빌려온 자본 그 자체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세기를 걸쳐 선호된 담보의 형태는 채무자의 가축이다; 그의 노예들과 딸들과 아내들이나 아들들은 채권자의 집에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되었다; 나중에는 토지에 대한 권리나 조업권이나 광산권과 같은 공공 타입의 자산들



  Schneider, Leemans, Diakonoff 그리고 Steinkeller는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이자율을 농업의 소작 임대율과 연관시켰다. 이 이자/임대의 핵심에는 맞바꿀 수 있는 등가 (둘 다 33 &1/3 % Ur3세 시대 ) 채권자들은 관습에 의해 채무 불이행시 채무자-경작자의 토지를 직접적으로 소유하지 못하였다. 대출 금액은 밭의 실제 가격으로 기능했고 채무자는 밭이 임대 재산으로  생산할 양만큼-작황의 1/3를 양도해야 하였다. 사실상 임대율은 농업 이자율을 결정했고 따라서 토지의 실제 가격을 결정했다.



     요약하면, 고대 농촌 대금의 역사는 되풀이 하여 용익권-   점차적으로 담보-은 채권자가 얻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출을 생산적인 데에 투자하여 나온 채무자의 소득에서 이자가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이자 지불은 채무자의 이미 소진된 자원들을 삼켜 버렸다.


절대적 필요에서 나온 그러한 빌리기는 경제학자들이 가격-비탄력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낸다.  빌리는 사람은 신용이 생사의 문제가 됨에 따라 아무 이자율이나 지불하려 한다.



그러므로 고대의 대금은 채무자의 지불능력을 반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점점 더 많은 비율의 채무가 변제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궁한 개인들은 이윤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곤궁해서 빌었다.



마지막 문제점은 이자율은 대부분의 역사에 걸쳐 법에 의해 관리되었다는 사실이다.


1달에 1/60-mina 당 1 shekel-의 비율은  2000 BC Ur의 제3왕조에서 시작하여 Eshnunna와 함무라비에서 신바빌로니아 시대까지 1000년 이상 안정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로마의 1/12 이자율도 수세기간 안정된 상태로 있었다. 그리스 은행가들은 전형적으로


예금에 대해 1/10(dekate) 지급



초기 이자율과 어린 동물들 사이의 관계는 이자에 대한 kid와 송아지-말이 문자그대로냐 아니면 비유적인가 하는 것이다. 가축들이 kid나 송아지 또는 다른 어린 동물들이 이자로 지급되는 것을 전제로 대여된 것이 아니라 이자를 낳는 신용에 대한 후기의 목축 유비이다.



     인도 유럽어 학자인   Emile Benveniste는   통념과는 다르게 capital에 대한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의 단어는 상대적으로 늦게 서야  "가축 cattle”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도 유럽 어근 peku (


비슷하게 영어의 cattle, 불어의 chaptel은 라틴어 capitale ‘주요한 재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가축이 주기적 지불을 함의하는 단어들과 연관되는 것은 근동의 전통의 일부이다. 가장 중요한 주기적 지불은 사원들과 그들의 잔치에이다. 특히 신년 페스티벌에이다. Bernard Laum에서 시작하여 , 통화 역사학자들은 돈의 기원을 그러한 잔치에 대한 가축의 헌납에 돌렸다.



금전적 표준은 벌금을  동물, 은 또는 다른 주요 품목들로서 지불함으로써 최초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pecuniary라는 단어는 , 화폐의 또는 시장-지향적인 이라는 뜻인데, 라틴어의 pecus라는 말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홀로 또는 무리지은 가축을 의미한다. “fee”도 라틴어의 pecus에서 유래하고 , “feudal”도 마찬가지다. 가축이 문명의 최초의 화폐 지불수단인 한에 있어서는 , 시장 재화나 서비스를 사기 위한 것이 아니고, 보상, 벌금 , 혼인 채무나 공동체 희생에 대한 공물과 같은 원-세금들과 같은  주요한 책무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는, 신체 상해에 대한 벌금들은 가장 초기의 기록된 “가격들”이다.



capital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caput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가축의 머리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유명한 고리대금업에 토론에서 말하듯이, 은은 부모가 자식을 낳듯이 돈을 빌려준 자에게는 이자를 낳는다; 그럼에도 은은 불모이고 , 살아있지 않다.



