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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00년 전,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통감부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앞세워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했다. 일주일 후, 8월 29일. 이 불법조약문은 공표되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후 100년의 시간이 지났다. 

지금 우리는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 식민지의 암흑을 걷어내고 자주독립과 번영의 역사를 일궜는가? 혹은 여전히 식민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충분한 국력과 위상을 갖춘 자주독립국으로 손색이 없다. 세계 경제 순위 15위 내외의 경제대국이며, 경제선진국클럽인 OECD 가맹국이다. 삼성을 포함하여 우리의 브랜드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으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G20정상회담에 참여·유치하고, 각종 국제경기를 비롯한 굵직한 행사도 많이 치러냈다. 또한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에서는 한류열풍이 불고 있으며, 서구에서도 조금씩 한국문화가 퍼져가고 있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으며, 올림픽·월드컵 등 국제경기에서는 늘 상위권에 포함되어 우리의 이름을 알리고 있다. 

외국 사이트를 둘러봐도 KOREA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게다가 단순한 경제력을 넘어,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도 우리는 나쁘지 않은 수준에 올라와 있다. 서구에서는 우리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안정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나라로 평가한다. 제3세계에서는 드문 평가이다. 물론 현 정부 들어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일부 퇴보했다고 하나, 여전히 제3세계 국가 가운데에서는 수준급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단순한 자주독립을 넘어 세계의 중심국가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표면적인 모습 이면에는 깊은 식민지의 굴레가 씌워져 있다. 애초 대한민국 정부의 건국조차 우리의 손이 아닌, 미국이 선택한 세력이 미국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건국 직후 미국과 소련의 손에 이끌려, 500만 명 이상의 엄청난 사망자를 낸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국군의 작전권마저 미국에게 이양해야만 했다. 

경제성장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의 압도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은 사회주의권과 경계에 있는 대한민국을 더욱 안정시키고, 사회주의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경제력을 키워준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근본적으로 미국에 종속적이다. 9·11 사건과 미국의 금융위기로 가장 크게 주식·환율이 흔들린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정치적으로도 마찬가지다. 5·16 쿠데타와 12·12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있어서도 미국의 승인이 사실상 결과를 좌우했다.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 유력한 여야 대통령 후보가 미국 대사관에서 일종의 ‘친미 각서’를 썼다는 이야기는 외세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는 자괴감마저 들게 한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대부업체가 우리나라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으며, 이미 알짜주식들은 일본자본에 잠식되었다. 그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정치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심지어 일본 자위대 창설 50주년 기념 행사가 버젓이 서울 한복판에 열리고, 몇몇 보수 정치인들이 그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어느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상적으로 일본말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다른 대통령들도 외국에 가면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로 말하려고 애쓴다. 상당수의 정치인과 재계 유력 인사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마치 자신의 고향인 것처럼 미국이나 일본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전략을 짠 후 국내로 돌아온다. 그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국적은 어디인지 궁금하다.  

식민지 역사는 단순히 겉으로 해방을 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역사는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식민지 100년, 해방 65년.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위 글은 2010년 8월 18일 자 경남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제는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21) 한일 강제병합 100년, 해방 65년을 바라보는 시선" 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이명박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나름의 이유를 대고 있지만, 역사를 조금 배운 사람으로서는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먼저 4대강 유역은 문명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터전이다. 큰 강 인근은 언제나 풍족한 곳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곳에서 물고기도 잡고, 열매도 따 먹고, 농사도 지으면서 살아왔다. 4대강 인근에 우리 조상들의 오랜 유산과 얼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4대강 유역에서 유적 조사를 해 본다면 상당한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사에 들어가기 앞서 공사지역의 유적 조사는 필수이다. 그러나 4대강 인근, 아니 낙동강 공사 구간만 하더라도 현재의 인력과 지원으로는 유적 조사만 하기에도 족히 수십 년은 걸릴 것이다. 필자가 듣기로는 대강 눈으로 훑어보고 어지간한 유적지가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저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수천, 수만 년을 숨 쉬고 있던 유산이 그대로 파괴되는 것이다. 

