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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들/사전'에 해당되는 글 12

  1. 2008.03.24 근대과학의 등장과 붕괴
  2. 2008.03.14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환수에 대한 특별법 논란
  3. 2008.03.14 거란의 침입 (1)
  4. 2008.03.12 최치원
  5. 2008.02.29 왕검성
  6. 2008.02.28 위만
  7. 2008.02.28 부왕
  8. 2008.02.28 준왕
  9. 2008.02.27 단군 왕검
  10. 2008.02.27 슈퍼 301조
2008. 3. 24. 19:10

근대과학의 등장과 붕괴 과거 글들/사전2008. 3. 24. 19:10

 

1. 뉴턴, 엘프를 쫓아내다.

고대로부터 모든 인간들은 자연이나 삼라만상을 대부분 ‘생기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믿었다.’ 설명 따위는 필요 없고, 다만 잘은 모르겠지만 신이 만드신 섭리에 의해서 살아 움직인다고 ‘믿었다.’ 믿음들은 설명을 달지 않는다. 그냥 믿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이 자연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이나 해석이 가능할까? 당근 NO! 지구가 돈다고 하다가는 목이 돌아가는 시대였다. 한데 교황이 졸라 만만해지고, 1000년 동안 기독교의 구라에 슬슬 짜증이 밀려올 무렵, 숨죽이고 있었던 이들이 일어서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인간의 이성을 원위치 시켜놓고, 무개념 종교는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다. 방해꾼이 사라진 르네상스인들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 아이작 뉴턴(Issac Newton, 1642~1727)은 갈릴레이, 케플러(천문학 분야), 호이겐스 등이 발견한 개별적인 이론들을 총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뉴턴 역학이다. 뉴턴 역학은 단순하다. 물체는 오직 외부의 힘을 받는 경우에만 움직이며, 이 움직임은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하다. 어떤 외부의 작용이 없으면 그에 따른 현상이 전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어떤 자극에 대상이 움직이고, 그 대상이 또 다른 대상을 자극하여 또 다른 형태의 움직임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니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왜냐면 르네상스가 꽤나 진행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생명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움직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뉴턴은 이 믿음을 작살내 버렸다. 돌이나 나무들은 과거의 어떤 ‘작용’이 있었기에 저렇게 있는 것이고, 저들은 또 다른 작용이 없다면 영원히 저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들이 생명을 가지고 알아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저들은 ‘죽어있는 존재’다.


이 뉴턴역학이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정말? 저것들은 죽은 것이야? 그렇다면 저들 속에는 정령도, 귀신도, 엘프도 없다는 것이지?”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겁대가리를 상실했다. 이제 자연은 측정하고 수학화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지배할 수 있다. 인간의 자연지배가 시작되었다.


2. 확장되는 뉴턴역학

사람들은(정확하게는 유럽에서 단지 1%를 차지하는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지식인들) 이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보기 시작했다. 정밀하게 하나하나 살펴보면 모두 수학적인 법칙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법칙과 상성관계가 얽혀서 지금의 자연이 된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의 이런 대단한 발견은 인문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함수를 응용한 ‘수요-공급 곡선’이 대표적이다. 경제학이 수학과 친해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경제학적 용어들을 살펴보면 수학적 용어들과 많이 겹치게 된다. 성선설이니, 사회계약설이니 하는 것도 모두 인간과 국가(사회)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도식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학문 뒤에 ‘과학’이라는 단어가 붙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렇게 해서 근대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3. 근대과학의 한계

이제 세상은 거대한 기계, 아주 복잡한 시계 정도로 치부되었다. 이제 이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발견한 많은 법칙들, 열역학 1․2법칙이나 관성의 법칙 등이 발견되었다. 근대과학은 정말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한계점들을 안고 있다.


첫째, ‘자연의 도구화’이다. 이제 엘프도 없으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인간이 자연을 마구 파괴하는 것은 당연한 일. 생산과 소비를 강조하는 자본주의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논리였다. 환경파괴가 시작되었다.


둘째, ‘과학의 절대주의’이다. 여기서 신이 다시 등장한다. 뉴턴이 왜 갈릴레오처럼 죽을 위기를 겪지 않았는가 하면 ‘신이 뉴턴역학에 의해 세상을 창조했다.’라는 이상한 논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릴 생각은 하지 못했고, 희한하게도 아래와 같은 설명을 만들었다.