2450 BC 경에 수메르인들은 사원과 왕궁에 정규적인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Urukagina 서들은 왕의 징수원들은 공공 의무에 대한 연체금으로 경작자들의 가축을 징발했다고 기술한다. 공공의무는 은이나 보리로 지불해야 되었고, 관개 수수료나 원-세금들이었지 돈을 빌려준데 대한 이자가 아니었다.



지불은 어린 동물들이 아니라 주로 은 , 때때로 곡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의 1/60 월 리가 자연스런 월력 이율인 이유



이자를 매기는 것이 qhcus적으로 자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 수메르에서 발명된 것이라는 것이 최근에야 인식되었다. 채무에 대한 기록은 인도 문명, 히타트 문명, 이집트 문명, 크레테나 미케네 문명 어디에서도 없다.



메소포타미아 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예를 들어 아시리아의 소아시아 식민지들에서 최초로 이자를 매기는 것이 나타나는데, 공공 법률과 종교 율법에 대한 비교 연구에 의하면, 이것들은 남부메소포타미아의 관행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1세기에도 게르만 부족들은 이자를 매긴 대출이라는 개념을 몰랐다고 한다.



화폐 거래는 , 이자 지불까지도 포함하여, 분수 무게와 척도 시스템을 가정한다. 그 당시의 산술에 대한 일반 지식을 감안하면, 배급 계산, 가격, 양과 이자는 상대적으로 간단해야 한다. 척도는 원(round)  숫자와 분수여야 한다.



셈, 측량과 anrpemfd의 시스템은 주기적인 기초에서 지불을 조정해야 되었기 때문에, 월력에 맞추어야 했다.



동일한 기간의 달들로 구성된 행정 달력을 반영하는, 60진법의 분수 측량과 무게  시스템이


발달되었다. 이것으로 공복들에게 정규적으로 매달 배급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 그것으로 사원들은 식량과 오일과 그 밖의 생필품을 주기적으로 지급하는 것을 정규화 할 수 있었다.


60은  30, 20, 15, 10, 6, 5, 4, 3, 2 그리고 물론 1에 의해 나누어질 수 있다..



1 gur(“부쉘”)의 보리는 30 satu= 300 "cups."로 나누어졌다. 매달의 보리 배급을 60 또는 30의 단위로 나누어서 성인 남자들에게 매일 식량을 배급하는 것이었다. 여자와 노예는 이것의 반을 받았다.



곡물 납부는 보리로 이루어 졌는데, 주로 대부분이 경작자들이 은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업적 채무는 주로 은으로 계산되고 지불되었다.



사원과 왕궁의 내부 회계 목적을 위하여 , 보리의 가격은 은 1shekel에 대해 1gur 로 책정되었다. 사원과 왕궁은 이렇게 하여 시장 변동으로부터 격리될 수 있었다.



이들 회계 관행들의 저변에 있는 논리는 초기 이자율 수준을 설명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60진법을 반영하여 , 은을 측정하는 표준 단위인 mina는 60 shekels로 나누어졌다. 이 시스템에 맞추어서 상업 채무의 이자율은 매달 1 mina의 은에 대해 1 shekel로 책정되었다.


1년에 12/60의 이자율이지만 , 준거점은 60달이었다. 복리는 1mina 자본이 60shekels을 더하기 까지는 시작되지 않았다.



자르기"라는 용어는 의미론적으로 영어의 shilling(skilja,“자르기”로부터 )그리고 노어의 ruble(rupit,자르기 )과 친척뻘이다.



중요한 것은 그 용어는 이자는 은으로 지불된 것이지 보리나 가축으로 지불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시간, 수 그리고 이자에 대한 탄생 은유



Diakonoff는 고대 언어를 “사전적 수준에서 추상적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단이 없거나 빈약한” 언어로 정의하였다. 일반적 아이디어들을 표현할 수단이 결여된 경우에는, 은유나 비유에 의존해야 된다. 이자와 같은 경제적 아이디어들도 비슷하게 구체적 이미지를 써서 표현했을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우주론은 자연을 인류-형상적으로 탄생 사이클로서 묘사하였다.