현재 홍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보를 쌓고 있는 낙동강 본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안정적인’ 강이다. 조선시대 조운선이 사시사철 다니던 곳이 바로 낙동강이다. 조운은 조선의 재정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운송로이다. 이곳에 사시사철 배가 다녔다는 것은, 일정한 수준에서 유량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매년 수해가 들어 본류가 넘쳤다면, 매년 유량이 부족하여 낙동강에 배를 못 띄울 정도였다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조운을 운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은 늘 낙동강을 통해 경상도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재정을 운송했다. 적어도 낙동강 본류는 홍수와 가뭄에 취약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예부터 대부분의 홍수는 지류나 소하천에서 일어난다. 김두관 도지사가 행정자치부 장관 시절 작성된 ‘우리나라 자연재해 발생 추이 분석 및 대응방안 연구’ 보고서에는 조선시대부터 일어난 홍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대부분의 홍수는 하천을 막고, 둑을 쌓아 농경지를 일군 지류에서 둑이 터지고, 제방이 넘쳐 홍수가 일어난다. 상습 침수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의 물길을 막은 곳에서 상습 침수가 일어나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자연적인 물길을 복원하고, 물길을 가로막는 주거지를 옮기는 것이 근원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제시되어 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고용창출과 경제성장, 뉴딜정책 운운하는 논리를 내세워 4대강 사업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고대로부터 토목공사는 고용효과를 창출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조선 광해군 시기 이뤄진 궁궐 축조도 광해군이 폭군이라서가 아니라, 임진왜란 직후 유랑민들을 거둬들여 일감을 주고 먹여 살리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그와 같은 고용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대규모 토목사업일수록 투자비용 단위 고용효과는 오히려 감소한다. 공사가 커질수록 큰 기계가 다 일을 하기 때문이다. 

낙동강의 수질개선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낙동강의 수질이 깨끗해지는데, 왜 부산광역시는 저 멀리 남강댐물이 필요한지 궁금하다. 오히려 강바닥을 파내어, 강물의 자정기능을 죽이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이렇듯 4대강 사업의 논리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논리가 궁색해지자, 한 교수는 4대강 사업 찬성 논리로, ‘메소포타미아가 최초 인류 문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관개수로를 잘 정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관개수로를 잘 정비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아마 그 교수는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 교수의 말대로 나일강과 황하보다 관개수로를 먼저 정비한 수메르인들은 조금 더 일찍이 문명을 건설했다. 그리고 온 강과 지류에 관개수로를 도배했다. 반면 황하나 나일강은 관개수로를 그리 크게 만들지 않았다. 그냥 범람하는 것을 놔두고, 최악의 사태만 면할 정도로 공사를 했다. 초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좋았다. 물을 구하기가 더 쉬웠으니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대규모 관개수로를 만들면서 물의 증발량이 엄청나게 늘어갔다. 농경지를 확보하느라 물을 잡아둘 나무도 다 베어 버렸다. 그리하여 땅은 사막이 되었고, 소금기만 남게 되었다. 수메르인의 말에 따르면 ‘땅이 하얗게 변했다’라고 한다. 별 수 없이 밀보다 소금기에 강한 보리를 경작했으나 이마저도 한계에 달했다. 결국 수메르 문명은 쇠락의 길로 가게 되었다. 

이렇듯 역사는 4대강 사업의 논리가 얼마나 허구인지 증명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4대강 사업을 중단하고, 자연 그대로의 물길을 되살리는 것이 진정으로 역사의 순리에 따르는 현명한 일이 아닐까.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7월 21일에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지난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경남은 선거 혁명을 일궈냈다. 오랫동안 이어진 특정 세력의 경남 독점을 막아내고, 새로운 인물과 비전을 선택했다. 진보 성향의 무소속 도지사가 당선된 ‘경남의 선택’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경남이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더 도약하는 경남이 되기 위해서는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바로 친위 공신 세력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고대에서부터 권력 교체를 한 군주는 두 가지 길을 가게 된다. 권력 기반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친위 공신 세력들을 끼고 가거나, 혹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친위 공신 세력들을 축출하고 나라의 틀을 굳건히 하는 일이다. 보통 전자의 길을 간 군주는 훗날 친위 공신 세력들의 비대해진 전횡을 막지 못하고, 새 정권의 기틀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후자의 길을 가는 경우에는 대개 나라의 기반을 튼튼하게 일구는 명군이나 성군의 칭호를 듣는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잔혹한 임금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보통 권력 교체를 하기 위해 친위 공신 세력들은 엄청난 노력과 헌신을 주군에게 베푼다. 대개 그 주군은 권력과는 가깝지 않거나, 비주류 인물이었다. 주군은 친위 공신 세력들의 헌신적인 보살핌 아래에서 절차탁마하여 결국 권력 교체의 기회를 잡는다. 이 과정에서 대개 친위 공신 세력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귀양을 가거나, 낮은 지위나 한직에 머무르는 등 온갖 어려움을 다 겪게 된다. 

그들의 땀과 눈물을 아는 군주는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내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는 곧 실패한 정권으로 이어진다. 당장 우리 역사에서 고려의 왕건, 조선의 태조, 세조, 중종, 인조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은 친위 공신 세력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중용하였다. 그러나 친위 공신 세력은 스스로 세력다툼을 하거나, 강력한 권세를 영구적으로 구축하는 권문귀족이 되어간다. 결국 변화와 개혁은 멀어지고, 갈등과 분란의 소지만 남게 된다. 