“신께서는 이 우주만물의 물질들과 뉴턴역학을 창조하셨다. 그리고는 내버려두셨다. 하지만 뉴턴역학에 따라 물질들은 서로 부딪히고, 충돌하면서 현재의 우주가 만들어졌다.”


신과 과학의 절묘한 조화였다.(여기에는 뉴턴 자신이 성직자였던 이유도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 모두에게 강력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적인 사람들도, 이성적인 사람들도 모두 이 논리에 동의했다. 곧, 근대과학이 신을 업으면서 절대성을 가지게 되었다. 신을 걷어참으로써 세상에 등장할 수 있었던 근대과학은 다시 신을 업으면서 ‘완전무결한 절대적’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막연히 ‘과학으로 인해서 거대한 발전이 있었다.’라고 ‘믿게’ 되었다. 평균수명이 100년간 2배로 늘었다고 한다. 그럼 앞으로의 100년간에도 다시 2배로 늘면 인간 수명은 150살이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좀 다르다.


인간 수명이 늘긴 늘었지만, 그것은 ‘페니실린’ 혼자의 힘이었다. 항생제가 생김으로써, 박테리아나 세균, 바이러스를 직접 죽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린 아이들이 5살을 넘기지 못하고 몰살을 당하는 일이 없어졌다. 이것이 인류의 수명을 1.8배 늘려주었다. 거기에다가 국가가 개인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보장론’이 나오면서 어린시절부터 예방접종을 하면서 노후에는 국가가 연금을 주면서 인류의 수명을 15% 정도 더 늘려주었다. 그리고 수술기술과 검진기술이 발달해서 수명을 5% 늘려주었다. 그러니 페니실린이 보급되는 시점에만 인류의 수명이 대폭 늘었을 뿐, 나머지 시기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특히 1950년대 미국인의 수명과 지금 미국인의 수명은 거의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의사들은 지금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그 어떤 항생제로도 듣지 않는 슈퍼 박테리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박테리아를 죽이는 항생제가 생기면 박테리아는 내성을 갖춰 더 강해지고, 다시 더욱 강한 항생제가 나타나고, 그 항생제를 엿먹이는 초강력 박테리아가 나타난 것이다. 이 물고 물리는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의학이 패배할 경우, 페니실린이 끌어놓은 80%를 인류는 고스란히 다시 반납해야 할 지 모른다. 평균수명 50세. 샘은 이미 반 넘게 살았다.


셋째, 세계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다. 애초에 모든 것이 틀린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바로 상대성 이론이 등장했다. 뉴턴의 귀싸대기를 휘갈겨버린 아인슈타인이 나오면서 근대과학은 붕괴되어 버린다.


근대과학: 빛은 직진하지? 그래서 빛이 왕복하는 시간을 재면 별 간의 거리를 잴 수 있어.

아인슈타인: 빛은 중력에 말려 아주 심하게 휘어지는데?

근대과학: 시간은 일정하다. 그래서 그 자동차나 비행기가 움직인 시간을 계산하면 속도를 측정할 수 있어.

아인슈타인: 어라? 움직이는 비행기에서 잰 시간과 땅에서 잰 시간은 다른데? 관점이나 상황에 따라 다 다른데.

근대과학: ㅡ.ㅡ;;;;;; 그래도 모든 물체가 움직이는 것은 일정한 규칙은 있잖아.

푸앵카레: 그럼 일기예보는 왜 못 맞추는데? 2개의 대상 사이에는 일정한 규칙이 대충 적용되지만 3개 이상의 대상이 놓여지면 서로간의 불규칙성이 발생한다. 이 세상은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덩어리다.(카오스 이론)

근대과학: GG


완벽한 법칙은 없다. 따라서 이제 무언가를 설명하고 답을 도출해 낼 때도, 답이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차범위 안의 근사값을 측정해 낼 수밖에 없다. 과학이 발전하는 것은 이 오차범위를 줄이는 것일 뿐이지, 완벽한 답은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근대과학은 붕괴하였다. 현대과학은 근대과학을 무참히 짓밟고 시작되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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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 행위자의 부정한 재산을 환수해야 한다는 국민적 동의 아래 만들어진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환수에 대한 특별법"

원래 이 법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1990년대 잇따른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 벌인 '땅찾기 소송' 결과 상당 부분의 토지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들에게 돌아간 사건들을 바탕으로 입법되었다.