탄생 은유는 수들과 그들의 분수 “자식”들에게도 적용되었다. metaphor라는 단어  자체도


“낳는(pherein)”과 “너머”(meta)라는 의미의 은유이다.  이자 같은  고대 용어도 따라서 탄생 은유에 기초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수들은 성별로써 생각되었다. Pythagors의 금언은 “홀수는 남자이고 짝수는 여자이다”


호주와 남미 그리고 남아프리카 사회 일부에서는 , 셈은 2부터 시작한다. 짝이 “자식들”의 발생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최소한 1800 BC의 구 바빌로니아 시기에도 주요한 신들에게는 수가 주어졌다. 만신전의 주인으로서 아누는 “1”(60/60)이 주어졌다. 수메르 인들은 이 60의 분수들을 “60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30,20,15,12,10,6,5,4,3,2,1



수들의  성적 인류-형상학에 대해 코멘트 하면서 플루타르크는 이집트인들이  3 x 4 x 5인 피타고라스 직각 삼각형과 그것과 연관된 남자 신과 여자 신을  알았다고 주장하였다. 수직으로 선 3은 Osiris를 대표하고 , 밑변인 4(짝수이고 수평은 여자를 의미)는 Isis를 의미했다. 그들의 자식인 Horus는 빗변인 5를 나타냈다. 5는 남성 수로써 피타고라스 학파는 5를 “결혼 수”라고 불렀다.



플루타르크는 이 삼각형을 혼례 그림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된 족보를 갖고 있을 것이다. 3 x 4 x 5 = 60으로 60진법의 기초이다. 3 + 4 + 5 = 12는 1년 12달이다.


Stieglitz는 이런 방식의 추론을 수리시적mathopoeic이라고 부른다. 시인은 ‘하나’가 ‘여자(=2)’와 ‘남자(=3)’을 낳고 그들은 다시 짝짓기를 하여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일단 수들의 성이 확립되자, 더 높은 수들과 분수들이 생겨났다. 탄생 은유는 단위로  증가하는 것에 대한  친숙한 사고방식이었다.  특히 이것이 주기적 월력에 기초하여 발생할 때는 더욱 친숙했다. 대부분의 동물의 탄생은  년 중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다.-그러므로 탄생과 월력 재생건의 연관이 생겼다. 이자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큰 “부모”에서 “아기” 단위가 출현한다. 채무 지불과 이자의 증가가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 되는 정도에 따라, 그들의 타이밍은 월력이 다시 시작되는 시점으로 책정되었다는 것이다. 상업적 채무에 대해서는 어느 달에서 다음 달로 넘어가는 점이고 , 곡물 채무에 있어서는 지불은 신년에 매년 이루어졌다.


 

정치조직, 사회 조직 그리고 재분배가 아직 자연의 리듬과 주기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시대에는 경제 구조의 언어는 여전히 시적이었다. m?,라는 단어의 자본/채무에 의해 산출된  자손 또는 탄생으로부터 이자로의 환유는 산뜻한 공식을 만들었다: 이자가 자본에 대한 관계는 송아지가 소에 대한 관계와 같다. 이자는 시간에 대한 지불이었다. 신월이나 신년에 시간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고 자본은  “송아지”를 얻는다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대출하는 것은 성교하는 것과 같다는 속담이 있다: 이자로 갚는 것은 아기를 갖는 것과 같다.


이집트의 속담에는 “부가 이자를 낳는 곳에 놓여 지면,  두 배가 되어 돌아온다.”


 

이 유비는 Ur III 시대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는 지불 수단은 은과 보리였지, 가축이 아니었다. m? 라는 단어는 그들의 금융 부모인 minas에서 ‘태어난’ 작은 단위인 은


shekels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2000년 전에 지적했듯이 , 은은 불모이지만. 이자에 대한 은유의 용어는 생물적이다. 금속은 그 자체로는 낳지 않는다.


 

재생산 은유를 자연스럽게 만든 것은 “아기” 단위 분수가 전 단위에서 “태어난다”는 아이디어이다. 이자를 매겨서 투자된 Mina들은 새끼를 치고 Mina 당 shekel은 각 달의 처음에 ldxo된다.