물론 이들 임금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권력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왕건이 죽은 직후에 일어난 수많은 반란과 왕위 다툼, 조선 태조가 공신 세력과 왕자들을 정리하지 못해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세조 임금이 친위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자 그들은 스스로 훈구파가 되어 사림파와 근 반세기가 넘는 ‘피의 갈등’을 계속했다.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중종 임금과 인조 임금은 왕권이 쇠락하여 후대 임금이 독살당하고, 외척들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남겼다. 이 참담한 역사 앞에서 ‘권력 기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참으로 옹색해 보인다. 

반면 고려 광종, 조선 태종 등은 달랐다. 그들은 친위 공신 세력들이 어떻게 정권을 농락하고,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 임금은 왕권이 안정되자, 즉시 친위 공신 세력들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못할 짓이었지만, 총체적으로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결국 역사 속에 빛나는 이름은 바로 그들의 이름이었다. 

경남의 정권 교체를 이룬 김두관 도지사 당선자의 모습과 옛 임금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 당선자는 변화를 외치며 그 자리에 올랐다. 진정 경남의 변화와 혁신을 일구기 위해서는 보은과 특혜가 아니라, 공신 세력을 초월한 청산을 통해 새로운 인물들을 발굴하고, 새 인물들의 역량을 토대로 강력한 혁신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경남 도민들의 뜻이었고, 그것을 거스를 경우에는 역사는 어떤 대답을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권력적 기반이 약하다고 하여 그들에게 기대서는 안 될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지방자치제가 발전하면서 도지사의 법적·행정적 권한은 이미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다. 도지사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힘이 없다고 왜소하게 생각해 친위 공신 세력들에게 기댈 경우,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제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6월 16일 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제는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19) 역사로 본 권력 교체의 명암 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세상에는 힘이 없는 세력이 있다. 반면에 힘이 있는 세력이 있다. 힘이 없는 세력들은 힘이 있는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힘을 모은다. 그것은 연대나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의 연대와 연합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을까? 우리 역사에서 적어도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연합은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나제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백제는 고구려에게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이 참수당했으며, 신라는 고구려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면서 신하의 나라로 자처했다. 압도적인 고구려의 국력 아래 나제동맹은 ‘고구려를 몰아내는 것’이 아닌, 그저 두 나라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나제동맹, 나당동맹은 일시적 연합일 뿐

이후 고구려의 국력이 잠시 퇴조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고,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어떤 분명한 비전이나 가치에 대한 공유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한 나제동맹은 그 한계가 분명했다. 적이 사라지자,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 멸망까지 두 나라는 근 100년이 넘도록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도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최후의 보루인 대야성마저 빼앗기자 다급해졌다.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 후방 공격을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곧바로 서로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서인과 남인의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두 세력은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연합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후 두 세력은 갈등하기 시작했고, 숙종 때는 환국정치를 통해 서로를 몰살시키기에 이른다. 

‘공동의 적’ 사라지면 또 다른 전쟁 시작 이렇게 공동의 적을 상정한 가운데 성사된 연합은 얕은 수준밖에 이르지 못한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후에는 서로 또 다른 전쟁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반면에 비전과 신념까지 공유하는 깊은 연대가 있다.

깊은 신념 공유하는 연대도 있어

대표적인 것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말 신흥무장세력과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 세력 간의 연합이다. 당시 고려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생겨난 권문세족은 고려를 좀먹고 있었고, 왜구·홍건적 등의 침공으로 국토는 피폐해졌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족들은 여전히 그 힘을 누리고 있었고, 개혁을 원하던 공민왕과 신돈을 제거했다. 당시 신진사대부의 힘만으로는 권문세족을 꺾을 수 없었다.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와 손을 잡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둘의 연합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연합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연합이었다. 그렇게 신진사대부와 이성계의 결합은 조선 왕조를 태동시켰다. 