(그 전에 용어 선정의 명확함을 해야 할 것 같다. '친일파'는 일본과 친하다는 뜻이다. 우리 주변에 일본 애니메이션에 중독된 사람들도 '친일파'이긴 마찬가지다. 문제는 친일파가 아니라 '반민족행위'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친일이건 친미건 그건 개인의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친일이나 친미를 위해서 '반민족행위'를 할 경우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정리한 것이다.)

필자는 이 법안에 찬성한다. 하지만 이 법안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1. 소급입법: 이미 길게는 100년이 지난 사안을 끌어와서 입법한 것은 위헌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소급입법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2. 연좌제 문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미 대부분 세상을 떠난 이들이다. 한데 이들 후손(손자, 증손자)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은 연좌제에 해당된다는 주장이다.

3. 재산권 침해: 기본적으로 시장자본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소유권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개인의 소유권을 명백하게 침해한다.

4. 형평성 문제: 이미 제3자에게 재산을 처분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은 압류할 수 없다. 하지만 조상의 재산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은 재산을 빼앗긴다. 형평성의 문제, 법적 안정성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저 쉽게 '당연히 몰수해야지'라고 생각하던 것이 법리적으로 들어가자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부닥친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반론하고 싶다.

일단 상황이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에 특별법으로 했으며, 5.18특별법, 4.3항쟁 관련 특별법과 같이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는 소급입법한 전례가 있다. 또한 헌법에도 중대한 공익적 이익을 위해서는 소급입법을 인정하고 있다.

다음으로 프랑스와 같이 아직도 나치부역행위자를 적발해 처단하는 것처럼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소급입법의 선례는 얼마든지 있다.

다음으로 대한민국의 헌법은 일제식민지 시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기 이뤄졌던 여러 재산권이나 소유권 이전(친일반민족 행위자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행위) 등 법적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 조상의 땅을 물려받은 것은 장물취득과 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끝내 형평성 문제는 해결할 논리가 없다. 이미 재산이 제3자, 4자에게 넘어간 경우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과연 이 법안은 이런 법리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입법취지를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까? 이로 인한 수많은 소송과 법리공방이 일어날 것이다. 상당한 시간 동안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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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14. 18:46

거란의 침입 과거 글들/사전2008. 3. 14. 18:46

배경

고려북진 정책요나라의 동진 정책이 충돌, 요나라중국 침공을 위한 후방 안정화의 일환으로 요나라는 고려를 3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거란태종후진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요나라로 바꿨다. 이 무렵 중국은 5대 10국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송나라로 정리되고 있었다. 결국 신흥 세력인 요나라송나라의 충돌은 동북아시아를 긴장상태로 몰아갔다.

이 동안 고려에서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서경 천도를 계획하고, '광군'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30만 대군을 조직하면서 요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962년에는 송나라와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 유민들이 세운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요나라를 협공할 태세를 보이자, 요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위기를 느낀 요나라986년 정안국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요나라는 최종적으로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후방에 위치한 고려 정복의 필요성을 느꼈다.

 1차 침공

993년 요나라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급습하였다. 이에 앞서 여진족이 먼저 고려요나라의 공격태세를 알렸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족의 정보를 믿지 않았다.

또한 당시 고려요나라에 대항하는 태세가 정비되지 못하였다. 주화파와 강경파가 조정에서 맞서고 있었고, 요나라군에 대항하는 체계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요나라군의 총사령관인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고, 곧 봉산군을 점령하였다. 고려 성종은 '청화사(화친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어 고려 침공의 의도를 파악하게 하였다. 한편 요나라군은 개경으로 침공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다만 고려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시간을 번 고려 조정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주고 요나라와 강화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당시 중군사로 있던 서희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이번 요나라의 침공은 영토를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송나라고려의 연대를 끊고, 요나라고려가 화친을 하여 요나라의 배후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임을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한 번 싸운 다음 화친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요나라소손녕고려가 아무런 응답이 없자,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패퇴당하고 말았다. 요나라의 기세가 꺾이자, 서희가 담판에 나서 "요나라의 동경(요양성. 요동의 중심)은 옛 고구려의 땅이며, 양국 간의 화친을 맺으려면 양국 사이에 있는 여진족의 땅을 정벌하여 양국을 잇는 도로를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소손녕서희의 주장에 동의하고,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요나라에 조공한다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에 있는 여진족의 땅 280리를 고려가 소유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이 땅이 바로 "강동 6주"이다.