 

그러한 지불들을 한 데 묶는 공통분모는 시간의 주기성이었다.


 

이자 지불에 대한 그리스와 로마의 송아지/탄생 용어들


 

이자를 낳는 채무라는 개념이 그리스와 이태리에 BC 8세기 경 그리스와 이태리에 페니키아나 시리아 상인들에 의해 들여온 것 같다. 이자에 대한 의미론적 상징들도 똑같이 중동에서 들여왔을 것이다.


 

750 BC 지중해 세계는 중앙집권화가 미발달했고, 상업 사업은 주로 가족 영지(고전적 oikos)에서 행해졌고, 산업과 신용은 더 작고 덜 도시화된 환경에서 번창했다.


 

이것은 이자를 갚을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에서는 공장은 자가-금융이었다. 농업에서는 신용은 고리대금의 ‘소비자’ 채무이거나 , 비상 사태 하에서의 세금 빚의 형태를 띠었다.


 

역사를 통해서, 소비자 이자율은 상업 이자율보다 더 높고 다양했다. 보리의 연리가  Ur III 때에 33 1/3로 정착되었을 때에는 , 토지가 생산할 수 있는 것과 이것은 대략적으로 일치했다. 그러나 아티카의 바위가 많은 토양에서는, 수확의 1/6 이상을 지불할 수가 없었다. (솔론이 외지인의 토지소유를 제한하자 사태는 개선되었다.)


 

고전적 그리스와 이태리의 사원들은 그들에 앞선 수메르의 사원들이 했던 것과 같은 사업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담당했다. 우선 여행하는 상인들에 대한 대사관 역할을 하였다. (신석기시대부터 내려온 관습). 그리스 세계 전역에 걸쳐 이자가 도입되기 전부터 전리품의 1/10 (dekate)는 사원에 바쳐졌다.


 

고전적 고대에 있어서 공공 세입의 두 주요한 원천은 전리품과 서약 공물이었다. 상업 소득에 대한 십일조는 거둬들여 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급경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레니즘 상업이 만개하면서 저축에 대해  dekate 는 정사적인 이자율로 진화해 갔을 것이다.


 

의존적인 노동을 지탱해야 할 큰 공적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30,60과 같은 월력 척도로 구성된 분수 월 표기가 거의 없었다. 이미 미케네 그리스는 , 아마도 크레타를 통해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서, 십진법을 쓰고 있었다. 지중해 이자율도 그들의 분수 셈 체계와 상광관계가 있었다.


 

시간 주기성에 대한 아테네의 채무 관행의 연관성은 달의 중순이나 20일째부터 역으로 날짜를 셈하는 것에 반영되어 있다. 개인적 채무나 임대료를 새달에 지불해야 하는데 남아 있는 날짜들의 수를 이것은 나타냈다.


 

월력 관행이 비슷하게 이태리 사원들의 전통과 공물을 형성하는데 일조했다. 구리가 파운드로서 12 unciae (ounce)로 나누어졌듯이,  XII Tables 전통은 법적 이자율을 1/12로 책정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비잔틴 시대까지 이어졌다.


 

대여 이자에 대한 라틴어 용어가 fecus.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접두어 fe는 다산fecundity을 함의했다. 이자/usury에 대한 그리스 말 tokos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재생한 하는 소들과는 달리 빌려준 금속 돈은 불모라고 하였다. 금속의 이런 불모성은 이자 대금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돈 벌기 중에서 가장 증오되는 것은 이자 대금이라고 관찰하였다. 왜냐하면 돈은 교환에 사용되기 위한 것이지 , 이자로 불리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Usury라는 용어는 돈으로부터 돈이 탄생됨을 의미하는데, 돈을 키우는 것에 적용되었다. 고전 시대에는 대부분의 채무는 지불불능의 농부들과 낭비적인 귀족들을 희생하는 불모의 소비자 이자 대금이 되었다.


 

돈과 토지의 채권자 수중으로의 독점화는 많은 수의 경작자들이 채무 노예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자 대부업자들이 전 시대에 걸쳐 가족이 없는 사일록이나 늙은이, 특히 이방인으로 묘사되온 데에는 정단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고대 은행가들은 자주 환전상들이었고, 종종 가족을 떠난 외국인들이었다. 필립 4세가 14세기 초 프랑스의 사원의 기사들을 처형했을 때, 그는 그들을 남색과 변절자로 비난했다.