위의 사례와는 달리 얕은 연합에서 깊은 연대로 변환한 사례가 있다. 바로 구한말 의병전쟁이다. 일제의 강점을 막기 위해 양반 위정척사파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민중들도 자체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 시대 내내 기득권과 피지배층으로 살아왔던 두 세력이 손을 잡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 두 세력의 연합은 문제가 많았다. 양반 의병장들은 민중 의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평민 출신 의병을 죽이기도 했다. 일제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일시적으로 서로를 인정해 주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두 세력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의병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1910년 이후에는 모두 공동운명체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두 세력은 만주와 연해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처음에 두 세력의 연합은 그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을 뿐이었으나, 민족해방의 신념을 공유하며, 오랜 시간 동안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깊은 동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깊은 연대가 꼭 좋은 역사적 사례만 낳은 것은 아니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90% 가까이 좌익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손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반공 이념과 좌익세력 척결이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이승만 정권을 탄생시켰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연대니 연합이니 하는 얘기가 자주 들려 온다. 과연 그것이 단순한 상황 타개를 위한 논리인지, 아니면 신념과 비전을 공유하고 먼 길을 함께 가자는 것인지 유권자들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념과 비전을 공유한 깊은 연대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우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3월 31일 자 기고글입니다. 원 제목은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18) 역사 속 연합과 연대" 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필자는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서 중앙정부에 종속된 지방의 역사를 말한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이 중앙과 지방의 역사는 누가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중앙의 역사에 지방이 종속되는 현상은 안타깝지만 이는 국가 운영의 효율을 담보할 수 있기에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반론의 측면으로서 토호라는 집단에 대해 역사적으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토호라는 집단은 지역에서 군림해 온 ‘유지(有志) 집단’을 얘기한다. 중앙집권화가 이뤄진 이후부터 중앙정부는 지방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지역의 유지 집단을 달래거나 혹은 강압하여 반발하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유향소를 설치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수령과 유향소의 유지 세력들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 지역의 특수성과 자치성을 인정하는 대신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도 역시 인정한다. 이런 관계는 어느 정도 양측의 긴장 아래 수평적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져 지방통제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침략전쟁을 본격화하기 위해 조선 농촌사회를 장악할 필요성을 느끼고 유지 집단들에게 접근하였다. 유지 집단들은 지역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일부 유지들은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베풀어 주는 등 신망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일제는 농촌사회의 장악을 위해 ‘영향력 있는 유지 집단의 포섭’, ‘일제의 조치에 내응하여 일을 처리할 행동대원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일제는 ‘농민들을 갱생시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농촌진흥회 조직) 농촌사회에 치밀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유지 집단들에게는 농촌진흥회의 고위직과 도평의회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협력을 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진흥회의 실무진들을 구성하여, 이들을 농촌사회 통제의 앞잡이들로 이용했다. 

과거 조선시대 양반 유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기반은 지역에서 쌓아온 명성, 토지와 친인척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유지들의 존립 기반은 일제가 되었다. 기반이 변함에 따라 유지들의 삶도 달라졌다. 과거 조선의 양반 유지들은 생산기반인 토지가 있는 농촌에 살았지만, 새롭게 토호가 된 이들은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는 읍내나 시내로 몰려들었다. 우리 역사에서 중앙정부가 지역의 유지 집단들을 완전히 장악 한 시대가 온 것이다. 

일제시대가 지나가고, 전쟁의 혼돈과 토지개혁이 일부 이뤄지면서 토호 세력들은 그 힘이 약해지거나, 혹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자구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농촌의 근대화’라는 결실을 이루기 위한 운동이었지만, ‘농촌의 희생을 바탕으로 산업화 달성’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토호들을 재양성했고, 각종 이권과 개발이익을 주며 중앙정부에 종속시켰다. 또한 농촌진흥회와 유사한 각종 관변단체를 조직해 토호들에게 그럴듯한 직함을 주고는 그들을 관리했다. 

현재 지방이 중앙에 종속된 현실에는 바로 이런 역사의 이면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빚어진 ‘지방의 중앙 종속’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토호들은 중앙정부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지방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개발업자와 부패한 공무원, 지역의 정치인들을 엮어 그들만의 성역을 일궈나갔다. 그들은 지역개발을 부추겼고, 그 과정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쫓겨났고, 토호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중앙정부는 개발 지원금을 통해 토호 세력을 확실히 장악했으며, 개발업자와 부패 공무원들은 그들대로 배를 채웠다. 

지방선거는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 영향력을 지닌 토호 혹은 대리인의 각축장이 되었다. 다가오는 6월 2일 지방선거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상태로 선거를 하면 늘 같은 결과만 반복하고, 토호들의 성역만 단단해질 따름이다. 달콤한 개발공약은 도민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만다. 

도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민들을 어루만져주고, 도민들의 목소리를 키워주는 세력이다. 3·15의거, 부마항쟁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었던 도민들의 참된 의식이 절실한 시점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10년 2월 4일자 기고한 글입니다. 원 제목은 [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 (17) ‘토호’로 본 중앙과 지방의 역사


Posted by 임종금 JKL
아마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 한국사 최악의 인물은 바로 이완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완용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를 알아간다는 자체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살펴보면 몇 가지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이완용도 자기 나름의 ‘소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소신은 우리가 아는 좋은 의미는 아니다. 그 소신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살펴보자. 

이완용의 첫 번째 소신은 ‘실리추구를 위한 변신’이다. 이완용은 철저하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변신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위정척사파에 가까웠다. 개화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서양 문물을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어 개화파들과 마찬가지로 물 건너 유학도 다녀오면서 개화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이후 아관파천을 통해 친러세력이 되었고, 다시 친미세력이 되었다가, 친일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수많은 변신을 통해 자기에게 철저히 이익이 되도록 했다. 