화친이 성립된 이후 소손녕은 곧 군대를 몰고 물러갔다. 이렇게 1차 침공은 끝이 났다.

 2차 침공

1차 침공 이후에도 고려는 여전히 '친송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에 요나라고려를 침공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때마침 강조 정변이 일어나 고려 현종이 즉위하자, '강조에게 죄를 묻는다.'라는 구실로 요나라성종이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명분은 강조 정변을 문책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하고, 송나라고려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 위한 침공이었다.

요나라 성종의주 인근의 홍화진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진로를 바꾸어 강조가 거느린 군대를 통주 부근에서 대파하였다. 이때 강조도 죽임을 당했다. 기세를 올린 요나라군은 서경과 인근 성을 공격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개경을 점령하였다. 개경요나라군의 만행으로 도시가 엉망이 되었으며, 현종나주로 피신하였다.

이에 현종하공진을 '청화사(화친을 청하는 사신)'으로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였다. 게다가 요나라개경의 점령에만 급급하여 병참선이 매우 부실하였다. 요나라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현종이 직접 요나라에 가겠다.'라는 약속을 받고 철군하였다.

철군하는 와중에도 요나라 군대는 귀주 인근에서 양규, 김숙흥 등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3차 침공

1011년 개경으로 복귀한 현종은 약속과는 달리 요나라에 입조하지 않았다. 현종이 병을 핑계로 삼아 요나라에 입조하지 않자, 요나라강동 6주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1014년부터는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강동 6주를 빼앗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무력침공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고려요나라와 국교를 끊고, 요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요나라1018년 12월 소배압의 지휘 아래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상원수에 감강참, 부원수에 강민첨을 임명하고 20만 8천의 군사를 준비하였다. 두 장군은 홍화진으로 진격하여 의주 부군에서 요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에 소배압은 사잇길로 개경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그마저도 강민첨에게 격파당했다.

1019년 1월, 어렵게 개경부근에 요나라군이 당도하였으나, 이미 승패는 결정난 상태였다. 소배압은 사실상 승산이 없자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후퇴하는 요나라군을 귀주에서 대파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이다. 요나라군은 불과 수 천명이 살아서 국경을 넘었다.

이듬해 1020년 5월에 고려요나라의 국교는 회복되었으며, 고려요나라의 연호를 쓰고, 송나라와의 교류를 끊는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고려 임금의 요나라 입조 문제, 강동 6주 등의 문제는 요나라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도 사용하지 않았고, 후에 몽고족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기도 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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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g 2008.04.15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2008. 3. 12. 20:29

최치원 과거 글들/사전2008. 3. 12. 20:29

최치원은 아주 어릴 적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최치원은 진골이 아니라 6두품이었다. 어린 최치원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벼슬은 6급인 ‘아찬’에 불과하며, 진골 귀족들의 멸시와 차별 아래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 겨우 12살이었다. 어린 최치원은 외로이 당나라로 떠났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공부했다. 그리고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했다. 빈공과란 과거시험 가운데 당나라에 있는 외국인들끼리 겨루는 과거시험이었다. 겨우 18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최치원은 강소성 ‘율수’라는 곳에서 관리가 된다. 그곳에는 관리로서 최치원은 그곳을 훌륭히 다스린다. 그곳에서는 최치원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쌍녀분이다. 쌍녀분은 강제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자매의 묘였다. 이들을 위해 최치원이 위로의 시를 바치자 감동한 두 소녀의 혼령이 그날 밤 최치원을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최치원은 글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그의 시를 보고 나서 유명한 중국 문인(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18살에 문단을 휩쓸어 단번에 최고가 되었다.”라는 내용의 시를 남겼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남긴 1만 편의 시들은 지금도 중국 사람들이 감탄하고 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는 동안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당나라도 백성들의 삶이 많이 힘들었다. 당나라에서는 이 반란을 막지 못해서 쩔쩔매었다. 그러다 ‘고변’이라는 장군을 불러들여 반란을 막으려 하였다. 최치원은 이 고변이라는 장군아래에서 이런저런 일을 보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고변이라는 장군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 사람이라는 것이다.