 

채권자들은 채무 변제로서 하녀, 딸, 아들 또는 엄마를 데리고 감으로써 종종 가족을 해체시킨다. 그들 자신은 그들 자신의 가족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결혼을 삼갔다. 사실상 그들은 그들의 부의 하인이 되었다.


 

비경제적” 이자율의 몇 가지 결과들


사업 신용이 농업의 이자를 낳는 채무보다 앞선 것으로 보인다. 상업 이자율은 낮았고 , 좀 더 획일적이었다. 상인들은 분명히 그들의 이자를 갚을 만큼 이윤을 벌 수 있다고 믿었다.


강도, 해적, 또는 배의 손실 등의 경우에는 채무가 취소된다는 단서 조항을 명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아 경작자들에게는 그러한 보호 장치가 제공되지 않았다. 고전적 고대의 낮은 이자율도 가뭄, 하날, 작황 실패나 전쟁, 군대 호출의 경우에는 경작자들에게는 너무나 높았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경제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구 바빌론 시대에 걸쳐 보리 채무는 주기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상업 은-채무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신용이 공적 기관들에서 사적 가계들로 넘어가게 됨에 따라, 이자 대금은 고대 사회를 양극화시키는 주요한 힘이 되었다. 고전적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농업 채무를 취소하거나 신용 권력을 억제할 어떠한 왕실 지배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채무의 부식 역학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더 고대 사회를 양극화시켰다.


 

채권자들의 권력은 왕실 권위가 약화될수록 더 증가했다. 수메르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혁명적 제도였다.


 

요약


 

1. 비록 고대 경제들은 압도적으로 농업이었지만, 이자를 낳는 관행은 명백히 사원이 촉매 역할을  하여서 수메르에서 상업 분야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


 

2.수메르와 아카디아의  m?과 그리스의  tokos, 라틴어의 fecus는 동물 새끼를 의미했다. 목축 경제에서 동물의 탄생을 문자 그대로 의하는 것이 아니라 , 이 용어들은 그 지역의 단위 분수의 주기적인 증가 또는 “탄생”을 의미했다.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에서 시작하여 2000년 이상 각 지역으로 퍼져서 고전적 그리스와 로마로 갔다.


 

3.메소포차미아의 매달 1/60의 이자율은 표준화된 비율로 이자를 규칙적으로 계산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려 하였다. 그리스는 1/10, 로마는 1/12


그러므로 이자율의 하락을 “경제적” 근거에서 설명하려는 경제학자들은 길을 잘못 들었다.


 

4. 상업 분야와 농업 분야에서의 이자율은 대부분의 고대에 걸쳐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농업 채무에 대한 이율은 토지 임대료(수메르의 경우에는 소작료)를 반영했다. Ur III 시대에는 임대료와 농업 이자율은 1/3의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5. 상업 대출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농업 이율은 “경제적” 이유로다 높아서 많은 경작자들은 갚을 수가 없었다. 채무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개인 파산 제도가 없었다. 채무 문제에 대한 보통의 해결법은 지배자가 농업 채무 취소를 선포하기 전까지는 가족 구성원들과 토지-권리를 상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Clean Slate는 중기 청동기 시대 이후에는 덜 흔해졌다.      그러한 왕의 취소가 없는 이자를 낳는 채무는 바빌론, 그리스, 로마, 비잔틴 경제들에서 경제적 양극화로 이끌었다.


 

6. 이자 지불이 원금을 완전히 재생산 했을 때는 대출금을 상환한 것으로 여기는 오랜 전통이 있다. 함무라비 법에 이것에 대한 힌트가 있다. 3년 후에는 보증인을 해방시켰다. 3년은


농업 이자율이 전형적으로 연리 1/3임을 반영한다. 2000년 후에 유스티아누스 법은 경작자에 의해서 지불된 이자가 원금과 같아지면 채무가 변제되었다고  명시적으로 간주하였다.


이 판결은 오랜 로마의 관행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작성자  saranmul@naver.com

Posted by 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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