문제는 ‘이익이 되면 누구와 손을 잡아도 그만’이라는 사고이다. 그 사고가 바로 매국의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이완용은 경성일보에 시위를 하는 군중들에게 고하는 글을 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깨달아라. 제군, 미친 이가 아니라면 깨어나라.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제군은 왜 죽음을 스스로 택해서 호생(好生)의 덕혜에 복종하지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일본이 지배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괜히 자존심 내세우다가 호랑이 털을 건드려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명을 버리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이다. 요샛말로 하면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왜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냐?’는 것이다. 이완용의 이런 논리는 현재에도 잘 통용되는 논리이다. 

이완용의 두 번째 소신은 ‘질서와 평화 중시’다. 무언가 이완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그는 이 단어들을 잘 사용하였고, 실제로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제는 이 ‘질서와 평화’라는 단어 사이에 ‘강자와 시류에 대한 순종’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과 세계의 대세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이 일본과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대세이며, 동양은 일본의 선의를 받아서 함께 힘을 합쳐야만 서양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서양의 침략이라는 폭력을 상쇄하고 ‘평화’를 낳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완용에게 독립운동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질서와 평화를 어지럽히는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희생과 일제의 구조적인 폭력과 착취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완용이 그것에 대해 침묵한 이유는 바로 세 번째 소신 때문이다. 바로 ‘경쟁’이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독립협회 회원이었는데, 독립신문에 수차례 경쟁을 강조하는 글을 싣는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쟁이란 ‘원칙과 질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따위는 접어두고, 무조건 상대를 눌러 이기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폴란드와 미국의 예를 들면서 ‘폴란드는 경쟁에서 뒤처져서 망했고, 미국은 승리했다. 좌우지간 우리가 미국처럼 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제의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경쟁에서 패배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은 시류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이완용의 논리를 잘 살펴보면, 지금 우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들과 상통하는 점이 상당히 많다. 필자가 일전에 반일을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사관 논리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것을 언급하였다. 이완용 또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완용은 재론할 가치도 없는 최악의 인물이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느새 이완용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완용이 살던 구한말과 21세기의 시대상황은 전혀 다르다. 논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덮어놓고 이완용과 똑같다고 누군가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완용이 내세운 논리들이 그 시대에는 매국으로 이어졌으나,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그 논리들이 무엇으로 이어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완용의 논리들이 이 시대에 매국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극단적인 물질 자본주의, 이기주의, 사회적 모순과 결합하여 그 논리들이 비인간적 논리로 귀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린 과연 이완용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12월 30일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다. 어제의 모습이 모여 오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오늘을 보는 거울’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대하거나, 혹은 ‘그때 그 사람이 다른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식의 공상에 머물곤 한다. 

그래서 이번 연재부터는 역사를 통해 오늘의 시사점을 살펴볼까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직면한 모습은 바로 20세기의 격동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지난 20세기를 살펴보면, 오늘의 우리 모습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맞이한 20세기는 매우 불안정하고 요동치는 상황이었다. 개항 이후 국제질서에 편입되면서, 내부적으로는 위정척사 세력과 개화 세력, 민중 세력이 서로 대립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강력한 개화정책을 펴기 위한 갑신정변도 있었고, 개화정책을 되물리기 위한 임오군란도 있었고, 동학농민항쟁과 같은 민중들의 거대한 저항도 있었다. 이것들이 되풀이되면서 조선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것이 일단 정리된 것이 1894년 갑오개혁이었다. 갑오개혁과 일본의 본격적인 진출은 조선이 일본의 의도대로 나라를 개혁하고, 일본의 대륙전진기지가 되는 수순에 이르렀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는 일본을 견제하였고, 일본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서 당시 집권세력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였고, 당황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불안을 느낀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였고, 갑오개혁을 이끈 친일개화파 정권을 붕괴시켰다. 다시금 역사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한반도에는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 틈을 타 고종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 대한제국을 세움으로써 운신의 폭을 마련하였다. 고종 황제가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20세기는 시작되었다. 

 일단 키를 잡은 고종 황제는 두 가지 선택을 했다. 첫 번째 선택은 서양 문물의 대폭 수용이었다. 특히 전기와 전구, 전화기, 전차, 기차 등등 서양의 문물을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들여왔다. 당시 전기와 전차는 아시아에서는 일본도 들여오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학교를 짓고, 공장을 짓고, 서양 무기를 수입하는 등 고종 황제의 지출은 끝이 없었다. 고종 황제는 조급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본과 러시아의 대결 국면에서 최대한 빨리 근대화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종 황제는 엄청난 비용을 들인 것이다. 