최치원은 고변 장군의 일을 도와주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글을 한 편 쓰게 된다. 그 제목은 ‘격황소서’이다. 반란군 대장인 ‘황소’라는 사람을 토벌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반란군 대장인 황소가 최치원이 쓴 글을 보았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글 하나로 반란군 대장을 놀라게 할 정도로 최치원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최치원은 그 공을 인정받아 25살의 나이에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받는다. 자금어대는 금으로 칠해진 황제가 내린 허리띠다. 이는 대단히 명예스러운 일이다. 황제가 최치원을 인정하고, 아주 높은 자리를 줄 것이라는 상징이었다.

그 동안에 최치원은 매우 많은 글을 썼다. 그 글들은 당나라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글들이었다. 훗날 당나라가 망하고 당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신당서’라는 역사책이 만들어진다. 그 책에 유일하게 외국인이 쓴 글이 언급되어 있는데, 바로 최치원의 글이다.

최치원은 시를 쓰고 글만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각종 자료들을 정리하고, 남겼는데 너무나 완벽하게 정리한 것이 많아서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 도처에 남아있다. 이렇듯 최치원은 중국에서 최고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쓴 수많은 글들은 계원필경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남아있다. 또한 중국에서도 수많은 그의 글들이 남아 있다. 그 글들을 통해서 우리는 최치원이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실이 좌절한 최치원에게 다소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은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가 떠나온 조국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있으면서 신라가 휘청거리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가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다.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당나라 황제는 최치원의 결심에 매우 섭섭해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최치원은 28살에 신라로 돌아왔다. 당나라로 떠난 지 16년 만이었다. 당나라에서 최고의 천재로 이름난 최치원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신라 임금은 매우 놀라워했다.

신라 임금은 좋은 자리를 줘서 최치원을 가까이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의 눈치가 매섭다는 것을 바로 느꼈다. 왕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진골 귀족들에게는 새로운 경쟁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최치원을 좋아하는 왕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왕이 죽는다면 자신도 죽을 것이다. 최치원은 경주를 떠나서 외지를 떠돌았다.

신라 임금은 최치원에게 태수(시장)의 벼슬을 주었다. 최치원은 경주를 떠나서 자신이 관할하는 곳에서 조용히 머물렀다.

그곳에서 최치원은 신라의 문제점을 꼼꼼히 따져보았다. 그리하여 임금에게 그 문제점과 해결책을 정리해서 올렸다. 이것이 바로 ‘시무 10여조’라고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지금 남아있지 않지만, 여러 상황으로 볼 때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골품제를 없애라고 말했을 것이다. 골품이 낮은 사람은 능력이 있더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없고, 진골 귀족들이 높고 중요한 자리들은 모두 독차지 하고 있었다. 최치원은 골품제를 없애고, 과거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시험은 능력에 따라 관리들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거시험을 치른다면 게으른 진골 귀족들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을 것이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적어 놓았다. 최치원이 올린 ‘시무 10여조’가 이뤄진다면 신라는 다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임금은 일단 최치원을 다시 경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아찬’이라는 벼슬을 내린다. 6두품으로서는 가장 높은 등급의 벼슬이었다. 최치원은 자신이 올린 ‘시무 10여조’가 이뤄지길 간절히 바랬다.

당시 신라의 임금은 진성여왕이라는 여왕이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시무 10여조에 공감했지만, 이미 임금의 힘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진골 귀족들이 언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임금은 그저 하루하루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최치원은 분노했다. 자신이 최선을 기울여 만든 시무 10여조가 이뤄지지 않자, 최치원은 벼슬을 버리고 떠돌기 시작했다. 894년, 최치원의 나이 37살이었다.

최치원은 정처없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경치 좋은 곳에서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전국 곳곳에 최치원이 흔적들이 남아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산 해운대도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해운대의 ‘해운’은 최치원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해운대는 최치원이 머물던 곳이라는 뜻이다.

최치원은 전국을 떠돌면서 불교와 신선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치원은 유학, 불교, 신선사상, 이 3가지를 통일시켜서 자신의 철학으로 삼았다.

최치원이 떠돌기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신라는 갈라졌다. 그리고 왕건이 유력한 호족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치원은 자신의 못 다 이룬 꿈을 왕건에게 편지로 알려줬다. 왕건은 최치원의 편지를 보면서 새로운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 생각했을 것이다.

최치원은 우리가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고 있는 합천 해인사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역사학자들도 그 이후의 생애는 밝혀내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은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 만큼 최치원은 당시 사람들에게 뛰어난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 사회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인 시무 10여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돌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골품제와 여러 문제들은 그만큼 높고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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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9. 20:08

왕검성 과거 글들/사전2008. 2. 29. 20:08

  • 왕험성, 평양이라 불리기도 한다.