다음으로 고종 황제가 선택한 것은 민권운동의 탄압이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처음에는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만민공동회가 의회 설립을 요구하면서부터 고종 황제는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는 철저히 봉건적 전제군주를 꿈꾼 사람이었다. 아마 그는 태종 이방원과 같이 강력한 왕권으로 강력한 개혁을 꿈꿨는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의회 설립이니, 민권운동은 바로 왕권을 내놓으라는 요구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판단이 되자 그는 이들 운동을 탄압하였다. 

 고종 황제의 두 가지 선택을 보면, 당시 고종 황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어물쩍거리지 않고 서양식 근대문물을 최대한 많이, 빨리 수입하면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는 단순히 서양 문물을 수입한다고 해서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근대적인 정치제도와 사회제도를 지향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근대화의 한 축이 이미 허물어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고종 황제는 봉건군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고종 황제의 판단착오를 오늘날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환경 관련 이벤트 하나 열고는 ‘생태도시’를 꿈꾸는가 하면, 로봇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다가 갑자기 로봇랜드가 들어서자 ‘첨단 로봇도시’라는 브랜드를 내세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로봇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과 인식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축제장을 유치하고, 대학에 몇몇 학과를 설치한다고 해서 그 도시가 로봇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가, 행사 하나 유치하거나 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화도시’가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정치권은 고종 황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지역을 발전시키려면 큰 밑그림을 그리고 이를 위한 연구와 지원이 있어야 하며, 시민들의 의식 향상이 함께 이뤄지고, 그와 관련된 행사나 시설이 들어서면서 지역은 그 방향으로 차근차근 발전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하나를 유치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행사가 끝난 행사장은 버려질 것이며, 큰돈을 들여서 만든 시설도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는 그 기능을 잃을 것이다. 돈만 날린 채.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10월 14일 기고한 글입니다. 원제는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었습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
현대는 원래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놀랄 수 있겠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 속에 살고 있다. 

근대라 함은 기본적으로 시민사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근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 현대라는 시대 구분은 어찌 나왔는가? 근대 가운데서도 우리 현실과 직접 맞닿아 있는 부분을 따로 떼어 현대라고 지칭한 것이다. 바로 역사학자들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는 임의적이고 유동적이다. 지금은 1945년부터 현대라고 분류하지만, 아마 2050년에는 1987년부터 현대라고 분류할 수도 있다. 2200년에는 2100년부터 현대라고 분류할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가 배우는 역사 속에서는 역사학자들이 임의로 붙인 이름이나 구분이 많다. 예를 들어 보자. 조선 말기 개화파와 쇄국파(위정척사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또 개화파 가운데에서는 온건적 개화파, 급진적 개화파로 나눠질 수 있다. 개화파들은 새로운 세상을 주장했다고, 쇄국파들은 서구문물을 반대했다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정말 개화파들은 조선의 모든 것을 다 갈아엎고,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정말 쇄국파들은 서구문물은 하나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급진적 개화파라고 하더라도 일부 조선의 문물 중 지킬 것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극단적 쇄국파라고 해도 서양의 무기나 몇몇 생각들은 분명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조선의 것을 얼마나 지킬 것이냐, 서양의 문물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이냐에 따른 ‘차이’만 존재한 것이다. 그것은 칼로 무 자르듯이 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역사학자들은 분류의 필요성을 느꼈고, 일단 누구는 개화파, 누구는 쇄국파 이런 식으로 분류해 놓는다. 임시로 분류한 것이기 때문에 분류의 기준이나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유동성이 크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외워 버린다. 원래 역사는 외우는 것이라고 교육 받았기에, 이분법적으로 외워 버린다. 

개화파와 쇄국파들이 청팀, 홍팀으로 나눠져 싸운 것으로 판단해 버린다. 그 결과 개화파들은 무조건 서구문물에 찬성했고, 쇄국파들은 무조건 반대했다는 식의 공식이 등장해 버린다. 그렇다. 역사가 수학공식처럼 도식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도식화된 역사 이해의 문제점은 그것이 평생 하나의 불변의 진리로 굳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나 교양·역사 서적들은 이를 편 가르기나 선악의 대립을 바탕으로 손쉽게 역사를 풀어버린다. 

그렇게 한 번 굳어진 역사적 이해는 누군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해 주기 전에는 평생 풀 방법이 없다. 이렇게 역사는 흐릿한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이쪽에 있으면 이런 모습이 조금 더 강하게 나타나고, 저쪽에 있으면 저런 모습이 조금 더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어떤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할 때, 주변 정황이나 인과관계를 다양하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도식이 아닌 상황과 흐름에 따른 역동적이고 불확실한 것이라고 이해시켜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인 것을 도식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매우 도식적이다. 이 사람은 보수고, 저 사람은 진보고, 좌파가 있고, 우파가 있고,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딱딱 잘라 버리는 것은 역사를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습관이 그대로 사회에 투영된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이라도 하나 정도는 진보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람이라도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보수적 사고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진보야, 나랑 한마디도 안 통할 거야’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승자와 패자의 구분도 심각한 것이다. 승자독식, 약육강식이라는 단어를 어렸을 때부터 교육 받아온 우리 국민에게 승자와 패자의 구분은 너무 쉽게 내려진다. 하지만 승자는 승리를 거두기 위해 많은 희생을 했고, 오히려 승리했음에도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이기 쉽다. 당나라는 수많은 이민족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로 인해 많은 장군과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결국 이는 당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겉으로는 패배했지만, 이후 꾸준히 살아남아 결국 발해로 이어져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이렇듯 역사는 원래부터 쉽게 흑백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도식화된 역사관은 도식화된 사회관으로 이어져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외우기 위해 임의로 행해졌던 도식화 교육은 중단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관점, 하나의 사실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와 흐름 속에서 역사적 감각을 잡아가는 방법으로 교육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8월 12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얼마 전 필자는 한 보수우익단체 계열의 교과서포럼에서 만들어진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를 보았다. 그 교과서에는 김구 선생이 항일 테러활동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또한 그 단체 산하의 한 모임은 백범기념관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임시정부와 윤봉길 의사가 소속된 한인애국단은 알카에다보다 더 무서운 테러조직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당황하겠지만, 필자는 나름대로 그들의 논리를 분석해 보았다. 폭탄은 던졌다는 행위 자체가 불법 폭력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시각을 벗어나 전 세계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객관적’으로 테러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테러를 통해 공포를 조장하고 정치적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액면 그대로만 봤다면 단어 몇 글자 수정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부당한 행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비겁하게 테러 행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더 깊은 내면에는 ‘일제는 비록 우리 민족을 억압했지만, 우리의 근대화를 일깨워준 존재’라는 생각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다. 

후자에 대한 부분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앞선 내용부터 살펴보자. 1932년 중국 상해. 평화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 행사장에 젊은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가 단상에 폭탄을 집어 던졌다. 이 장면만 살펴봐서는 분명 평화를 해친 폭력행위, 테러로 여겨질 만하다. 그러나 진정 평화는 누가 해쳤던가? 일제는 1870년대부터 근대적 무장을 앞세워 무력으로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우리의 수많은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이 일제의 총에 쓰러졌다.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활약할 당시에 일제는 간도참변을 일으켜 많은 양민들을 학살했다. 3·1운동 시기에 일제는 또 수많은 우리 민족을 살해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고 우리 민족이 당했던 것 이상으로 중국인들을 살육했다. 이런 큰 역사적 흐름에서 ‘침략’이 있었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를 테러라 지칭하는 이들은 단순히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는 그 순간의 장면을 가지고 테러라 지칭하였다.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이나 흐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 장면만 바라본 것이다. 

이건 애초에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을 모르는 유아적 사고에 불과하다. 역사 이해에 있어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특히 유명한 전쟁, 발명, 사건 등을 보면서 그 안의 장면에만 신경 쓰다 보면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놓치거나 그 내면에 흐르는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의 승리만을 기억하면서 임진왜란의 본질을 고찰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순신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만약 이순신이 살아 있었다면 일본에 쳐들어가지 않았을까?’하는 유아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모두 역사의 한 장면에만 집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다시 윤봉길 얘기로 돌아가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전 세계는 한민족이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중국인들은 한민족을 ‘일제와 함께 싸워야 할 동맹군’으로 여기기 시작했으며, 이는 민족연대전선을 낳게 되었다. 이런 노력으로 결국 일제 패망과 함께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는 역사적 성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규정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침략과정 → 우리 민족의 저항과 운동 → 세계 여론의 환기와 독립의 약속 → 독립’이라는 큰 역사적 흐름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큰 틀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 큰 사건이었고, 지지부진한 독립운동이 일제에 대한 반격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런 유아적 실수를 토대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일까? 보통 역사의 장면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특정한 생각이나 방향을 강조하기 위하여 역사의 한 장면을 발췌하여 넣는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넣어버리면 자신의 생각과 부조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 가운데 유리한 부분을 자르고 잘라, 한 장면만을 넣는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역사적 흐름에서 ‘의거’라고 규정해 버리면, 자신들이 교과서에 쓴 일제에 의한 근대화, 일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데 큰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그 장면만을 부각하여 ‘테러’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우리 민족과 윤봉길 의사를 분리해 버렸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만족하고 사는데, 특정 정치세력이 무리하게 독립을 요구하려다 테러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강조한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뒤져 보아도,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한 사람을 테러라는 부정적 단어를 덧씌워 기술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역사 교과서에 워싱턴 대통령이 반란군의 수괴라고 기록되어 있고, 보스턴 차 사건이 강도질 또는 테러 행위로 적혀 있을 리 만무하다. 간디의 불복종 운동을 불법 집회, 불법 파업이라는 식으로 인도 교과서에 적혀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일부 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있게 해 준 독립운동이 테러활동으로 변신해 있다. 이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땅을 부정하는 것이고,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 극우세력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필자는 그들의 어이없는 주장을 보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지금 이런 교과서가 나오는 것도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닐까? 우리가 역사를 냉철하게 살펴볼 수 있는 지혜를 쌓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역으로 우리가 ‘아, 역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구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단어 하나에도 신중을 기해야 하는구나’라고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역사적 장면만을 꼬집어서 만든 유명한 교양서가 있다. 한국사 100장면, 세계사 100장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책을 막상 살펴보면 그 장면에 대한 설명은 맨 처음 1~2문단에 불과하다. 나머지 3~4쪽은 그 장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에 대해 폭넓게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역사적 흐름에서 전체적으로 그 장면을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있다. 이런 책들을 학생에게 읽힐 때, 학생들은 역사를 이해하는 능력이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역사는 스냅사진이 아니라, 활동사진(흐름)이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5월 20일자 기고글