왕검성의 성격

왕검성은 아래의 3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 단군왕검의 건국지: 고조선 초기 단군왕검의 정치적 근거지로서의 성격.
  • 고조선의 중심지: 단군왕검 이래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
  • 고조선의 수도: 고조선이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면서 단순한 중심지가 아니라 행정, 군사적인 수도로서 성격.

위치

현재 가장 의견이 분분한 것은 왕검성의 위치이다.

  • 고정설(왕검성은 그 위치가 고조선 내내 변하지 않았다는 설)
    • 요동 소재설: 비파형 동검의 출토 범위와 고인돌의 분포지를 근거로 하여 만주 지방 요동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 표기로 이해하고 이를 왕검성의 위치로 보는 학설이 있다. 본 역사신문에서도 요동 소재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 평양 소재설: 북한도 1980년대까지는 요동 소재설을 기본적으로 적용하다가 '단군릉' 발견이후 고조선의 성립 이후부터 줄곧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의도(주체사상의 완성을 위한)를 의심할 만하다. 다만 평양지역도 고조선 초기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설을 뒷받침 할 만한 고고학적 발굴은 많이 이루어졌다.
  • 이동설: 많은 고대사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설로서, 초중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만주지역과 요동 일대였으나, 후기에 이르러 연나라의 침공 등을 맞으면서 조금 더 안정적인 평양 인근 한반도 서북부로 중심지를 옮겼다는 설이다. 특히 이 설의 배후에는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역사적 뒷받침을 안고 있다. 그러나 본 역사신문에서는 당시의 '패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요하로 전제하고 있다.
  • 기타 학설: 왕검성이 중국 내륙에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는 요서설, 복수수도설 등이 제기된다. 다수의 재야사학계에서는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 기존학계와는 확연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역사

왕검성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고조선 형성 초기부터 중요한 정치적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의 왕검성은 한반도-만주 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단군 왕검세력)의 근거지에 불과하였다. 즉, 고조선이나 한반도-만주를 대표하는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검성은 북방과 서방에서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시 된다. 따라서 왕검성은 고조선 내에서 점점 그 위상이 높아졌으며, 왕검성 일대는 어느 순간 고조선에서 가장 발전된 지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수한 문물을 전파하는 창구의 역할도 맡게 된다.

고조선이 차차 체계적인 국가로 성장해 나가자 왕검성의 위상도 그에 맞게 점점 높아진다. 왕검성 내에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체계와 주변 부족 세력들이 몰려드는 곳이 되었다.

연나라와의 대립(기원전 3~4세기 경) 이후 왕검성은 더욱 발달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연나라의 일원화 된 체계를 보면서 고조선의 왕검성도 연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러 지역으로 연결된 교통망과 관료체계, 군사체계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곧 고조선을 일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사실상의 고조선의 수도로 기능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점점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힘이 왕검성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다 위만은 왕검성을 점령하고(기원전 194년)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변 세력의 큰 반발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왕검성의 주인=고조선의 최고 지배자'라는 것이 일반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에도 왕검성을 점령하면 곧 고조선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하여 양복의 수군은 군대가 만들어지자 곧바로 왕검성을 공격하게 된다.(기원전 109년 가을)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 답게 우수한 방어시설과 많은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서 한나라 군대는 감히 무력으로 왕검성을 점령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왕검성 내부의 분열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듯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이자, 동방(만주-한반도)의 최고 도시 답게 한나라 군대를 막아내었다.

왕검성이 붕괴한 이후, 그 지역에는 낙랑군이 설치되고, 왕검성은 낙랑군의 치소(행정중심지)가 되어, 한나라가 옛 고조선 영토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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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8. 20:58

위만 과거 글들/사전2008. 2. 28. 20:58

사기삼국지에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위만이 중국계라고 하여도 그가 고조선에 망명할 당시 상투를 틀고, 복식을 고조선식으로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과 인접한 지역에서 고조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진나라한나라의 왕권강화책에 반발하여 고조선에 망명한 중국 귀족세력이 상당히 있었다. 위만도 이 때문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연나라 왕 '노관'이 제후들과 한나라에게 공격을 받아서 연나라를 버리고 흉노로 달아나자, 위만도 당시의 혼란 속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기원전 195년.