Posted by 임종금 JKL
개방과 쇄국. 오랫동안 회자된 논제이다. 

대체로 우리는 ‘쇄국’ 때문에 조선은 근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 속에서 사람들에게 늘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조선의 문을 꽁꽁 닫은 사람이었다. 이 때문인지 대중들은 흔히 흥선대원군을 떠올릴 때 꽁한 옹고집을 가진 어르신 정도로 인식한다. 과연 그럴까? 

흥선대원군의 부인은 의외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우리에게 개화파의 거두로 알려진 박규수를 평안감사와 좌의정으로 적극 등용하였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증기선을 모방한 증기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속도가 느려서 실패했다. 서양의 총알을 막아내려 방탄복도 만들었으나 너무 무거워 실용화엔 실패했다. 또 프랑스와 협력하여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 그가 개인적인 신념만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나라를 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고는 할 수 없다. 나름대로 개방을 모색하기도 하였고, 상황에 발맞춰 대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정보가 부족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일단 조선 내부를 안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표면적으로 쇄국정책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흥선대원군의 고민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열강들은 개항한 나라를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고, 정치적인 지배력까지 행사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개항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개항론자들의 주장은 달랐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구 열강과 무력으로 맞서다 개항했으며, 이로 인해 서구 열강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선이 주도권을 쥐고 개항을 전략적으로 추진했다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우수한 문물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유림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보수 유림들은 경제적으로 판단해 볼 때, 조선이 얻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서양과 교류를 하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은 서양의 사치품이나 신기한 물건들인데, 이를 들여오면 그 대가로 지불할 것이 쌀밖에는 없다. 조선의 쌀이 빠져나간다면 조선 백성들의 삶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유림들의 주장처럼 개항 이후 쌀값은 폭등했고,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래서 방곡령을 발동하여 쌀과 곡식의 반출을 막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사례로 볼 때, 흥선대원군이나 보수적인 유림들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개항 불가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논리가 있고, 현실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개항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생각에만 빠져 무조건 개항하거나 무조건 쇄국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은 당대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역사의 이면이나 진정한 내용을 보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대중매체나 완전하지 못한 교과서에 의존하여 역사를 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논리도 없이, 현실 인식도 없이 결과론만 들고 과거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기, 다른 나라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일본은 개항을 선택했다. 1850~60년대 개항을 통해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개항으로 인한 식량 부족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을 강제로 개항하여 조선의 쌀을 토대로 간신히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 나아가 만주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반면 미국은 일정 부분 문을 닫아버렸다. 당시 영국의 철강은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미국도 영국 철강을 수입함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다. 그러다 미국인들은 여기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은 영국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급격하게 올리기 시작했고, 특히 철강 제품에는 50% 이상의 ‘미친 관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국은 문을 닫고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하여 철강 산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의 공업이 충분한 기술력을 갖췄을 때, 전 세계에 철강제품과 공산품을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문을 닫아거는 나라에는 힘으로 문을 열고 시장을 잠식해 갔다. 

근대화 시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포항제철과 현대자동차 등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산업들은 철저히 문을 잠그고, 정부의 엄청난 지원으로 빠르게 기술력과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기간산업이 되었다. 

이렇듯 문을 열고 닫는 것은 그 시대적 상황과 자국의 현실과 적절히 발맞춰 이뤄져야 한다. 개방해서 성공했으니 우리도 무조건 따라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위험한 논리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미 FTA와 세계 금융 공황으로 인해 다시 ‘개방이냐, 보호냐’라는 19세기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을 최대한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생각이나 특정한 사례에 매몰되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다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쳐올 것이다.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치밀한 꼼꼼함이, 한쪽으로의 일방적인 정책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다면화된 정책이 필요할 때이다.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경남신문 2009년 4월 8일자 기고글입니다.

Posted by 임종금 JKL