당시 고조선준왕은 그를 신뢰하여, 위만은 중국과 인접한 고조선 서부(대릉하~북경 인근)의 공백지 방어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박사(당시의 지방장관?)라는 직위도 얻게 된다. 그 지역은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 중국의 망명인들이 많이 정착해 있던 곳이었다. 위만은 이들을 모아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으로 침공하였다.(기원전 194년) 준왕은 '진국'으로 피난을 가고, 그는 왕검성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왕검성을 장악한 이후 강력한 대외정복, 중앙관제 확립을 꾀하게 된다.

위만은 중국 사람인가?

  • 망명 당시 상투를 짜고 고조선의 옷을 입었다.
  • 당시 요서방면에는 한나라 망명인들과 고조선인들이 섞여 살았다.
  • 준왕의 신임을 쉽게 얻은 점으로 보아서 완전한 중국계는 아닐 것이다.
  • 위만정권이 무너질 당시 관직들을 보면 그 명칭이 '고조선식'이었다는 것을 볼 때, 위만정권도 고조선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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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8. 20:44

부왕 과거 글들/사전2008. 2. 28. 20:44

준왕의 아버지. 고조선의 임금. 연나라의 공격에 의해 막대한 타격을 입은 고조선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왕권이 강화되어 왕위를 아들인 준왕에게 물려줄 정도였다.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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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8. 20:41

준왕 과거 글들/사전2008. 2. 28. 20:41

고조선의 임금. 부왕의 아들이라고 알려져있다.

위만을 등용하여 고조선 서부영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기원전 194년 위만의 쿠데타로 왕검성을 포기하고 바다를 건너 남쪽 진국으로 피난하였다. 피난한 위치는 현재 아산만 인근 인천지역이라는 설과 평양 인근이라는 설로 나뉘어져있다.

진국으로 피난한 준왕은 그곳의 임금을 자칭하고, 우수한 철기문화로 진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후에 마한세력을 통합하고 '한왕'을 칭했다고 전해진다. r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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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7. 20:18

단군 왕검 과거 글들/사전2008. 2. 27. 20:18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단군왕검은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웅녀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선진 유목세력인 (청동기를 보유한) 환웅세력과 만주일대의 토착세력인 웅(곰)부족이 결합한 것으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단군왕검은 190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는 한 개인이 통치한 것이 아니라, 단군왕검과 관련된 직계(혹은 방계)가 고조선을 지배한 시간을 나타내리라 짐작된다. 혹자는 이 기간의 고조선을 '단군 조선'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단군 왕검의 '단군'은 신성한 임금이라는 종교적 의미의 지배자를 뜻하며, '왕검'은 강력한 검이라는 뜻으로 대부족장이라는 정치적 지배자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제정일치사회로 학자들은 짐작한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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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7. 19:49

슈퍼 301조 과거 글들/사전2008. 2. 27. 19:49

슈퍼301조(Super 301조)는 지난 1988년 제정된 미국 종합무역법에 의해 신설된, 교역대상국에 대한 차별적인 보복을 가능토록한 통상법 310조 조항을 말한다.

1974년 제정된 미국 통상법 301-309조까지를 '일반 301조(Regular 301조)'로 뭉뚱그려 통칭하는 반면, 1988년 종합무역법에 의해 보복조항을 한층 강화한 310조를 '슈퍼 301조(Super 301조)'라고 부른다.

슈퍼301조는 교역상대국이 불공정행위를 했다고 판단될 경우 보복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보복을 할 수 있게 돼있다.

슈퍼301조를 발동하려면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매년 3월말 해당국가의 무역장벽보고서(NTE)를 의회에 제출한 뒤 30일 안에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한다. 이후 90일 안에 조사와 함께 협상을 시작하고 12-18개월 안에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보복판정을 하고 판정후 30일 안에 보복에 들어간다.

조사대상에 관계없이 어떤 상품이나 분야에 대해 보복조치가 가능하도록 돼 있다. 보복조치는 무역협정 폐지, 관세 및 비관세장벽 부과, 양자간협정 체결 등으로 이뤄지도록 돼 있으나 대개의 경우는 보복관세를 부과한다.

이러한 슈퍼301조는 국제 분쟁해결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보복조치라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다.

슈퍼301조는 한시법으로 만들어져 1989년-1990년에 적용된 뒤 폐지되었으나 클린턴 행정부는 1990년대 들어 행정명령 형식으로 슈퍼 301조를 세 번이나 발동한 적이 있다.

Posted by 임종금 J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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